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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국의 천지인] 인문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인문학은 인간 욕구 파고드는 학문, 경제·경영·공학도 인문학 있어야 존재

2018.11.15(Thu) 17:10:36

[비즈한국] 알려진 대로 스티브 잡스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마크 저커버그도 인문학도였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인문학이 돈이 된다’는 구체적인 통계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최저임금 이하의 수입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시인이나 저술가를 떠올리면, 인문학은 돈이 안 된다고 쉽사리 반박할 수 있다. 빌 게이츠처럼 인문학을 숭상하는 경영자의 경우에도, 그 사람이 공학이나 경영학을 넘어 인문학까지 손을 미칠 정도로 폭넓은 사고를 가졌기에 성공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정말 인문학이 경영에 도입되어 돈을 벌어줄지는 모르지만 문사철(文史哲)로 한정하면 인문학자는 돈을 벌지 못한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다 해도 필자에게 어떤 학문을 선택하라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가진 실존적인 문제를 다룬다. 인문학의 눈이 없으면 경제나 경영, 혹은 공학도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은 인간이 가진 실존적인 문제를 다룬다. 인문학의 눈이 없으면 경제나 경영, 혹은 공학도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가 그린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 54명의 철학자를 그렸으며 정중앙의 인물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경제는 삶을 유지하는 재화나 서비스의 흐름을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며, 경영학은 주로 기업의 입장에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전략을 다루고, 공학은 경제행위의 기술적인 기반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욕구’, ‘필요’를 가정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과 욕구를 파고드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이다. 

 

외판원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 벌레로 바뀌어버린 그레고르 잠자는 이렇게 절규한다. 

 

이야기가 이 돈을 벌어야 할 필연성에 미치면, 우선 언제나 그레고르는 문을 떠나 문 곁에 놓인 서늘한 가죽 소파에 몸을 던졌다. 수치와 슬픔으로 몸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변신’(천영애 역) 

 

어떤 경제학이나 경영학 서적이 이보다 더 처절하게, 경제행위를 잃어버린 한 인간의 처절한 실존적 비참함을 묘사했는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벌레가 된 후에야 알게 된 진실은 참혹하다. 

 

외투를 입고 있으면 모두 사람인 듯하지만 실상 옷 한 벌을 벗기면 사람 취급을 못 받을 수 있다. 외투 한 벌을 잃어버림으로써 추위 속에서 죽음을 맞은 ‘외투’의 주인공 아까끼의 삶은 또 어떤가? 누구에게는 그렇고 그런 옷 한 벌이지만 누구에게는 삶의 전부다.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 처하면 물건은 애초의 물건이 아닌 온도를 가지게 된다. 외투 안감의 온도가 인간의 체온에 근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영자가 되어 타인의 삶의 근원적인 욕구를 이해한다면, 속된 말로 그가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문학은 돈을 말하지 않는다. 경제적인 욕구는 삶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욕구를 경제적인 것과 아닌 것으로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0억 이상의 인구가 살고 강력한 인구제한 정책을 시행했던 중국에서, 찢어진 콘돔 때문에 얼마나 무수한 아이들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태내에서 사라졌던가. 콘돔을 만드는 이들이 자신의 제품을 욕망의 배설물을 담아내는 비닐 봉지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가르는 ‘위대한’ 방패로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그 따위 제품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위대함’을 위한 의지, 이것이 인문학이 경제행위에 개입하는 지점이다. 플라톤은 철학을 언어로 된 기하학으로 이해했다. 물론 그 또한 기하학자였다. 언어가 없으면 철학이 없고, 그리스의 철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기하학은 없었을 것이다. 기하학이 없으면 일체의 공학은 홀로 설 수 없다. 플라톤은 기하학을 배우지 않으려 하는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들은 ‘탁월함(아레테, arete)’을 추구하기를 포기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와 탁월한 나는 다른 존재다. 벌레로의 퇴행이 아닌 탁월함으로의 상승을 추구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그러나 인문학은 퇴행의 경험을 통해 상승하라고 가르친다. 먼저 벌레가 되어보지 않고 벌레 아닌 것이 될 수 있을까? 벌레가 된 이를 보고 나서, 스스로 벌레가 되어 버둥거리고 나서 인간으로 돌아와 그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인류가 맞이한 실존적인 도전 전체를 의미한다. 인문적인 경영자란 벌레들의 절규를 듣고 고통을 해결하는 와중에 이윤을 얻는 사람이다. 예컨대 공학을 전공한 후 생화학무기를 만들어 돈을 버는 이도 경영자일까? 그들은 인간을 벌레로 만드는 대가로 돈을 챙기는 자들이다. 

 

인간을 벌레로 만드는 사람은 벌레 이하의 존재일 뿐이다. 벌레에 머문 이는 경영자가 아니다. 경영자는 위대함에 도달하기 위해 끝없이 변신하는 사람이다. 이 땅에서 위대한 경영자들, 진정 인문적인 경영자들이 무수히 배출되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바란다. 

 

※ [공원국의 천지인]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공원국 작가·‘춘추전국이야기’ 저자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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