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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인양, 홍가혜 인터뷰 “시간 되돌려도 팽목항 갈 것”

3년간 재판, 구금, 정신과 치료…“피해자들 행복해지면 그 후에 나도…”

2017.03.24(Fri) 19:39:54

[비즈한국] 지난 23일 새벽 3시 45분, 3년 동안 바닷속에 가라앉아있던 세월호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세월호 침몰 후 1073일 만이다. 세월호 인양을 간절히 바랐던 유가족들은 아직도 마음을 조리고 있다. 완전 인양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세월호가 인양되길 간절히 기원한 또 한 사람이 있다. 전국민의 질타와 비난을 받아야만 했던 홍가혜 씨(29)다. 그간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녀를 23일 오후 부천의 한 카페에서 만나 심경을 들어봤다. 

 

홍가혜 씨(29)가 오랜만에 언론 앞에 섰다. 그리고 세월호 인양을 지켜본 그녀가 심경을 밝혔다.

 

―피곤해 보인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세월호 선체 인양 작업을 보기는 두려웠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올 것 같았다. 멍하니 앉아 세월호가 인양되기만을 기원했다.”​
 
―세월호 인양되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인양 작업을 시작하지 않은 데에 깊은 분노가 인다. 그러나 정부가 세월호를 성공적으로 인양하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웠을 거라 믿고 싶다. 최근 정부의 세월호 인양 계획 발표를 보면서 정부에 대한 믿음을 의심해야 했다. 4월에 하겠다고 했다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받고 난 다음날 갑자기 날씨가 좋다며 인양 일정을 앞당기지 않았나.”​​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믿고 싶은 것과 진실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정부를 믿고 싶지만 잘 모르겠다. 세월호와 관련된 의혹들에 마음이 기울었던 건 사실이다. 최근 들어 미수습자들을 위해 정부를 믿어보기로 했다. 세월호에 대해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지만, 한 순간도 세월호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세월호가 성공적으로 인양되면 어떨 것 같나. 
“​인양이 끝이 아니다. 진실을 밝혀내기 위한 시작 단계로 봐야 한다. 진상을 규명하는데 길게는 20~30년의 시간이 소요될지도 모른다. 다시 세월호의 진실을 찾기 위한 투쟁에 심지를 붙여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정권이 교체되면 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질 거라는 말이 있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정권 교체보다 세월호 진상 규명이 내겐 먼저다.”​ 
 
―세월호가 침몰한 2014년 4월 16일, 제주 여행 중이었던 것으로 안다. 팽목항으로 향한 이유가 있나.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와 제주 여행을 하던 중이었다. 남자친구가 스마트폰을 보면서 ‘​배가 침몰했대. 근데 전원 구조됐다네’​라고 했다. 처음엔 남자친구에게 화를 냈다.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전복죽을 먹으러 식당을 찾았는데, 식당 아주머니가 TV를 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왜 저러나 하고 봤더니,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들이 바다에 잠긴 세월호 안에 갇혀 있다는 내용이 보도되고 있었다. 순간 고모가 생각났고, 즉시 전국 모든 다이버들을 모이라고 한 민간잠수부 모집공고에 지원했다.”​ 
 
―갑자기 고모가 떠오른 이유는. 
“​열일곱 살 때였다. 고모가 할머니와 나 앞에서 음독자살을 기도했다. 고모는 나를 친딸만큼이나 아껴줬던 소중했던 분이다. 다급한 마음에 119에 전화를 했는데 구급대원이 여고생의 장난전화로 치부하더라. 구급차는 40분 지나서 도착했고, 고모는 응급차 안에서 눈을 감았다. 구급대원이 일찍 도착했다면 고모가 그렇게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호 뉴스를 보면서 정부의 부실한 구조 대응에 부당함을 느꼈고, 어떻게든 학생들을 구하는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남자친구의 반대를 무릅쓰고 팽목항으로 향했다.”​ 
 
―종편과의 인터뷰로 인해 전국민의 질타와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도대체 그때 왜 그런 인터뷰를 한 건가. 
“​방송작가가 인터뷰를 해달라고 부탁해왔다. 처음에는 현장에 투입된 잠수부에게 인터뷰를 요청해보라고 거절했다. 현장 분위기만 잘 전달해주면 된다면서 부담 갖지 말라고 하더라. 결국 인터뷰를 승낙했고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전달했다. 그 인터뷰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놨다.”​​ 
 
―1심과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병원에서 간호사가 ‘​홍가혜 씨’​라고 부르면 주변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라고 말하는 분들도 많다. 대법원 재판이 남아 있다. 아직까지 뭐라 당당히 말하긴 어렵다. 다만 세월호 인터뷰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정의로웠던 순간이었음은 밝히고 싶다.”​​ 
 
―교도소 표기와 악플 고소로 인해 또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또 다시 악플에 시달릴 수도 있는데. 
“​목포에는 구치소가 없어 미결수들은 교도소에 수감된다. 난 목포교도소 독방에 갇혀 24시간 CCTV의 감시를 받았다. 죄가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죄수 취급을 당한 것이다. 구치소가 아닌 교도소에 있었기 때문에 교도소라고 썼을 뿐이다. 그간 언론 인터뷰를 피해왔다. 언론 보도로 전국민의 질타와 비난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인터뷰 요청을 받고 걱정이 많았다. 세월호의 본질을 흐릴까봐 걱정됐다. 유가족분들을 찾아 사과를 한 이유도 세월호의 본질이 나로 인해 흐려졌기 때문이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아픈 분들에게 더 큰 짐을 안겨준 것 같아 아직도 죄송한 마음이다. 유가족분들이 나의 인터뷰로 세상에 알려졌다며 되려 내게 고맙다고 말씀하신다.”​ 
 
―지난 3년간 어떻게 지냈나. 
“​원형탈모와 대상포진은 물론이고, 치아도 세 개나 빠졌다. 정신과 치료도 꾸준히 받아왔다. 자살시도도 했었다. 정신을 차린 건 세월호 촛불 집회가 시작된 후였다. 촛불을 바라보며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느꼈다. 그 전까지는 혼자라는 착각에 갇혀 있었다. 할머니와, 지금은 헤어진 남자친구도 내게 큰 힘이 돼 주었다. 목포교도소에 있을 때 할머니가 해준 말이 떠오른다. 전국민이 나를 욕하고 비난하고 있음에도 할머니는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지만, 나를 나락에서 끄집어 오려준 것도 사람들이다.”​ 
 
―개명을 생각할 법도 한데. 
“​여러 차례 개명 제안을 받았다. 살아오면서 가장 정의로웠던 순간이 세월호와 함께한 시간들이다. 이름을 바꿔가면서까지 오해로부터 피할 이유가 없다. 버티고 싶다. 편견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따지고 설득하고 달래가면서. ‘홍가혜’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버텨내겠다.”​ ​

 

세월호 인양은 진상 규명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홍가혜 씨. 그녀는 세월호 침몰로 인해 상처받은 모든 분들의 행복해하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또 달려갈 건가. 

“​안 그래도 이 문제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정부가 체계적으로 구조 활동에 나선다면 나설 이유가 없다. 세월호 때처럼 체계가 잡히지 않은 채 우왕좌왕 움직인다면 팽목항으로 향할 것이다. 세월호 때 민간잠수사 아닌 프로잠수사를 모집하는 글이 올라왔다면 지금 난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이버들은 다 모이라고 했기 때문에 아마추어인 내가 팽목항으로 갔던 것이다.”​ 

 

―왼손목에 세월호를 상징하는 리본 문신이 있다.

​팽목항은 세월호 희생자들의 마지막 숨이 멈춰 있는 곳이다. 제주도는 그들의 한이 서린 곳이다. 지난해 휴식을 위해 제주 마라도에 오래 머문 적이 있다. 그때 세월호 희생자들의 한을 잊지 않겠다는, 그리고 평생 속죄하는 마음가짐으로 리본을 문신했다.”​ 

 

―세월호의 진실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대한민국의 모든 비리와 부패, 정경유착 등의 문제점들이 담겨 있다. 침몰 원인이 밝혀지면 문제점들이 낱낱이 드러날 것이다. 세월호의 진실이 묻힌다면 대한민국은 진일보할 수 없을 것이다.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이 위로를 받아야 한다. 그들이 위로받는 날까지 싸워야 한다.”​ 

 

―취업도 하고, 결혼도 준비해야 할 텐데.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간간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벌이는 하고 있다. 아직 결혼 생각은 없다. 인터뷰에서는 밝힐 수 없지만, 어떻게 살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올해 말쯤 실행에 옮기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직까지 세월호를 침몰하게 만든 누군가가 무릎을 꿇지 않았다.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힘내라’, ‘행복해라’, ‘아픔을 내려놔라’ 등의 말들이 고맙고 위안이 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용서를 강요당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세월호 침몰의 가해자들이 충분한 벌을 받고, 유가족분들에게 용서를 구한 후에야 비로소 행복이 다가올 것 같다. 유가족분들이 행복해하면 그 후에 나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유시혁 기자 evernuri@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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