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산업계 노사 관계 지형을 뒤흔들 이른바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이 지난해 9월 공포된 지 6개월 만에 본격 시행됐다. 노동계가 법 시행에 맞춰 교섭 요구를 본격화하고 파업을 예고하면서 산업계 전반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특히 업황 부진으로 구조조정 압력이 거센 석유화학·철강 업계는 인력 재편 과정에서 노사 갈등이 분출될 가능성이 커, 이번 개정안의 파급력을 가늠할 ‘1호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사용자와 노동쟁의 범위의 확대다. 기존에는 직접 근로계약을 맺은 당사자 사이에서만 교섭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하청 노동자도 자신의 근로조건에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원청을 상대로 직접 교섭 테이블에 나올 것을 요구할 수 있게 됐다.
쟁의행위의 대상도 넓어졌다. 쟁의행위는 그동안 임금 등 근로조건의 결정에 관한 사항으로 국한됐으나 앞으로는 경영진의 판단 영역이었던 구조조정이나 공장 이전 등도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경영상 결정’에 해당한다면 교섭 및 쟁의 대상에 포함된다. 하도급 구조에서의 원청 책임은 무거워진 반면, 파업으로 인한 손실에 대해 기업이 노동자에게 물릴 수 있는 손해배상 청구는 까다로워지는 구조다.
사용자성을 판단하는 결정적 기준은 ‘구조적 통제력’의 유무다. 원청 사업자가 계약서상 당사자가 아닐지라도 하청 노동자의 노동시간이나 휴게시간 배정, 특정 공정에 투입되는 인력 규모 등 근로조건의 핵심 요소를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하고 있다면 사용자로 인정될 가능성이 커진다.
#노동계 움직임 본격화…기존 교섭 틀 깨나
법 시행일에 맞춰 노동계도 움직이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이날 서울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원청교섭 쟁취 투쟁 선포대회’를 열고, 900여 개 사업장 소속 조합원 13만 7400여 명을 대신해 각 원청 기업에 교섭 요구 공문을 보냈다. 교섭 요구 대상에는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 현대글로비스 등 현대차그룹 주요 계열사를 비롯해 한화오션, 현대중공업, 현대삼호중공업, 한국지엠, 한국타이어, LX하우시스, KCC글라스 등이 대거 포함됐다.
한국노총은 ‘개정노조법대응 현장 TF’를 가동하며 현장 점검에 나선다. 류기섭 한국노총 사무총장은 “노조법 2·3조 개정으로 하청 노동자가 실질적 사용자인 원청과 당당히 교섭할 수 있는 역사적 길이 열렸다”며, “법의 변화가 현장에서 하청 및 플랫폼 노동자의 실질적인 단결권과 교섭권 보장으로 이어지도록 신속히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개별 노조의 대응도 본격화했다. 현대차비정규직지회와 HD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는 이날 원청에 각각 세 번째 교섭 요구서를 전달했다. 이미 두 차례 교섭을 요구했으나 사측이 응하지 않자 법적 근거가 마련된 이날 재차 압박에 나선 것이다.
플랫폼과 물류 업계도 영향권에 들며 업종별, 기업별 갈등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카카오지회(크루유니언)는 오는 12일 판교역 일대에서 기자회견을 예고했다. 플랫폼 기업 특유의 복잡한 지배구조 속에서 실질적인 인사·노무 결정권을 쥔 본사를 상대로 플랫폼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과 교섭권 보장을 강하게 요구한다는 방침이다.
서비스연맹 택배노조는 이날 CJ대한통운의 직접 교섭 참여를 촉구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택배 기사와 원청 물류사 간의 사용자성 인정 여부를 둘러싼 오랜 법적 다툼이 이번 법 시행을 계기로 원청의 직접적인 교섭 의무 이행 요구로 이어지며 갈등이 격화하는 모양새다.
자회사 인력 충원과 교대제 개편 요구 등으로 대립이 이어지고 있는 인천공항공사도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는 평가다. 정안석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인천공항지역지부장은 “자회사 경영진은 예산과 인력 결정 권한이 모회사에 있다며 책임을 회피했고 원청은 법적 사용자가 아니라며 숨어왔다”며 인천공항공사의 직접 교섭을 촉구했다.
#“생존 전략이자 투자” 정부 상생 강조 속 재계는 비상체계
파장은 산업계 전반으로 계속될 전망이다. 조선·자동차·건설업계 등 협력사를 대규모로 거느린 기업일수록 개정안 시행에 따른 압박은 가중된다. 한화오션과 현대제철 등은 법원에서 하청 노동자에 대한 원청의 사용자성을 일부 인정한 판례가 있어 1호 사업장이 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첫 번째 대상 기업을 두고 설왕설래가 이어지는 가운데 실제로 인천공항공사 정규직 노조는 앞서 “정부가 공사를 ‘노란봉투법 1호 시범사업장’으로 검토하고 있다는데 이를 거부한다”며 공개적으로 반발하는 등 노노 갈등 양상도 나타난다.
재계는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각 기업은 별도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대응 매뉴얼을 수립하고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배부한 개정법 해석지침과 매뉴얼을 기반으로 관련 프로세스 전반을 점검 중”이라고 전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8일 입장문에서 “사용자성 인정 가능성 여부와 무관하게 무분별한 교섭 요구가 이어지며 노사 간 분쟁이 지속될 것으로 우려된다”고 짚었다.
정부는 노사 협력 모델을 강조하며 갈등 관리에 나섰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오후 청와대 본관에서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 네이버, 한화오션 등 주요 대기업 임원과 협력 중소기업인 36명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이 대통령은 한화오션이 노동자 가압류 문제를 해결하고, 최근 연간 약 890억 원을 출연해 하청 노동자에게 원청 소속 노동자와 동일하게 성과급을 지급한 사례를 모범으로 꼽았다. 이 대통령은 “대·중소기업 간 상생 협력은 시혜가 아닌 영리한 생존 전략이자 투자”라고 강조했다.
개정안 시행 초기 노사 양측이 법 해석을 두고 치열한 공방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경영권과 노동권 사이의 새로운 실무적 균형점을 찾는 것이 산업계의 최대 과제가 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대한변호사협회 노무변호사회 이사 장연실 변호사(법무법인 지평)는 “개정 노동조합법에 따라 정리해고 등 경영상의 결정이라 하더라도 근로조건에 실질적 영향을 미친다면 단체교섭 대상이 될 수 있다”며 “사용자는 신기술 도입 등이 단협상 협의나 합의 대상인지 사전에 점검하고, 노조 역시 직접적 영향이 객관적으로 예상되는 범위를 기준으로 합리적으로 접근해야 분쟁을 예방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강은경 기자
gong@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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