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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의 일생③-구설수들 그리고 씁쓸한 만년

"정치인은 4류" 말했다가 정치적 보복, 자동차사업 진출했다 실패…정치자금·승계 문제로 검찰 조사

2020.10.25(Sun) 14:43:19

[비즈한국]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2014년 5월 자택에서 호흡곤란과 심장마비로 쓰러진 뒤 6년 넘게 병상에 있던 중이었다. 삼성전자가 지금과 같은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한 데는 이 회장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정치권과의 갈등을 부르기도 했고, 그룹 승계 문제로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의 생애를 여기에 정리해 본다.

 

(※이건희의 일생②-은둔의 경영자, 신경영 대장정에 나서다에서 계속됩니다.)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장쩌민 주석과 리펑 총리 등과 회담을 가진 ​이건희 회장은 ​4월 13일, 회장이 된 이후 최초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현재 우리 정치와 관료행정 수준으로는 21세기를 준비할 수 없다고 본다. 우리의 현 수준을 국제 수준과 비교해볼 때 비관적이다. 우리의 정치인은 4류 수준, 관료행정은 3류 수준, 기업은 2류 수준이다. 이 정권 들어와서 행정 규제가 풀린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이른바 ‘베이징 발언’이다. 

 

청와대는 이 발언을 불쾌하게 여겼고, 이 회장이 귀국하던 4월 18일 공항에는 기자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결국 이 회장은 “본의 아니게 소란을 피워 국민에게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정부에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겁니까”라는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파장은 작지 않았다. 이듬해 국세청이 나서 이 회장의 한남동 자택 주변을 삼성그룹이 대거 매입한 데 대해 조사했고, 삼성에 대한 은행 대출이 전면 중단됐으며, 삼성항공의 F5 전투기 국제 공동개량사업도 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영광 원전 5~6호기 건설 응찰에서도 제외됐다. 이 회장은 저서에서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는 현실에 실망도 많이 했다”고 적었다. 

 

이 회장이 최초로 검찰 수사를 받은 것은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때문이다. 10월 19일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비자금 4000억 원이 차명계좌로 관리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자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불구속 기소된 이 회장은 처음 80억 원밖에 바치지 않았다고 버티다 10시간 이상의 조사 끝에 250억 원을 시인했고, 다음해 8월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97년 5월 12일 부산시 강서구 신호동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을 방문한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이 주행시험장에서 시험생산차량을 시승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 회장은 자동차광으로 120대가 넘는 세계적인 명차들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다. 1995년 삼성이 자동차산업에 진출한 데에는 이 회장의 의지가 작용했다. 그의 저서에서는 자동차산업에 대한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자동차 산업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공부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전 세계 웬만한 자동차 잡지는 다 구독해 읽었고 세계 유수의 자동차 메이커 경영진과 기술진도 거의 다 만나보았다. 즉흥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고 10년 전부터 철저히 준비하고 연구해왔다고 할 수 있다.”

 

1996년 삼성자동차 부산공장이 완공되었고, 1998년 3월 최초의 양산차 SM5의 판매가 시작됐다. 그러나 1997년 12월 IMF 구제금융이 들어오면서 소비심리가 극도로 위축되어 삼성자동차는 1998년 누적 적자가 6988억 원에 이르렀다. 문제 해결을 위해 삼성은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빅딜을 시도했는데 1998년 12월 언론에 이 사실이 보도되자 삼성자동차 직원들이 삼성 본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면서 반발했다.

 

노동계와 정치권에서 이 회장 개인 재산을 내놓아서 삼성자동차 부실을 책임지라는 요구가 거세졌다. 1999년 6월 삼성자동차는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이 회장은 보유하던 삼성생명 주식을 주당 70만 원으로 평가해 2조 4500억 원(350만 주)어치를 채권단에 증여하고, 직원과 하청업체 위로금으로 주식 50만 주(3500억 원치)를 내놓아야 했다.

 

2003년 서울지검은 SK그룹 비자금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압수한 회계장부에서 2002년 대선 때 거액의 회사 돈이 빠져나간 사실을 파악했다. SK가 여야 후보 캠프에 불법 자금을 제공하고 선거 후 당선자 측에 축하금 명목으로 돈을 건넨 사실이 드러났다. 수사는 삼성, 현대자동차, LG 등 다른 대기업으로 확대됐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캠프가 2.5톤 트럭에 담긴 현금을 트럭째 넘겨받은 사실이 드러나 한나라당은 ‘차떼기 정당’이란 오명을 얻었다. 그러나 삼성그룹에서는 이학수 부회장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고, 이 회장은 불기소됐다.

 

2007년 10월 29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구조본)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그룹 비자금을 털어놓는 양심선언을 한 것. 김 변호사에 따르면 삼성은 전직 구조본 간부 명의의 차명계좌를 이용해 비자금을 관리했고, 2002년 대선 자금도 이 비자금에서 제공했다. 또 현직 검찰 간부 40여 명에게 명절 떡값 명목으로 직급에 따라 한 번에 500만~1000만 원을 정기적으로 건넸다.

 

이에 따라 11월 26일 이른바 ‘삼성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이듬해 1월 10일 삼성특별검사팀이 출범했다. 나흘 뒤 이건희 회장 자택과 집무실, 이학수 부회장 등 핵심 임직원 7명의 집과 별장, 삼성본관 등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뤄졌다. 4월 4일 이 회장이 피의자 신분으로 특검 사무실에 출석해 포토라인에 섰다. 노태우·전두환 비자금 사건 이후 13년 만이다. 

 

2008년 4월 4일 ‘삼성 비자금 사건’과 관련,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한남동 삼성특검 사무실로 출두하고 있다. 이 회장이 검찰 조사를 받는 것은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이후 13년 만이었다. 사진=연합뉴스


4월 17일 수사팀은 99일 동안의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준웅 특별검사는 분식회계, 비자금, 정관계 로비 의혹 등은 모두 무혐의 처리했고,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에 대해서는 이 회장을 구속할 경우 ‘국내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란 이유로 불구속 수사한다고 밝혔다.

 

닷새 뒤 이 회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 회장에서 물러날 것을 발표했다. 1987년 12월 1일 취임 후 20년 5개월 동안 지켰던 삼성그룹 회장에서 물러나는 것이었다. 아들 이재용 전무도 삼성전자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사임하고, 부인 홍라희 관장도 리움미술관 관장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전략기획실을 해체하고 차명계좌를 실명 전환하고 삼성카드가 보유한 에버랜드 주식을 매각해 순환출자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2009년 5월 29일 고 노무현 대통령의 노제가 열리던 날, 대법원은 삼성 경영권 승계에 무죄를 선고했다. 13년 동안 이어진 경영권 편법 승계 논란은 이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다만 조세포탈 혐의는 유죄가 인정돼 ​이건희 회장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이 확정됐다. 7개월 후인 2009년 12월 31일 이 회장은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필요한 IOC 위원 자격 회복을 이유로 특별 사면 조치를 받았다. 

 

이 회장은 2010년 3월 삼성그룹 회장에 복귀했다. 구조본을 대신해 미래전략실을 신설했다. 회장 복귀의 이유는 위기감이었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이때의 변은 유명하다. 

 

당시 국내에 애플 아이폰이 본격적으로 판매되었지만, 삼성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삼성의 스마트폰 옴니아는 ‘옴레기’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이 회장 복귀 후 삼성은 갤럭시S를 출시했고, 갤럭시S 시리즈는 삼성전자를 세계 최대 전자회사로 만드는 효자가 됐다.

 

갤럭시S 출시 이후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 실적 행진을 이어가며 승승장구했지만, 이 회장의 만년은 그리 좋지 않았다. 2014년 5월 10일 밤 한남동 자택에서 이 회장은 호흡곤란에 이은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고 심장 기능이 회복됐지만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하지 못했다. 침대에만 누워 있지 않고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를 타고 병실 복도를 오가는 정도였다. 이후 병세가 회복되지 않았고, 2020년 10월 25일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우종국 기자 xyz@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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