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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스타트업열전] 방향 바꾼 유럽 'AI 판' 뒤집을까

최근 실용주의 노선으로 틀고 잇단 빅딜…오래 쌓인 산업 데이터 '월드 모델' '피지컬 AI'에 강점

2026.02.20(Fri) 17:29:41

[비즈한국] 최근 유럽 AI 시장에서 대규모 투자와 인수합병 소식이 늘고 있다. 그동안 AI 영역에서 뒤처져 있던 유럽이 이를 통해 글로벌 AI 경쟁의 구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을지 주목된다. 

 

그동안 생성형 AI 시장이 텍스트와 이미지 중심의 대형 언어모델(LLM) 경쟁에 매몰되어 있었다면, 최근 유럽 기업들의 행보는 현실 세계의 물리 법칙을 이해하고 제어하는 ‘월드 모델(World Model)’과 ‘피지컬 AI(Physical AI)’로의 전략적 전환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는 미국과 중국이 주도해온 디지털 공간의 패권 경쟁과 별개로, 유럽이 강점을 가진 제조 및 산업 현장에서 실용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신세시아는 텍스트를 영상으로 바꿔주는 AI 플랫폼이다. 사람과 같은 AI 아바타를 만들 수 있다. 사진=synthesia.io

 

월드 모델은 AI가 현실 세계의 구조와 변화를 내부적으로 모델링해 공간의 3차원적 이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 그리고 안전이나 품질과 같은 현실적 제약 조건을 동시에 다루는 기술을 의미한다. 

 

기존 LLM이 인터넷상의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해 정보를 요약하거나 코딩하는 데 주력했다면, 월드 모델은 센서 데이터, 공정 로그, 디지털 트윈 등을 결합해 물리적 환경의 행동을 예측하고 계획하는 데 최적화됐다. 결국 승부의 관건은 모델의 규모 자체보다 ‘넓고 복잡한 산업 현장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제어할 수 있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유럽 AI ‘빅딜’ 줄줄이

 

유럽이 AI 영역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자본을 지속적으로 투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들이 올해 초 잇따라 발표됐다. 지난 1월 26일, 런던에 본사를 둔 AI 영상 생성 플랫폼 신세시아(Synthesia)는 2억 달러 규모의 시리즈 E 투자 유치에 성공하며 기업가치를 40억 달러로 끌어올렸다.

 

뒤이어 2월 4일에는 보이스 AI 분야의 선두주자인 일레븐랩스(ElevenLabs)가 5억 달러 규모의 시리즈 D 라운드를 마무리하며 110억 달러라는 압도적인 가치를 인정받았다. 

 

텍스트를 음성으로, 음성을 텍스트로 전환하는 등 음성과 관련한 대부분을 생성해주는 플랫폼 일레븐랩스. 사진=elevenlabs.io

 

구글 딥마인드의 핵심 과학자였던 데이비드 실버가 설립한 ‘이네퍼블 인텔리전스(Ineffable Intelligence)’도 초인적 지능 구현을 목표로 10억 달러 규모의 자본 조달을 추진 중이라는 보도가 나오며 기대감을 조성하고 있다.

 

이러한 빅딜 사례 중에서 단연 주목받은 것은 프랑스의 미스트랄 AI(Mistral AI)가 2026년 2월 17일 클라우드 서비스 스타트업 코이엡(Koyeb)를 인수한 일이다. 이번 딜은 미스트랄의 첫 번째 인수합병으로, 단순한 몸집 불리기가 아니라 모델의 개발부터 배포 및 운영에 이르는 인프라 역량을 내재화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월드 모델 시대에 승자는 ‘가장 똑똑한 모델’이 아니라 ‘가장 넓은 현장을 가장 안정적으로 굴리는 AI 공급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미스트랄 AI의 행보는 유럽이 그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고, 인프라 레이어를 자력으로 쌓으려는 단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AI의 승부가 ‘텍스트 잘 쓰는 모델’에서 ‘현실 세계를 이해·예측·제어하는 모델’, 즉 월드 모델·피지컬 AI로 이동하면 유럽의 제조·산업 자동화·품질 기반이 다시 경쟁력이 된다는 데에 힘이 실린다.

 

#고도화된 유럽 산업 구조, 그러나 여전한 물음표

 

유럽이 월드 모델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는 분석은 이 지역의 고도화된 산업 구조에서 기인한다. 

 

세계경제포럼(WEF)은 지난 1월 20일 발간한 기사에서 자동차(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웨덴), 산업 기계(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물류·제조(네덜란드·벨기에·체코·폴란드), 헬스케어·제약(북유럽·독일·스위스) 등 자산 집약형 산업에서 유럽 기업들은 이미 수십 년의 데이터를 쌓아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피지컬 AI는 ‘현장 데이터의 양과 품질’로 승부가 갈리기 때문에 복제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것이다. 

 

WEF는 특히 유럽의 틈새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중견 기업들(히든 챔피언)에 주목한다. 이들은 특허를 보유하고 시장을 지배하지만, 아직 AI를 충분히 내재화하지 못했다. 바꿔말하면 이들은 피지컬 AI 스타트업에게 가장 확실한 초기 고객이자 데이터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제조업이 발달한 유럽은 다수의 중견 기업들이 수십 년의 데이터를 쌓아왔다. 사진=pixabay

 

하지만 냉정한 지적도 있다. 기존 산업에서 쌓인 데이터와 강력한 연구기관이 유럽의 장점이지만, 아직은 ‘상용화 규모’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2025년 상반기까지 글로벌 피지컬 AI 투자의 대부분은 미국과 중국에 몰렸다. 유럽에 산업용 로봇 강자가 많지만, 여기에 적용되는 소프트웨어 레이어에서의 플랫폼 비즈니스는 유럽이 미국·중국에 비해 아직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빅딜이 공허해지지 않으려면 마지막 퍼즐이 필요하다. 바로 클라우드, 인프라, 배포 역량이다. 월드 모델·피지컬 AI는 현장에 모델을 깔아야 데이터가 쌓이고, 데이터가 쌓여야 성능이 오르며, 성능이 오르면 다시 더 큰 현장에 확산되어 성장한다. 

 

추가적으로 투자 자본의 규모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미국 빅테크의 2026년 투자 규모(CAPEX) 합산은 5000억 달러를 상회한다. 그에 비하면 미스트랄 AI의 스웨덴 데이터센터 투자(약 14억 달러)는 여전히 미미하다. 피지컬 AI에서 ‘스케일’이 승부를 가르는 요인 중 하나라면, 유럽이 미중과의 자본 격차를 어떻게 메울지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2026년 초 유럽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은 미국이나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역전을 선언하기에는 이르다. 다만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으로 경기장의 정의를 바꾸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유럽의 강점인 제조, 물류, 모빌리티 분야의 현장 역량이 AI 기술과 결합할 때 비로소 실용적인 경쟁력이 완성될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유효한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산업 현장으로의 빠른 배포 속도, 현장에서 발생하는 피드백 데이터의 효율적인 축적 및 활용, 그리고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인프라 운영 비용의 통제라는 세 가지 과제를 극복해야 한다. 

 

늘 느리고 짠돌이 이미지였던 유럽이 선택한 실용주의적 경로가 향후 글로벌 AI 지형도를 어떻게 바꾸어 나갈지 그 미래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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