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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라마] 발랄한 동거 판타지로 시대의 터부를 무너뜨리다 '옥탑방 고양이'

동명의 인터넷 소설에서 드라마·연극으로 제작…모든 연기자의 사랑스런 연기가 주는 묘한 설득력

2020.06.15(Mon) 11:05:32

[비즈한국] 가족이 아닌 타인과 함께 산다는 건 무척 오묘한 일이다. 스무 살 이후 대여섯 명의 동거인을 거쳐본 나는 동거의 순기능을 지지하는 쪽이다. 어떤 사람과 함께 사느냐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와 살든 무언가 배우고 습득하게 된다. ‘화장실 물때’나 ‘가구의 마모’ 같은 건 나와 상관없는 말인 줄 알았던 초짜 자취생이던 나도 동거인들과 함께 산 경험치가 쌓이며 그럭저럭 내 한 몸 책임질 수 있는 생활인으로 성장했다.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의 주인공들도 그랬을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그들처럼 이성 동거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진 못했지만.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는 김유리 작가의 동명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했지만 남녀의 동거를 무겁지 않은 분위기로 그린다는 것 외에는 거의 별개의 작품으로 봐도 무방하다. 신인 및 조연급이던 정다빈과 김래원은 이 작품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사진=MBC 홈페이지

 

‘옥탑방 고양이’는 대책 없는 날라리 대학생 이경민(김래원)이 억척스러울 정도로 생활력 강하고 씩씩한 ‘취준생’ 남정은(故 정다빈)을 만나 동거하면서 갱생(?)하는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다. 사회적 스펙과 경제 수준이 차이 나는 남녀 주인공, 남녀 주인공과 서브 남녀 주인공의 물고 물리는 사각관계, 오해에 오해가 쌓이는 답답한 전개 등 빤한 설정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래도 2003년 방영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던(어쩌면 지금도) 동거라는 소재를 들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동거한다는 설정은 2000년대만 해도 로코물과 연결되기 힘든 설정이었다. 예외는 정략 또는 계약결혼(드라마 ‘낭랑 18세’, 드라마 ‘풀하우스’, 드라마 ‘궁’ 등) 정도? 동거는 대체로 ‘청춘의 덫’이나 ‘애정의 조건’처럼 여주인공의 신세를 궂게 만드는 험악한 이력이 되곤 했다. 그런 설정을 가뿐하게 부셔버린 게 ‘옥탑방 고양이’다. 명문대 법대생이지만 허랑방탕하기 짝이 없는 경민은 짝사랑하는 동기 나혜련(최정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혜련의 고등학교 동창 남정은에게 옥탑방을 빌릴 보증금을 빌려준다. 그러다 도박으로 사채를 쓰는 바람에 쫓기던 경민이 정은의 옥탑방에 막무가내로 입성하는 것이 동거의 시작이다.

 

우여곡절 끝에 동거하는 경민(김래원)과 정은(정다빈).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경민과 취업을 준비하는 정은은 함께 붙어 있는 시간이 많다. 정은이 배를 깔고 가계부를 쓰거나 평상에서 부업으로 마늘을 깔 때면 동거인인 경민은 그 옆에 자연스럽게 함께한다. 미운정 고운정이 안 쌓일 수 없다. 사진=MBC 홈페이지

 

그렇다고 ‘썸’만 탔지 육체적 관계는 없다는 눈 가리고 아웅 식 설정도 없다. 술과 분위기에 취해 두 사람이 키스하고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이 극 초반인 2회 말에 등장하거든. 문제는 자신에게 잘해주는 경민을 어느 순간 좋아하게 된 정은의 마음이다. 매사 솔직당당한 정은이기에 경민에게 열과 성을 다하지만, 경민은 정은의 마음을 받아줄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혜련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나가며 정은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경민과 정은은 극과 극의 생활습관부터 소소한 오해와 질투 때문에 싸웠다 화해했다 짐을 싸고 나갔다 다시 돌아왔다를 줄기차게 되풀이한다. 어쩌면 16부작 ‘옥탑방 고양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지지부진해 보이는 이 드라마에는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걸 경험한 사람들에게 꽂히는 세밀한 감정들이 존재한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친밀하든 덜 친밀하든,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 사이에만 싹트는 감정들.

 

짝사랑하는 혜련(최정윤)과 가까워지려고 정은에게 접근했던 경민. 정은이 먼저 경민을 좋아하게 되고, 함께 살면서 경민 또한 시나브로 정은에게 빠져들지만 좀처럼 자신의 마음이 뭔지 확신하지 못한다. 사진=MBC 홈페이지

 

좋은 일이 생기면 맥주라도 사와 축하해주고 싶고, 아플 때면 이마라도 짚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고, 갑작스레 비가 올 때면 우산은 챙겨 나갔나 물어보게 되고, 이유 없이 늦을 때면 괜스레 걱정이 되고 더 늦으면 묘하게 화가 나는 그런 감정들 말이다. 밥상에 풀만 있다고 칭얼거리는 동거인이 한심해 보이지만 막상 장을 볼 때면 삼겹살이라도 사갈까 만지작거리게 되는 묘한 감정. ‘옥탑방 고양이’는 로코물인지라 이 모든 감정을 서로를 사랑하게 된 남녀의 감정으로 설명하지만, 만약 끝끝내 경민과 정은이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도 ‘썸남썸녀’보다 훨씬 강한 동지애는 남았을 것을 나는 장담한다.

 

유동준(이현우)에게 마음이 있어 중반까지 경민의 마음을 헷갈리게 했던 혜련. 전형적인 서브 여주인공의 롤이었다. 반면 동준은 혜련에게 처음부터 선을 확실히 긋는 한편 점점 눈길을 끄는 정은에게 대시하면서도 어른스러운 남자답게 과하게 몰아붙이지 않는다. 당시 한쪽 귀걸이만 착용하던 유동준의 패션도 화제였다. 사진=MBC 홈페이지

 

‘옥탑방 고양이’는 동명의 인터넷 소설로 시작하여 드라마, 이후에는 연극으로도 상영되며 인기를 끌었다. 원작 소설과 드라마, 연극은 모두 내용과 분위기가 상당히 다른데, 그중 드라마가 오랜 시간 동안 잊히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건 싱그러운 초여름을 닮은 배우들의 덕이 컸다. 동거하며 생기는 묘한 감정들과 20대 청춘의 철없는 행동들을 훌륭하게 표현해낸 김래원과 故 정다빈 덕분에 ‘옥탑방 고양이’는 한층 생기발랄했다. 아마 김래원이 연기하지 않았다면 경민이란 인물은 스펙 빼고는 어디 하나 쳐줄 데 없는 인간쓰레기처럼 보였을 것이다. 도박에 빠져 사채를 쓰는 건 물론 얹혀 살면서도 정은의 반찬값을 탈탈 털어 명품을 사고 아버지의 제삿날도 신경 쓰지 않던 망종을, 김래원은 대형견 같은 귀여움과 특유의 능글맞은 연기로 이해시켰다!

 

함께 살면서 이 꼴 저 꼴 다 보며 투닥거리는 경민과 정은.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게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단점도 무척 많다. 그래도 혼자 살다 아플 때 느끼는 외로움이 없는 건 좋더라. 팔꿈치가 까진 정은의 상처를 봐주는 경민의 저 모습을 보라(경민의 행동 때문에 상처가 생긴 건 잠시 덮어두자). 사진=MBC 홈페이지

 

동거 사실을 부모에게 들키고도 경민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던 강단 있는 정은을 연기한 정다빈은 어떻고. 그녀가 좀 더 오래 이곳에 남아 있었다면 분명 좋은 연기들을 펼쳤을 텐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싸가지없지만 도도하고 오만한 혜련을 잘 소화한 최정윤, 밉지 않은 말썽쟁이 남동생 남정우 역할을 맡은 봉태규도 귀엽고, 이 드라마의 광고회사 이사 유동준을 시작으로 ‘실장님 전문 배우’로 활약을 펼치게 되는 가수 이현우도 연기는 어색하지만 그 역할에는 잘 어울렸다. 그 외에 경민의 할아버지를 연기한 故 김무생, 정은의 어머니를 연기한 故 김자옥 배우도 무척 귀엽고 사랑스러운 연기를 보여주셨더랬다.

 

‘옥탑방 고양이’가 방영되던 때, 나와 함께 살던 친구가 나를 경민이에 빗대어 고양이라 부르던 기억이 난다. 당시 경민이만큼 망종이던 나는 그 친구를 비롯한 여러 동거인과 함께하며 인간이 되었다. 굳이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들도 나와 살면서 얻은 것들이 있겠지? 있을 거야. 그리고 부디, 지금 나와 함께 사는, 지나는 자리마다 제 흔적을 선연히 남기는 남동생도 결혼하기 전엔 경민이처럼 갱생하길!(이 놈아, 제발 정리 좀 하자!)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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