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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욱 경제팩트] 컨테이너선은 어떻게 세계 교역을 장악했나

베트남전 때 미군 보급품 수송 포장방식 통일…운임 저렴, 일본 한국에 수출기회 제공

2018.05.07(Mon) 10:39:07

[비즈한국] 최근 남북관계가 개선되며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육로 교통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희망이 부풀어 오르고 있다. 그러나 ‘경제성’만 따져본다면 육로 수송보다는 해운 운임이 저렴한 게 일반적이다. 특히 컨테이너를 이용한 대량 수송의 경우 그 차이가 더욱 극명하다고 한다. 최근에 흥미롭게 읽은 칼럼 ‘철도운송과 해상운송의 단가 비교’​에 따르면, 미국 LA 롱비치 항구에서 테네시주 멤피스까지 컨테이너를 수송하는 경우 배를 이용하는 게 무려 2000달러나 싸다고 한다.*

 

컨테이너를 가득 실은 화물선. 남북관계가 개선되면서 모스크바까지 육로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진다. 그러나 ‘경제성’만 따져본다면, 육로수송보다는 해상운송 운임이 더 저렴하다.


아래의 북미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동남부에 위치한 멤피스까지 배로 가려면 파나마운하를 거쳐 뉴올리언스에 도달한 후 다시 미시시피 강을 타고 올라가야 하기에 약 4800마일 거리다. 반면 철도를 이용하는 경우 약 2000마일 정도만 운송하면 되니, 거리 면에서 해상운송이 거의 2배 이상 더 걸리는 셈이다.  

 

운송거리의 차이가 이렇게 큰데도 해상운송이 더 저렴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는 규모의 배(뉴파나맥스급)를 빌려 장거리 운송하는 경우, 1마일당 약 0.80달러의 비용이 드는 반면 철도 수송은 1마일당 약 2.75달러의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해상 운임이 크게 떨어진 것도 감안해야겠지만 운임이 웬만큼 오르지 않고서는 해상수송의 경쟁력 우위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동남부의 멤피스까지 배로 가려면 파나마운하를 거쳐 뉴올리언스에 도달한 후 다시 미시시피 강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 철도보다 거리가 2배 이상 길지만, 운임은 2000달러나 싸다. 사진=구글지도 캡처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해서 해상수송은 이렇게 강력한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최근 읽은 흥미로운 책 ‘더 박스’는 이 의문을 깔끔하게 풀어준다. 1965년 베트남 전쟁이 해상운송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1965년 초의 남베트남만큼 현대식 군대를 지원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은 드물었다. 베트남은 국토의 남북 길이가 약 1100킬로미터가 넘었지만 수심이 충분히 깊은 항구는 단 한 곳밖에 없었고, 거의 운영되지 않은 철도선이 하나밖에 없었다. -책 314쪽

 

이렇게 사회간접자본시설이 부족한 곳에 군 병력과 전쟁 물자를 보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 미군이 이용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항구인 사이공항(현재의 호치민)도 메콩강 하류 삼각주에 자리 잡고 있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점도 문제를 악화시켰다. 

 

화물 하역 과정이 매우 느려 바지선이 (수심이 얕아 먼 바다에 정박할 수밖에 없었던) 화물선으로 이동해 탄약을 받은 후 다시 항구로 돌아오기까지, 짧게는 10일에서 길게는 30일까지 걸렸다. (중략) 사이공항의 상황은 한층 더 열악했다. 베트남에서 유일하게 수심이 깊은 항구이지만, 넓은 수로가 좁아지면서 교통체증이 두드러졌다. 1965년 한 해 동안 화물의 양은 50%나 늘어났고, 사이공항은 화물처리 불능 상태에 빠졌다. -책 316쪽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왜 그토록 어려움을 느꼈는지, 그 이유를 여실히 알 수 있다. 특히 사태를 더 악화시킨 것은 미국 본토의 사령부가 이런 현실을 잘 모른 채 계속 병력과 물자를 밀어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당시 고위 해군 장교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사이공 항구는 쓰레기장이 되었습니다. 배들은 메콩강 상류로 올라가 거기에 머물렀지요. 계속이요. 화물을 내려놓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 -책 317쪽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미국 정부도 해결책을 고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전 초기 6만 5000의 대병력을 투입했음에도 전황이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어려운 국면에 처하고, 더 나아가 일선 부대에서 보급품 부족으로 큰 희생을 치르게 되자 존슨 행정부로서는 무언가 해결책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군대의 한 연구팀은 이런 상황을 조사한 뒤 1965년 11월 운송 과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권고안을 제출했다. (중략) 이 연구팀이 제시한 권고 목록 중 첫 번째 권고안이 가장 주목할 만했는데 바로 모든 선적은 ‘통일된 포장’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책 323~324쪽

 

이 제안은 당시 태동기에 있던 컨테이너 산업에 일대 ‘전환점’을 제공했다. 컨테이너는 규격이 통일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배에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을 비약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66년 1월, 호놀룰루에서 열린 최고위급 회의 자리에서 합동참모본부는 “민간기업과 계약을 맺어 항구의 제반 시설 운영 등 해당 기업이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업무를 맡기기로 한다”는 새로운 정책을 발표했다. -책 327쪽

 

물론 이 결정이 실행에 옮겨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사이공항 하역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며 ‘컨테이너 부두’의 건설에 강력히 저항했고, 또 미군이 어떤 업체에게 이 어려운 과제를 맡겨야 할지 판단을 못 했던 것도 시간을 끌게 된 원인이었다. 

 

1966년 10월 4일, 군 해상수송지원단은 베트남 관련 컨테이너선 서비스를 공개입찰에 붙였다. (중략) 시랜드서비스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운송료를 부과하지 않고 톤당 고정요금을 제시함으로써 낙찰 받을 수 있었다. (중략) 

 

그야말로 하룻밤에 캄란만은 대형 컨테이너 항구로 바뀌었다. 캄란만에 마련된 여러 개의 부두 중 하나가 대형 컨테이너 크레인을 지탱할 수 있도록 새롭게 설계되었다. (중략)

 

2주에 한 번씩 거대한 컨테이너선이 캄란만에 600개가량의 컨테이너를 실어 날랐다. 5분의 1은 육류와 농산물, 아이스크림 등을 넣은 냉동 컨테이너였다. 나머지 컨테이너들은 탄약을 제외한 대부분의 군수품이었다. (중략) 1967년의 미군 역사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항구의 만성적인 적체 현상 문제는 해결되었다.”

 

군 해양수송지원단 사령관 로슨 래미지는 일곱 척의 시랜드서비스 컨테이너선이 기존의 벌크선 20척 몫을 해냄으로써 만성적인 화물선 부족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추정했다. 

 

호치민항(옛 사이공항)과 캄란만(붉은 표시)의 위치. 사진=구글지도 캡처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조건이 아니었던들, 컨테이너선이 세계의 교역을 장악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항구의 강력한 하역노조, 그리고 컨테이너 항구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초기 투자 비용 문제 등으로 인해 아마 그 뒤로도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세계 물류에 어마어마한 혁신을 가져올 새로운 발명품, 컨테이너 시스템을 조기에 도입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컨테이너선의 도입은 비단 베트남 참전 미군에게만 ‘복음’이 아니었다. 일본 등 동아시아의 제조 공업국들에게도 엄청난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시랜드서비스의 최고경영자였던) 말콤 맥린은 이득을 남길 수 있는 기회를 그냥 넘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미국 태평양 연안에서 베트남으로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배가 7척이나 있었다. (중략) 베트남으로 향할 때의 배는 군수품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미국으로 돌아올 때에는 텅 빈 컨테이너만 실었다. (중략)

 

만일 시랜드서비스가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돌아올 때 빈 배로 올 게 아니라 유료 화물을 실을 수만 있다면 수익은 한층 더 늘어날 것이었다. 이 문제를 곰곰이 고민하던 말콤 맥린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일본에 들르면 어떨까?”

 

1960년대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던 국가 중 하나였다. (중략) 마침 일본 정부는 컨테이너화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중이었다. (중략) 도쿄/요코하마와 오사카/고베 두 지역에 컨테이너 터미널을 짓도록 하고, 일본과 외국 해운사들과 연합해 컨테이너선과 터미널을 운영하도록 권고하고 있었다. 

 

물론 한국도 이 흐름에 큰 도움을 받았다. 베트남 전쟁 특수로 한국 경제가 성장했다고들 이야기하는데, 그보다 더 큰 특수는 바로 ‘동아시아의 컨테이너 항로’ 개척이 가져온 해상운임 비용의 경감이었던 셈이다. 미국에서 생산된 제품보다 동아시아에서 생산된 물건이 더 싸게 팔리는 세상은 컨테이너 없이 출현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The Maritime Executive(2017.12.25), 『Comparing Maritime Versus Railway Transportation Costs』.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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