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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사육신묘'에 무덤이 7개인 까닭은?

김문기 후손 '진정' 받아들여 추가…올바른 역사란 무엇일까

2018.09.26(Wed) 11:24:05

[비즈한국] 서울 노량진에는 수산시장이나 공시(공무원 시험) 학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옛날부터 한강을 대표했던 포구에는 그보다 덜 유명하지만 더 오래된 것들도 있다. ‘사육신공원’ 안의 사육신묘 또한 그중 하나다. 학창시절에 국사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육신과 생육신. 죽음으로 충성을 다한 여섯 신하와 살았지만 지조를 지킨 여섯 신하. 딱딱 대구(對句)로 떨어져 짝짝 입에 붙으니 외기도 쉽다.

 

그런데 이게 웬걸, 역사 깊은 노량진의 유서 깊은 사육신묘에는 무덤이 일곱이다. 우째 이런 일이? 사육신묘 안내판에도, 바로 옆 ‘사육신 역사관’에도 속 시원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곳에 모두 7기의 무덤이 있다는 설명뿐. 거기다 이들은 모두 단종 복위를 꾀하다 세조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점에서 같다. 그렇다면 원래 사육신이 아니라 ‘사칠신’이었던 것일까? 

 

사육신공원 내부의 역사관. 사진=구완회 제공

 

# 후대의 권력이 만들어낸 ‘사칠신’?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단종 복위 시도는 당시 조선을 뒤흔든 역모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죽은 신하가 어찌 여섯이나 일곱뿐이었을까?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 사육신이란 그중 ‘대표 선수’를 일컫는 말로, 이들을 콕 집어낸 것은 남효온의 ‘육신전’이 처음이었다. 

 

자신이 생육신 중 한 명으로 뽑히는 남효온은 이 책에서 성삼문과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 여섯 신하의 일대기를 전기 형식으로 기록했다. 이들은 모두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람들이었고, 이때부터 ‘사육신’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을 뽑은 것은 남효온의 개인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들이 단종 복위 사건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꼭 여섯이어야 할 객관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였을까? 훗날 정조는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을 공인하면서 기존의 사육신 이외에 육종영(여섯 명의 왕족들), 삼상신(세 명의 제상들), 사의척(네 명의 의로운 외척들), 삼중신(세 명의 중신들) 등 다양한 명단을 작성한다. 

 

현재 사육신묘에 사육신과 함께 무덤이 있는 김문기는 원래 삼중신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말 사육신묘를 대대적으로 정비하기 얼마 전, 김문기의 후손들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유응부가 아니라 김문기가 사육신의 한 사람’이라는 진정을 냈다. 이들은 ‘세조실록’에는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성삼문 등 다섯 사람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었다. 한 달 이상 고심하던 국사편찬위원회는 기존의 사육신묘에 김문기를 추가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사육신묘. 성삼문, 유응부,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외에 김문기의 가묘가 추가되어 현재는 모두 7개 묘역이 있다. 사진=구완회 제공

 

하지만 아무래도 이상하다. 애초 사육신이란 남효온의 ‘육신전’에서 유래한 것이었으니, ‘세조실록’을 근거로 사육신을 바꾼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한 결론이었다. 더구나 기왕 김문기 후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유응부를 빼고 김문기를 넣는 것이 일관성 있는 판단 아닌가? 여기에는 역사와는 상관 없는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을 자랑하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바로 김문기의 후손이었다는 것. 국사편찬위원회가 오래 고심한 것도, 어정쩡한 결론을 내린 것도 모두 김재규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건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설득력 있는 가설로 남아 있다. 

 

#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그러니 행여 사육신묘를 찾았다 7기의 무덤을 만나더라도 당황하지 마시길. 대신 사육신을 역적으로 죽인 것도, 다시 충신의 대명사로 호출한 것도, 거기다 한 명을 더 한 것도 모두 권력의 힘이었음을 기억하는 것은 어떨까? ‘조선의 역적’이었던 정몽주가 슬그머니 ‘고려의 충신’이 되었다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유난히 강조하던 유신시대 역사 교과서에서 ‘한반도 대표 충신’으로 자리매김되었던 것처럼. 

 

똑같은 반란이라도 성공하면 반정이고 실패하면 역모이듯이, 역적과 충신 또한 누가 권력을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역모 혐의로 죽임을 당한 사육신이 충신이 되는 과정 또한 그랬다. 조선 후기 사림파가 왕권을 능가하는 신권을 구축하면서 사육신이 충신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이다. 만약 세조 때처럼 왕권이 신권을 압도했다면 사육신이란 여전히 역적의 대명사였는지도 모른다. ‘육신전’을 본 선조가 ‘이들은 충신이 아니라 불공대천(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의 역적들’이라면서 불태워버리라 명령했듯이. 

 

사육신공원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 사진=구완회 제공

 

조지 오웰은 ‘1984년’에서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고 말했다. ‘진리부’라는 국가기관에 소속된 소설 속 주인공은 권력의 입맛에 맞게 과거의 역사를 고치는 일을 했다. 역사를 둘러싼 투쟁이 그 옛날이나 소설 속의 일만은 아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싸움이 벌어진 바 있으니. 

 

그렇다면 어떤 역사, 누구의 역사가 진짜 올바른 역사일까? 아니, ‘진짜’ ‘올바른’ 역사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어려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다만 7기의 무덤을 품은 사육신묘를 둘러보면서 드는 생각은, 당대의 권력의 입맛에 딱 맞는 역사일수록 ‘진짜’ ‘올바른’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 권력이 대다수의 사람을 대표하는 데 실패했다면 더더욱 말이다. 

 

여행정보

▲위치: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로 191

▲문의: 02) 820-9844

▲관람 시간: 상시개방, 연중무휴(공원 내 역사관은 09:00~06:00, 일∙월요일 휴관)

 

필자 구완회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여성중앙’, ‘프라이데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여행출판팀장으로 ‘세계를 간다’, ‘100배 즐기기’ 등의 여행 가이드북 시리즈를 총괄했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역사와 여행 이야기를 쓰고 있다.  

구완회 여행작가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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