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SK하이닉스가 오는 10일 미국 나스닥에 미국주식예탁증서(ADR)를 상장한다. 현재 공모 규모는 약 280억 달러(약 43조 원)로 해외 기업의 미국 증시 상장 가운데 역대 최대 수준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ADR 상장이 해외 자금 조달 취지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기업가치를 다시 평가받아 AI 시대 대규모 투자 경쟁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행보로 보고 있다.
시장 관심도 공모 흥행 여부를 넘어 상장 이후에 쏠린다. SK하이닉스에 대한 미국 시장의 평가부터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얼마나 해소할 수 있을지, 나아가 AI 메모리 시장에 대한 글로벌 투자자들의 시각을 확인하는 시험대가 될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SK하이닉스가 미국으로 향하는 이유
이번 상장은 미국 증시에 입성하는 해외 기업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SK하이닉스는 총 발행주식수의 2.5% 수준인 1779만 주를 신주로 발행해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방식으로 공모에 나선다. 6일 SK하이닉스의 정정 공시에 따라 242만 5000원을 신주 발행가액으로 적용하면 SK하이닉스가 이번 상장을 통해 확보하는 자금은 약 43조 1408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SK하이닉스가 이번 ADR 상장을 추진한 배경에는 미국과 한국 자본시장 간 밸류에이션 차이가 자리한다. 회사가 금융당국에 제출한 증권신고서에 따르면 올해 5월 말 기준 미국 증시 평균 주가수익비율(PER)은 22.4배인 반면 코스피는 9.6배에 그쳤다. SK하이닉스는 국내 시장에만 상장된 구조적 한계로 글로벌 동종 기업보다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을 ADR 추진 배경으로 제시했다.
실제 SK하이닉스의 12개월 선행 PER은 이달 초 기준 6.2~6.6배 수준으로, 마이크론(7배대)이나 대만 TSMC(23.1배) 등 주요 글로벌 반도체 기업보다 낮은 수준이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 점유율과 수익성에서는 글로벌 선두를 확보했지만 기업가치는 경쟁사 대비 할인받고 있다는 것이 증권가의 공통된 분석이다.
미국 증시 상장은 이 같은 구조적 한계를 완화하기 위한 시도다. 미국 투자자는 한국 증권계좌를 개설하거나 환전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나스닥에서 SK하이닉스 ADR을 직접 거래할 수 있다. 미국 기관투자가와 연기금, 글로벌 펀드 등 새로운 투자 기반을 확보하는 동시에 마이크론 등 경쟁사와 동일한 잣대로 기업가치를 평가받을 기회를 얻게 되는 셈이다.
류형근 대신증권 연구원은 “경쟁사와 동일한 조건에서 기업가치를 평가받을 기회”라며 “경쟁사 대비 사업 경쟁력과 규모에 있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만큼 밸류에이션 디스카운트는 빠르게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AI 투자 경쟁 속 글로벌 자본시장 활용…국내 시장에도 영향
이번 ADR는 대규모 설비투자를 뒷받침할 장기 자금 조달 기반을 마련한다는 의미도 있다. SK하이닉스는 국내에서 신주를 발행해 이를 기초자산으로 ADR을 발행하는 방식으로 최대 1779만 주를 신규 발행한다. 확보한 자금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1기 팹(31조 원)과 청주 P&T7 어드밴스드 패키징 공장(19조 원),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확보(약 12조 원) 등 AI 메모리 생산능력 확대에 투입될 예정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AI 시대 들어 투자 규모가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첨단 메모리와 패키징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십조 원 단위의 설비투자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국내 자본시장만으로는 장기 투자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SK하이닉스 역시 증권신고서에서 미국을 AI 산업과 주요 고객사, 글로벌 투자자가 집중된 시장으로 규정했다. 자금 조달을 넘어 AI 생태계 중심에서 투자자와 고객 접점을 넓히고 향후 글로벌 자본시장을 지속적으로 활용할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상장 이후 글로벌 패시브 자금 유입 가능성도 주목된다. 미국 주요 반도체 지수와 이를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에 편입될 경우 장기적으로 신규 투자 수요가 유입될 수 있다. 다만 이는 상장 직후 곧바로 나타나는 효과라기보다 지수 편입 절차를 거쳐 점진적으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
국내 주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ADR과 본주는 상호 전환이 가능한 구조인 만큼 미국 시장에서 형성되는 기업가치가 국내 시장에도 반영될 가능성이 있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희석 효과는 제한적인 반면 글로벌 투자자의 접근성 확대를 통해 밸류에이션 할인 축소를 기대할 수 있다”고 봤다.
AI 메모리 시험대…기대와 과제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와 HBM 수요가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 속에서 미국 투자자들이 SK하이닉스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AI 메모리 산업의 성장성에 대한 시장 판단과도 맞닿아 있다.

향후 메모리 기업들의 자본시장 전략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국 투자은행 D.A.데이비슨은 마이크론·샌디스크로 흘러가던 자금 일부가 SK하이닉스로 옮겨갈 수 있는 반면, 비교 가능한 동종 기업이 늘어나면서 메모리 산업에 대한 투자자 이해도가 높아질 수 있다며 ‘양날의 검’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변수도 적지 않다. 이번 신주 발행으로 기존 주주의 지분은 약 2.4% 희석된다. 미국 시장에서 기대만큼 투자 수요를 확보하지 못하거나 AI 인프라 투자 속도가 둔화될 경우 밸류에이션 재평가 효과도 제한될 수 있다. 미국 상장에 따른 공시 의무와 규제 강화 등 새로운 부담도 감수해야 한다.
상장을 이틀 앞둔 8일 SK하이닉스 주가는 5.68% 하락한 207만 60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최근 모건스탠리가 보고서를 통해 ‘반도체 고점론’을 제기한 가운데 국내 증권가는 공급 부족 심화에 따른 업황 호조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는 만큼, 이번 ADR 상장이 AI 메모리 업황을 가늠하는 계기가 될지에도 관심이 모인다.
공모가는 9일 오후(현지시각) 확정된다. 한국 시간으로는 오는 10일 주식 거래 재개되기 전이다.
유회준 카이스트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SK그룹이 전략적으로 의미 있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 자본시장에서 미국 기업에 준하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기업가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만 중국과의 관계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지켜봐야 할 부분이나, 전략적 판단을 거친 결정일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