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진심이 통하지 않을 때가 가장 슬픕니다. 작년부터 서울시를 설득했지만 결국 실패했어요. 저희도 너무 아쉽습니다.”
을지로 골목 깊숙이 들어서면 두 건물 사이 좁은 통로 양쪽으로 카페 두 곳이 마주 보고 있다. 한쪽엔 ‘커피한약방’, 맞은편엔 디저트 카페 ‘혜민당’이다. 모두 강윤석 대표가 운영하는 공간이다. 이 중 혜민당은 조선시대 서민 의료기관 혜민서가 있던 터 위에 자리한 곳으로, 낡은 건물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그 기억을 품어왔다. 그러나 재개발 계획 앞에 혜민당은 결국 오는 4월 철거를 앞두게 됐다.

혜민서 터 위에 꾸민 한약방 카페
과거 을지로 일대는 진흙이 많아 질고 누런빛을 띤다 하여 ‘구리개’로 불렸다. 남산에서 시작해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십여 개의 개천이 지나던 구릉지대로, 이곳에는 조선시대 서민들을 치료했던 관청 혜민서가 자리했다. ‘동의보감’ 저자 허준의 삶과도 맞닿아 있는 공간이다.
혜민당은 1950년대 건물과 타일 창고를 개화기 한약방 분위기로 재해석한 카페다. 좁고 어두운 골목을 따라 들어서면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진다. 낡은 자개장과 묵직한 목가구, 비즈로 손수 만든 장식품, 정각마다 울리는 괘종시계까지. 3층으로 구성된 공간 곳곳에 옛 정서가 살아 있다. 이 독특한 분위기 덕분에 혜민당은 을지로의 레트로 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강윤석 대표는 버려진 자개장과 오래된 소품을 직접 모아 공간을 채웠다. 한때 촌스럽다는 이유로 외면받던 한국의 오래된 물건들이 이곳에서만큼은 다시 아름다움으로 읽히길 바랐다고 했다.

한국적 감성에 외국인 관광객 발길 이어져
혜민당은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을 탔다. 카페 측에 따르면 오전 방문객의 상당수가 외국인으로, 전체 방문객의 약 30%를 차지한다.
며칠 전 한국에 왔다는 일본인 관광객 나기 씨(23)는 “아이돌 그룹 있지(ITZY)의 팬인데, 그들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이곳을 방문한 걸 보고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돌이 왔다는 이유로 여기까지 왔는데, 막상 와보니 한국 전통의 감성이 느껴져 좋았다”며 “문화재처럼 오래된 공간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전했다. 이날 미술관과 박물관도 두 곳 들렀다는 그는 “철거되는 줄 몰랐는데, 그 전에 와서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강 대표는 최근 혜민당 앞에 운영 종료 공고문을 붙이면서 고민에 빠졌다. 외국인 방문객이 많은 만큼 외국어 안내문도 함께 붙여야 하나 망설였다. “처음엔 영어로도 안내문을 쓰려 했지만, 외국인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볼지 걱정됐다”며 “한국에 이런 공간이 있는데 왜 지키지 못하느냐고 생각할까 봐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고 털어놨다.

혜민당 건물은 서울시 소유, 카페한약방도 운영 쉽지않아
혜민당 건물은 현재 서울시 소유 자산이다. 재개발 사업 과정에서 기부채납된 건물이기 때문이다. 기부채납이란 재개발 사업자가 토지나 건물을 지자체에 무상으로 넘기는 대신 용적률 상향 등의 인센티브를 받는 제도다. 그런데 이 부지가 도시정비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향후 공원 부지로 조성될 예정이라는 이유로 철거 방침이 내려졌다.
강 대표는 “공원 조성을 위해 주변 건물을 정리해야 한다는 설명은 이해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건물도 적지 않다”며 “그런 상황에서 이곳부터 철거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외국인 관광객들도 일부러 찾아오는 공간인데 이를 지워버리는 것이 안타깝다”며 “근대의 생활 문화 역시 도시의 역사인데, 이런 풍경이 계속 사라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