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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음악일기] 최초의 흑인 디바, 어리사 프랭클린

그래미 18회 수상, 로큰롤 명예의전당 헌액 등 흑인음악의 뿌리가 된 '솔 싱어'

2018.08.27(Mon) 13:43:18

[비즈한국] 1998년 그래미 시상식. 파바로티가 갑자기 공연을 취소했습니다. 이미 시상식이 시작된 시점이었지요. 남은 시간은 불과 몇 분.  이 짧은 준비 시간을 거쳐 누군가는 세계 최고의 성악가 대신 노래를 불러야 했습니다. 대신 노래를 부른 사람은 솔(Soul)의 여왕, 어리사 프랭클린이었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전혀 다른 해석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러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어리사 프랭클린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

 

8월 16일, 어리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0년대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친 그였기에 충격이 컸습니다. 그의 음악은 끊임없이 샘플링되어 지금도 들리고 있죠. 오늘은 솔의 여왕, 어리사 프랭클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어리사 프랭클린의 베스트 음반 재킷.


어리사 프랭클린은 1942년 3월 25일 미국 테네시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C. L. 프랭클린은 흑인 인권 운동가이자 목사였습니다. 아버지의 바람기로 부모의 결혼생활은 불행했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좋은 매니저였습니다. 어리사 프랭클린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초기부터 가스펠 가수로 활동했습니다. 아버지 또한 넓은 인맥을 활용해 매니저를 자처했지요.

 

어리사 프랭클린은 가스펠 가수로 활동하던 중 1961년 첫 대중음악 앨범을 냅니다. 컬럼비아 레코드와 계약했죠.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어리사 프랭클린은 주로 재즈에 영향을 받은 스탠더드 팝 음악을 냅니다. 이런 음악은 어리사 프랭클린의 진가를 발휘하기도 어려웠을뿐더러, 로큰롤(Rock’n’roll)이 휩쓸던 당시 트렌드와도 맞지 않았습니다.

 

6년 계약 후 그는 재계약을 맺지 않고 애틀랜타 레코드로 이적합니다. 이곳에서 그는 ‘아이 네버 러브드 어 맨(I Never Loved a Man (The Way I Love You))’, ‘리스펙트(Respect)’, ‘어 내추럴 우먼((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등 현재까지 그를 대표하는 솔 명곡을 쏟아냅니다. 흔히 말하는 어리사 프랭클린의 ‘전성기’가 바로 이때지요.

 

어리사 프랭클린의 ‘리스펙트’. 흑인 인권을 상징하는 오티스 레딩의 원곡에 여성 인권의 의미까지 더해서 담았다.

 

70년대 이후 그는 점차 내리막을 걷기 시작합니다. 젊은 층이 리드하는 팝 음악의 성향상 어쩔 수 없던 면이 있었겠죠. 그가 고집하던 정통 솔 음악, 알앤비 음악이 유행에 뒤처지기도 했습니다. 그의 음악은 점차 ‘​철 지난 음악’​이 되어갔습니다. 다만 그는 누구보다 많은 앨범을 낸 성실한 앨범 아티스트였습니다. 아쉽게도 앨범보다는 싱글 위주로 더 돋보였지만요.

 

그는 고민 끝에 ‘젊은 사운드’를 받아들입니다. ‘프리웨이 오브 러브(Freeway of Love)’, ‘아이 뉴 유 워 웨이팅 포 미(I Knew You Were Waiting for Me)’ 등 당대에 유행하던 뉴웨이브, 팝을 시도한 음악이었습니다. 현재 어리사 프랭클린을 상징하는 음악은 아니지만, 당대에는 크게 히트했지요.

 

전성기가 지납니다. 유행을 따라 변화를 시도합니다. 그러다 다시 돌아와 팬의 환호를 받습니다. 이 과정을 거친 이후에 팝스타는 딱히 할 활동 방식이 없어집니다. U2가 그랬고, 브라이언 맥나이트가 그랬지요. 어리사 프랭클린도 마찬가지로 90년대를 거쳐 다시 솔 음악으로 돌아왔고, 이후에는 ‘과거 가수’가 되어 신곡보다 공연 위주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도 ‘솔 싱어’로 대중이 기억하는 아이콘입니다. 그래미 수상 18회. 총 음반 판매량 7500만 장. 빌보드 TOP10 곡 17곡. 빌보드 R&B 차트 1위 곡 20곡. 여성 흑인으로 최초로 로큰롤 명예의전당 헌액. ‘​롤링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 중 1위 등 그야말로 화려하지요.

 

특히 그는 넓은 음역대와 화려한 테크닉을 과시적으로 보여주는 흑인음악 디바의 창법을 처음 보여준 ‘최초의 디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온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디바의 시초인 셈입니다. 하지만 그의 중요성은 단순한 테크닉에 그치지 않습니다. ‘최초’의 솔 여성 스타라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60년대 흑인음악, 솔 음악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 셈입니다. 

 

어리사 프랭클린의 ‘스프릿 인 더 다크’.

 

90년대 이후 흑인음악은 물론 팝 음악 전체를 힙합이 점령했습니다. 힙합 아티스트들은 자신이 존중하는 아티스트의 음악을 샘플링하며 과거의 전설과 자신을 연결했는데요. 솔의 여왕 어리사 프랭클린도 그랬습니다. 솔 샘플을 즐겨 사용한 카니예 웨스트, 제이지부터 맙 딥, 모스 데프, 최근에는 여성 래퍼 랩소디, DJ 무라 마사까지 수많은 힙합 아티스트가 어리사 프랭클린의 목소리를 샘플링해 자신의 음악에 담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그렇게 젊은 아티스트의 샘플링을 통해 재해석되어 지금까지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주고 있습니다.

 

카니에 웨스트의 ‘스쿨 스피릿’. 어리사 프랭클린의 ‘스피릿 인 더 다크’를 샘플링했다.

 

우리가 즐겨 듣는 지금의 흑인음악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예컨대 솔 황제 제임스 브라운, 오티스 레딩 등이 그렇습니다. 어리사 프랭클린도 마찬가지죠. 그의 초기작은 솔 그 자체가 되었고, 그 음악이 발전해 알앤비가 되고 힙합이 되고, 나아가 지금 우리가 즐기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역사가 짧은 한국은 아무래도 최근 유행에는 민감하지만 그 음악을 만들 때까지 이루었던 ‘맥락’과 ‘뿌리’에는 약한 면이 있습니다. 바로 그 뿌리가 어리사 프랭클린입니다. 수많은 팝 뮤지션이 그에게 조의를 표한 건 그의 음악을 위해서기도 했지만, 그의 바통을 이어가겠다는 의미도 있을 겁니다. 흑인음악의 뿌리인 솔 디바, 어리사 프랭클린이었습니다.

 

랩소디의 Laila’s Wisdom. 어리사 프랭클린의 음악을 재해석했다.

김은우 NHN에듀 콘텐츠 담당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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