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제27회 철의 날인 6월 9일, 철강산업의 탄소중립을 지원하기 위한 이른바 K-스틸법 시행령 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오는 17일 본격적인 시행을 앞두고 정부 차원의 제도적 뼈대가 마련됐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지만, 실질적인 탄소 감축과 공정 대전환을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K-스틸법, 위기에 빠진 한국 철강의 구원투수 될까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탄소중립 전환을 위한 특별법 시행령안’이 제25회 국무회의에서 원안대로 의결됐다. K-스틸법과 해당 시행령은 글로벌 공급과잉 심화와 통상 불확실성 증가 등으로 어려움에 직면한 한국 철강산업의 저탄소·고부가 전환을 지원하기 위해 제정됐다. 법안의 주요 내용으로는 철강산업 탄소중립 전환을 위한 기본계획 수립, 저탄소 철강기술의 선정 및 지원, 실증기반 확충, 저탄소 철강 인증제도 도입 및 수요 창출 체계 등이 망라되어 있다.
현재 한국 철강업계는 중국의 저가 철강재 덤핑 공세, 건설 등 전방 산업의 극심한 내수 부진,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전 세계적인 환경 무역 장벽 강화 흐름 속에서 생존을 위한 대대적인 공정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K-스틸법은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체계적인 제도적 지원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6월 9일 서울 송파구 롯데호텔 월드에서 열린 제27회 철의 날 기념행사에서도 한국 철강업계의 위기와 극복 방안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포스코그룹 회장인 장인화 한국철강협회 회장은 기념사에서 “현재 철강 업계는 내수 부진, 글로벌 공급 과잉, 보호무역주의 심화, 성공적인 탈탄소 전환이라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있다”며 “고부가 저탄소 제품을 중심으로 탈탄소 전환을 가속화하고, 저탄소 철강재에 대한 시장 가치를 확보하여 우리 철강산업이 글로벌 탈탄소 시장을 선도하는 위상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규모 상용화 지원 부재… 낡은 설비 연장하는 ‘락인’ 우려
일각에선 K-스틸법 시행령의 허점과 한계를 지적하는 날 선 비판도 제기된다.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부분은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대규모 상용화 단계에 대한 장기적인 재정 지원 신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 시행령에 명시된 정부의 제도적 지원은 주로 연구개발(R&D)과 실증 단계에 필요한 경비 보조 및 융자, 협력모델에 대한 일부 금융지원 수준에 집중되어 있다.
수조 원의 자본이 투입되는 철강산업의 특성상, 실증 이후 본격적인 상용화와 설비 대전환 단계에서 정부의 확실한 재정 지원 구조가 없다면 기업들은 리스크를 우려해 초기 투자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기존 용광로의 효율을 개선한 수준의 과도기적 기술까지 저탄소 철강기술로 인정하면 막대한 예산이 도리어 기존의 고탄소 설비를 연명시키는 ‘락인(Lock-in)’ 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락인 효과란 특정 기술이나 낡은 설비에 투자가 이루어지면 그 경로에 갇혀 완전히 새로운 무탄소 혁신 기술로 전환하기 힘들어지는 현상을 뜻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해외 주요국들의 사례처럼 기존 고로(용광로) 폐쇄와 연계한 조건부 지원 방안을 제도에 명시하여 예산이 고탄소 설비 유지에 낭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안혜성 기후솔루션 철강팀 연구원은 "현재 거론되는 재정 지원들이 오히려 기존 고로의 수명을 늘리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며 “R&D나 실증 단계에서 정부 지원을 받더라도 실제 기업 입장에서 본격적으로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기 시작하는 것은 상용화 단계인데, 상용화 단계에서 정부가 확고하게 재정을 지원하겠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빠져있다”고 짚었다.
저탄소 철강 제품이 시장에 안착하도록 돕는 수요 창출 조항 역시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행령 제33조 등은 공공기관에 다음 연도 우선구매 계획 제출을 ‘요청할 수 있다’는 수준의 권고 조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구매가 강제되지 않는 단순한 권고 조항만으로는 기업들이 거액을 투자해 만든 저탄소 철강의 초기 시장을 형성하는 마중물 역할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더욱이 현재 공공 조달 시장에서 주로 사용되는 철강재는 이미 고철(철스크랩)을 녹여 재활용하는 전기로 기반 강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궁극적으로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타격해야 할 핵심은 기존 고로 공정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동차, 조선, 건설 등에 쓰이는 고급 강재 시장의 저탄소 전환이 필수적이다. 민간 부문의 저탄소 철강 구매 전환을 이끌어내기 위한 유인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모호한 인증 기준, ‘매스밸런스’ 허용 땐 가짜 감축 우려 확산
저탄소 철강 기술과 제품을 법적으로 정의하고 인증하는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도 도마 위에 올랐다. 현 시행령에서는 저탄소 철강 제품 인증과 관련한 명확한 판단 원칙을 제시하지 않았다.
시민사회는 기준이 느슨할 경우, 이른바 ‘매스밸런스(Mass Balance·간접 배분)’ 방식이 저탄소 철강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매스밸런스 방식이란, 실제 생산 공정에서는 여전히 탄소가 배출됨에도 불구하고 장부상으로만 특정 소수의 제품에 탄소 감축량을 몰아주어 저탄소 제품으로 인정하는 방식을 말한다. 예를 들어 10%의 탄소만 저감된 공정에서 100만 톤의 철강을 생산했을 때, 90만 톤은 일반 철강으로 팔고 나머지 10만 톤을 ‘100% 탄소 제로 철강’으로 판매하는 식이다.
이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시행령 및 고시의 핵심 원칙에 가짜 감축을 막는 ‘물리적 배출 저감 기반’ 원칙을 명시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다. 아울러 제품 단위 탄소집약도를 기준으로 엄격한 ‘단계별 등급체계(슬라이딩 스케일)’를 도입해 국제에너지기구(IEA) 등 국제 기준과의 정합성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저탄소 철강을 구체적으로 정의할 하위 고시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산업통상부 철강세라믹과 관계자는 “저탄소 철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의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결정되지 않았으며 업계와 계속 검토 및 논의 중에 있다”며 “여러 방식을 두고 다각도로 살펴보고 있으며, 하반기 공고를 목표로 국내 철강산업의 실질적인 저탄소 전환에 도움이 되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9일 철의 날 기념행사장이 마련된 롯데호텔 앞에서는 기후솔루션, 환경운동연합, 빅웨이브 등 전국 9개 시민환경단체로 구성된 ‘녹색철강시민행동’의 규탄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들은 현 정부와 철강기업들을 향해 지지부진한 현행 체계를 넘어선 속도감 있는 탈탄소 이행 대책 수립을 강력히 촉구했다.
녹색철강시민행동은 문재인 정부 시절 설정된 2030년 철강업종 감축목표치(2.3%) 조차 미흡했음에도, 윤석열 정부부터는 아예 업종별 감축목표조차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더불어 정부가 최근 제4차 배출권거래제 기본계획을 확정하면서 수출 비중이 높은 주요 탄소누출업종 대부분에 배출권 무상할당을 100% 유지한 점을 언급하며, 이는 유럽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해외 규제 파고 속에서 오히려 국내 철강 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행태라고 우려를 표했다.
또한 정부가 공공 건설 사업 등 대규모 수요처에서 녹색공공조달 제도를 통한 저탄소 시장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기본 전제라 할 수 있는 ‘녹색철강’의 명확한 정의와 기준조차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며 조속하고 책임 있는 제도 정비를 요구했다. 유종준 녹색철강시민행동 집행위원장은 “저탄소 철강 제품 구매를 권고할 뿐만 아니라 공공부문에서 의무적으로 사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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