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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_비화 추적2] ‘최순실 아버지’ 최태민 최초 인터뷰

우먼센스 옛 기사로 본 박근혜-최태민

2016.10.30(Sun) 11:38:14

‘최순실 씨의 국정 농단 의혹’이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씨의 연결고리인 최 씨의 아버지 최태민 씨에 대한 궁금증도 커지고 있습니다. 이에 비즈한국은 과거 ‘우먼센스’에 게재되었던 최태민, 최순실, 박근혜, 세 사람의 인터뷰와 관련 기사를 다시 싣습니다. ​당시 인터뷰 내용을 100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지만, 당사자들의 관계와 심경 등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는 데에 의의를 두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의 분규가 표면화되면서 다시 ‘최태민 미스터리’가 문서화되고 있다. 처음에는 박근혜 씨와 근영 씨 자매간의 갈등인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던 기념사업회 분규는 차츰 시간이 지나며 최태민 씨에게로 모든 원인이 집중되고 있는 양상이다.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 있으며, 온갖 추측과 소문만으로 존재해왔던 최태민 씨.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일부의 주장대로 희대의 사기꾼인가 혹은 외로운 박근혜 씨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순수한 조언자인가? 본지가 최초로 최태민 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실체에 접근해 보았다.

 

80년 초 고립무원의 시기에 자신을 도와준 유일한 사람인 최태민 씨에 대해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다는 근혜 씨. 그녀는 세간에 떠도는 최 씨에 대한 ‘루머’를 믿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기념사업회 분규가 표면화하자 다시 떠오른 ‘최태민 미스터리’

 

지난 한 달 동안 서울 능동에 위치한 어린이회관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어린이회관을 운영하는 육영재단과 회관 안에 있는 고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의 분규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던 것이다. 기념사업회와 육영재단의 분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10월 28일 어린이회관 정문 앞에서 있었던 데모에서부터였다. 

 

이날 시위는 최태민 목사 규탄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 시위를 주최한 것은 숭모회라는 조직이었는데 이날에야 비로소 일반에게 알려지게 된 단체였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듯한 삐끄덕거림은 이날부터 있었다. 시위에 참석한 일부 사람들은 애초에는 박근혜 씨(38세) 등을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참석했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내부의 갈등이 표면화되더니 소문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구구한 소문의 요지는 박근혜 씨와 근영 씨(36세) 자매의 불화설이었다. 가족 간의 갈등과 불협화음을 가장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진 근혜 씨는 소문을 불식시키려는 듯 급기야 육영재단 이사장직과 기념사업회장직을 사퇴하고 근영 씨를 후임으로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11월 3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근혜 씨를 지지하는 측과 숭모회 등 간의 알력은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두 번의 공식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형제간의 불화는 터무니없는 얘기다. 이제 기념사업이 궤도에 올랐고 피곤하므로 동생에게 일을 맡기겠다’면서 사태를 진정시키려던 근혜 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근혜 씨의 돌발적인 사퇴 배경을 의심하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이야기가 퍼져 나왔다. 추측은 자매간의 불화설로부터 유력 정치인 등의 배후 개입설로까지 증폭되었다.

 

한편 숭모회 측은 박근혜 씨에게 자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최태민 씨를 일관되게 비난해왔다. 비난내용의 골자는 최 씨의 육영재단 운영에 있어서의 간섭과 전횡이었고 개인적인 신상에 관한 공격도 포함돼 있었다. 기념사업회 분규가 복잡해질 즈음 숭모회 측은 ‘우리의 요구는 박근혜 이사장의 퇴진이 아니라 최태민 씨의 퇴진’이라고 입장을 정리했다.

 

한편 우여곡절 끝에 육영재단 이사장직에 취임한 박근영 씨는 취임식날 기자들과 잠시 만난 자리에서 최태민 씨의 혐의 사실을 믿으며 언니는 속고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보도됐다. 결국 표면적으로 드러난 육영재단·기념사업회 분규의 원인은 최태민이라는 미스터리 인물에게로 모아지고 있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한 달 여 동안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분규에 원인을 제공할 만큼 그는 역량있는 인물인가? 

최태민 씨에 대해선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그의 나이만 해도 매체마다 78세, 69세 등으로 제각각 보도됐다. 시중에 나도는 사진도 대머리에 안경을 끼고 웃는 표정인지, 심각한 모습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흐릿한 흑백 사진 1장이 유일했다.

 


기념사업회 나온 뒤 생긴 일이므로 분규에 신경쓰지 않으려고 한다

 

난무하는 소문과 추측으로만 존재했던 최태민 씨. 그에 대한 자료도 유신 시절 그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았다는 이른바 ‘수사 기록’ 뿐인데 이 수사 기록으로부터 그에 대한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항간의 갖은 추측(대부분은 악의적인 것이지만)에도 최태민 씨는 침묵을 지켜 왔다. 박근혜 씨를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진 75년 이래로 그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럴수록 그에 대한 미스터리는 더욱 깊어갔다. 

 

이번의 분규가 발생한 뒤 기자는 여러 채널을 통해 최태민 씨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답변은 한결같이 '인터뷰 불가'였다. 그의 실체 파악을 통해 기념사업회 분규의 원인을 알아보려던 기자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서울을 떠나 한 도시에 칩거해 있던 그의 소재를 알아내고 전화 통화에 성공함으로써 그의 목소리에 의한 그 자신의 ‘정체’를 알릴 수 있게 되었다. 

 

다음은 수차례에 걸친 최태민 씨와의 전화 인터뷰와 가족 등 측근들의 증언을 정리한 내용이다. 최 씨에 대한 호칭은 편의상 목사라는 직함을 사용했다.

 

-육영재단과 기념사업회의 분규가 벌어지면서 최 목사에 대한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박근혜 이사장이 현직에서 물러난 지금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근혜 씨는 최 목사께서 이미 몇 달 전부터 기념사업회 등에서 손을 뗐다고 말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 ‘사태’를 보는 심경은 착잡할 것 같습니다. 우선 이번 일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내가 나온 뒤에 생긴 일이므로 신경 안 쓸려고 합니다. 내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뒤에 나오는 얘기지만 최태민 씨는 현재 78세이다. 지난 88년 12월 박근혜 씨와의 인터뷰를 섭외하러 기념사업회에 갔던 기자는 한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그와 우연하게 만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76세였을 때인데 고령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중키에 살이 찌지 않은 적당한 몸매, 꼿꼿한 허리와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 걸음걸이 등 매우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에게서는 ‘도사’ 혹은 ‘최면술사’ 같은 소문에서 전해지는 신비스럽거나 비범한 분위기보다는 복덕방이나 공원 등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함이 전해졌다.

 

그때는 최태민 씨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번에야 처음 들을 수 있었다. 고령의 나이를 느낄 수 없는, 한 50대쯤의 목소리 같은 건강함이 배어 있었다. 측근들에 따르면 보청기를 사용하지 않으며 시력도 좋은 편이라고 한다. 그의 말은 짧았다. 군더더기 설명을 하지 않는 것은 그의 성격 같았다. 거의 ‘예’와 ‘아니오’만을 말하려는 그의 말투에는 어떤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투는 독선적이라거나 독단적이라는 비난을 들을 소지가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고소라는 원치 않던 방법을 택했다

 

-기념사업회 등에서 손을 뗐다면 언제, 어떤 자리에서 물러난 것입니까?

“지난 8월 하순부터 물러났습니다. 여러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은데 원래 내게는 개인 사무실도 없었고, 아무런 결재 권한도 없었어요.”

 

11월말 D일보에 게재된 최 씨 사진.

-그러면 최 목사께서는 무슨 일을 하신 겁니까? 기자가 기념사업회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데 출․퇴근을 했던 것이 아닌가요? 구체적으로 밝혀 주십시오.

“나는 박근혜 이사장의 자문 역할에 그쳤어요. 박 이사장이나 기념사업회가 나와 의논할 일이 생기면 손 관장(이번에 물러난 어린이회관 손미자 관장 지칭)이 연락해주었고… 부정기적으로 나갔던 셈이지.”

 

최 씨는 기념사업회에 나가도 어린이회관 직원들과는 거의 대면하지 않았다는 것이 측근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기념사업회 사람들과는 가끔 만났으며 만나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기념사업회 조직이라는 것이 원래 70년대 중반에 활동했던 새마음봉사단의 조직을 복원시킨 것이고 최 씨는 그 조직 구성원의 일원이자 구심점이었으므로 최 씨가 기념사업회 인사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 한편 최 씨가 근혜 씨를 도와준 자문내용은 아직은 구체적인 사항을 밝힐 단계가 아니라고 한다.

 

다만 근혜 씨가 기념사업회 조직을 만들면서 조직을 활성화할 방안에 대해 자문을 구하면 서로 의견을 교환해 합일점을 찾아가는 식이었으며 근혜 씨가 박대통령의 명예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로 속상해하면서 해결점을 찾으면 최 씨가 ‘재료가 있소? 이렇게 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며 방법을 제시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최 씨가 제시한 방법이나 자문 내용이 모두 채택됐다면 항간의 표현대로 ‘배후 조종자’일수도 있겠으나 근혜 씨가 그럴 정도로 자기 판단력이 없는 어수룩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측근들은 주장한다.

 

-박근혜 씨와 15년 가량 알고 지낸 사인데 서로 존대말을 씁니까? 최 목사께서 나이가 많으니까 낮춤말을 사용하지는 않나요?

“박 이사장과는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피차 경어를 사용하고 있어요.”

 

-기념사업회를 왕래하면서 자문 역으로서의 월급을 받으셨나요?

“그런 적 없습니다.”

 

-이번에 최 목사 측에서 고소를 제기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 목사에 대한 비난이 어제, 오늘에 있었던 일이 아닌데 지금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왜 이번에 고소를 결심했습니까. 또 고소의 구체적인 내용을 들려주시죠.

“이전에 나온 기사들은 워낙 제 멋대로 쓴 것이니까 신경을 쓰지 않았죠. 그러나 이번에는 육영재단과 기념사업회를 인도하는 아름다운 일도 고약하게 쓰고 있으니까 고소하게 된 것입니다. 또 나는 이미 물러나있던 상탠데 전횡을 일삼으니 퇴진하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나야 늙었으니 상관없다고 해도 내게도 딸들과 사위들이 있는데… 차제에 진실을 규명해보자는 결심을 한 것이죠.”

 

최 씨는 사실 기념사업회의 분규가 발생한 뒤에도 이미 자신이 물러난 뒤였으니까 조용히 있다가 여생을 마칠 생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공격’이 너무 집요해 고소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고소는 11월 말 중에 제기될 것인데 우선 언론매체가 그 대상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고소가 예정돼있던 주간지 1개와 월간 여성지 1개는 서로의 시각 차이가 해소돼 취소됐다. “한 가지 부연한다면 나는 아직도 좋은 방향으로 일이 매듭지어지길 원해요. 싸우려고 하는 고소가 아닙니다. 언론이 자제해주길 바라요.”

 

 

77년도에 작성된 수사기록은 박대통령의 ‘친국’에서 무혐의 처리

 

-최 목사에 대해선 갖가지 설과 추측이 난무해왔습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가지 소문들을 확인하면서 사실 여부를 가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최 목사에 대한 갖은 추측의 기본 자료는 이른바 중앙정보부의 수사 기록입니다. 조사 받은 시기와 조사 내용을 들려 주십시오.

“그게 77년에 작성된 수사 기록이에요. 원래는 나돌아 다닐 수가 없는 것이죠. 수사 결과 내가 기소된 뒤 기소 중지되거나 불기소 등으로 처리됐던 것이 아니라 아예 그냥 없었던 일로 처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항간의 갖은 억측에도 침묵을 지켜온 최태민 씨. 최 씨는 본지와의 최초 인터뷰에서 ‘육 여사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근혜 씨의 자문 역할을 했으며 이른바 최면술은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이제는 조용히 지낼 생각’이라는 최 씨는 ‘내 일이 더 이상 거론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조사받았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들려주시죠.

“그런 것 밝히면 곤란해요.” 

 

최 씨는 조사받던 상황을 밝히길 거부했지만 그 조사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77년 9월 최 목사는 위출혈로 고려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병원에 입원 중인 상태에서 최 목사는 수사관들의 조사를 받았다. 외부, 특히 박근혜 씨와는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일종의 감금 상태였다는 것이 측근들의 주장이다.

 

측근들은 당시 최 목사가 순순히 기술한 자술서를 토대로 수사 기록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신문 형식으로 기록이 꾸며졌다고 한다. 수사는 목적성 있는 신문 내용에 긍정의 대답을 듣고서야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고 측근들은 강조한다. 즉 강압에 의해 수사 기록이 꾸며졌다는 것이 최 씨 주변의 주장이다.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결론은 누가 내렸나요? 당시 중정부장이던 김재규 씨였습니까.

“웬걸. 박 대통령이었지.”

 

-박 대통령 앞에서 이른바 ‘친국’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사실대로 얘기했는데 ‘없었던 일’ 처분을 받았단 말입니까.

“생각해보시오. 당시 박 대통령이 어떤 분이었소? 그분 앞에서 조사를 받는다면 바로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소상히 말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고려병원에 입원중일 때 불려나가 받은 ‘친국’ 자리에는 박 대통령과 최태민 씨, 근혜 씨만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근혜 씨의 증언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분위기는 진지하면서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박 대통령은 중정에서 올라온 적지 않은 분량의 수사 기록을 넘기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 최 씨에게 물었다. “이런 일 있습니까?”“그렇소?”식으로 따져나갔다. 신문은 1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당시 최태민 씨와 근혜 씨가 조직했던 새마음봉사단은 여성 회원 수만 500만에 이르렀다. 최 씨가 조사받은 것은 비대해진 조직 때문이었다. 직접 조사를 진행하며 박 대통령은 새마음봉사단이 이권운동한 단체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하다. 이권에 개입했다면 돈이 나와야 하는데 돈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최 씨의 생각이다. 최 씨는 “당시 봉사단 지부장 등의 청탁이 제법 들어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권을 찾아 움직이질 않았었다”고 주장한다. 

 

 

육영수 여사는 만난적 없으며 최면술은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박근혜 씨를 처음 만나게 된 과정을 들려주시죠. 일설에는 최 목사가 근혜 씨에게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셨다’ 운운의 편지를 보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이니까 자꾸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 같아요. 75년 초였을 겁니다. 육 여사가 돌아가신 뒤 위로하는 내용의 편지는 보냈었죠. 그 내용을 지금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육 여사 현몽’이라거나 정식으로 접견 신청하는 내용 따위는 쓰지 않았어요. 아마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기회 있으면 한번 만나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로 편지의 끝을 맺었지. 그 편지를 본 박 이사장이 불러줘 만나게 된 것이고…. 생각해보시오. ‘현몽’ 등의 말이 대학교육을 받은 박 이사장에게 먹혀들 것 같아요?

 

-육 여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숭모회에 관련된 한 인사는 최 목사가 육 여사 앞에서 경호원 두 명을 대상으로 최면술 시범을 보였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만나요? 꾸미려면 좀 그럴 듯하게 꾸미지, 그렇게 졸작밖에 못 만들어내나. 육 여사는 한번도 만나본 일이 없어요.”

 

-최면술은 정말 하십니까? 또 안수기도로 병 고친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기가 막힌 듯)허허 내 참…. 어떻게 하는 것이 최면술인지 몰라요. 그리고 병은 의사가 고치지 왜 내가 고쳐요. 나는 어딜 가든지 얘기합니다. 목사, 전도사, 중들이 왜 병을 고친다고 하느냐고요. 본인의 마음이 돈독하고, 신심이 강하면 정신력으로 병을 이겨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병은 의사가 고쳐야지.”

 

‘박근혜 씨가 최 씨의 최면술에 걸려 있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다. 당사자인 두 사람이 사실을 부인하는 현시점에서 그런 소문의 진위를 더 캐보기는 어려우나 한편에선 ‘박근혜 씨와 최태민 씨의 상호신뢰에 이유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 77년 최 씨가 중정으로부터 받은 수사기록은 근혜 씨도 볼 수 있었다. 기록 중에는 근혜 씨가 상상하지 못했던 내용이 들어 있을 수도 있었다.(여기에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수사 기록이라는 것을 인용하면서도 정작 그 실물을 본 사람은 몇 안된다는 것이다. 기자 또한 그 실물을 아직 못 본 까닭에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공개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러나 당시 근혜 씨는 수사기록을 보는 순간 ‘최 목사가 이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고 박 대통령에게 직접 만나볼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근혜 씨가 보여준 신뢰를 최 씨는 잊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5공화국이 들어선 뒤 근혜 씨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었다. 근혜 씨가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공개적인 박 대통령 추모 행사를 치르지 못하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있었다. 또 근혜 씨 보기에 아버지의 위신이 유린되는 3공화국의 비사들이 들춰지기도 했다. 근혜 씨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있던 사람도 떠나가는 형국이었고 도움 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이때도 근혜 씨 주변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 최 씨였다. 최 씨는 자신이 받았던 신뢰만큼 근혜 씨에게 믿음과 정신적인 안정을 주었다. 두 사람을 잘 아는 기념사업회 인사는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상호 신뢰가 더욱 다져졌다고 주장한다.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목사이며 검도 7단의 실력으로 건강 유지

 

-항간에는 최 목사의 이름이 7개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 3번 개종했다는 소문도 있는데 진위를 밝혀 주시죠.

“내가 1912년생입니다. 우리 세대만 해도 본명 외에 아명도 있고, 자도 있고, 호도 있었습니다. 7개가 되지도 않지만 이런 것이 7개라면 또 몰라도…. 이름이 7개씩이나 된다는 것은 터무니없어요. 더욱이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 때마다 이름을 바꿨다고 하는 모양인데 말도 안 돼요. 내 호로 퇴운(退雲)이 있었어요. 시기가 정확히 기억 안나는데 내가 ‘입산수도’하고 있던 시절에 월남한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가호적법이 만들어졌어요. 그때 나를 알던 사람이 멋대로 호적에 퇴운을 이름으로 올렸더군요. 호로 쓰던 것이어서 75년에 태민(太敏)으로 개명했죠. 호적상의 개명은 이것뿐입니다.”

 

지난 11월 15일 근혜․근영 씨 자매의 이․취임식이 있은 직후 어린이회관 내에서 설전을 벌이고 잇는 숭모회 측 인사와 근화봉사단원들. ‘근혜 씨 사퇴반대’를 요구하던 봉사단원들에게 숭모회 인사는 ‘언니․동생이 의논해 결정한 일’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방금 입산수도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런 점 때문에 이른바 도사로 알려진 것 아닙니까?

“아, 그럼 기도하러 산으로 가지 바다로 갑니까? 나는 계룡산은커녕 설악산도 안 가봤어요. 가족과 놀러 속리산은 가봤네요. 우리 집안은 아버지 때부터 기독교 집안이에요.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갔고 딸 네 명 모두 교회에 나갑니다.”

 

측근에 따르면 최 목사의 말투는 워낙 이렇다고 한다. 산 등에 요양 차 쉬러 가는 것을 입산 수도 식으로 표현한다는 것. 오해를 살 염려가 있으므로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해도 최 씨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가족 관계를 들려 주시죠.

“황해도 봉산에서 났습니다. 형제가 3~4명 있었는데 다 죽었어요. 이제 나 혼자고 게다가 월남한 신세여서 친척도 없습니다. 지금은 딸만 넷이 있습니다.”​ 

 

최 씨의 아버지 최윤성 씨는 금년 정부로부터 독립 유공 훈장을 받았다. 독립운동자금책으로서 서대문형무소에 구속, 수감되기도 했던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최태민 씨가 일제 시대에 순사로 근무했다는 소문도 있는데 사실이라면 정부가 훈장을 수여했겠느냐고 반문했다.

 

어린 시절 독립운동하는 아버지를 둔 관계로 집의 재산은 탕진됐다고 한다. 논과 밭두렁에서 자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 월남한 뒤 부산에서 건국대학이라고 불리던 건국의숙을 마쳤다. 전공은 법과였다. 건국 의숙은 뒤에 없어지면서 동아대학교에 흡수되었다고 한다. 공무원이나 회사원 등은 적성에 맞지 않아 주로 사업을 했다. 서울에 올라온 뒤 주로 산 지역은 서대문구. 강남에서 유치원을 운영하는 셋째딸(34세)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에 현재의 기상대 부근에 정원이 있는 2층 양옥집에서 살았으며 자가용으로 집차가 있어서 기사를 부린 기억이 있다고 한다. 

 

최 씨는 현재의 부인(71세)과 피난지인 부산에서 연애 결혼했다. 당시 최 씨는 호적이 없었고 가호적법이 만들어지면서 늦게 혼인 신고를 했기 때문에 이것을 두고 재혼이니, 어쩌니 하는 것 같다고 측근은 해명했다.

 

-목사 자격 여부도 논란이 되고 있는데 목사 안수는 언제 받았습니까? 신학교는 어딜 다녔는지…

“75년 1월 종합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75년 5월에 대한예수교 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속한 신학교와 교단이 사이비라고 몰아칠텐데….”

 

-어린이회관 인사에도 관여했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나는 어린이회관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어요. 주로 한 일이 기념사업회의 자문 역할이었습니다.”

 

-현재 가진 재산을 밝혀 주시겠습니까?

“역삼동에 있는 집뿐입니다. 믿지 않겠지만 6~7년 전 그쪽 땅값이 오르기 전에 매입했소.”

 

-건강은 어떻습니까? 건강 유지의 비결이 있다면?

“혈압이 좀 높은 것 외에는 다 좋아요. 매 끼니 작은 공기밥 1그릇을 먹는 소식을 하고 있고, 검도를 12년째 하고 있습니다. 검도협회에 소속되지 않은 검도 단체에서 7단을 받았죠.” 

 

최 씨는 새벽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 기상해 검도를 40분 정도 한다고 한다. 마당 한 편에 나무봉이 박힌 쇠기둥을 박아놓고 그 봉을 죽도나 목검으로 치는 연습을 한다는 것. 그 외에는 별 취미가 없어서 골프, 바둑, 여행 등도 즐기지 않는다고 한다.

 

-박근혜 씨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대화가 되는 인물이죠. 그만한 여성도 없지 않아요? 내 개인적으로는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근영 씨나 숭모회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런 얘기는 하지 맙시다”

 

-앞으로의 계획은?

“해도 뭐이 돼야지. 이제는 조용히 지낼 생각입니다.

 

-더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려주시죠. 

“내가 이 나이에 와서 누구를 원망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너무 어처구니없을 뿐이에요. 추호도 맞불질할 생각 없고,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박이사장은 재물욕도, 명예욕도 없는 사람”이라던 최태민 씨는 “조용히 살 수 있도록 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길 바란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한편 지난 11월 27일 D일보는 ‘근혜와 근영 사이…최태민 씨는 누구’라는 제목 아래 최 씨는 ‘4개교의 교리를 합친 영세교의 교주로 꿈에 나타난 육 여사가 돌봐주라 했다며 75년 근혜 씨에게 접근, 관계가 밀착’됐으며 ‘당시 청와대에 마음대로 드나들며 각종 감투를 썼고 비리 소문에 정보부 조사를 받은 뒤 박대통령의 직접 신문을 받았다’는 내용과 ‘재단의 말단 직원 채용까지 승인하고 이름이 7개나 되며 분규가 나자 한 달 전 시골 간다며 잠적했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에 대해 최 씨측은 “터무니없는 내용을 게재한 신문을 보고 최 씨가 또 충격을 받았으며 대응책을 고려하고 있는 중”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우먼센스 1990년 12월호 기사)

비즈한국 bizhk@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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