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중동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국제 유가가 요동치고 있다. 한국 주유소의 유류 가격이 빠르게 오르는데 유럽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다. 독일 자동차협회(ADAC)에 따르면 이란 전쟁 직전 독일의 휘발유(Super E10)는 리터당 평균 1.69유로(2900원), 경유는 1.61유로(2760원) 수준이었다. 그러나 개전 직후부터 가격이 수직 상승하기 시작해 3월 10일, 두 유종 모두 동시에 리터당 2유로(3400원) 선을 넘어섰다. 이 두 유종이 나란히 2유로를 돌파한 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가 이어지던 2022년 9월 이후 처음이다.
#러-우 전쟁 이후 에너지에 대한 인식 변화
유가 상승은 단순히 자동차 연료 부담이 커지는 데 그치지 않고 물류와 제조, 전력 생산까지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은 그린에너지 전환을 빠르게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 화석연료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다. 과거 석유는 중동과 러시아에서, 천연가스는 러시아 파이프라인에서 끌어다 썼다. 저렴하고 안정적이었지만, 외부 충격에 취약했다.
유럽이 이를 뼈저리게 느낀 것은 2022년 러-우 전쟁으로 인해서다. 러시아와 유럽의 에너지 거래가 사실상 단절되면서 유럽 가스 가격의 기준인 네덜란드 TTF 가격은 2022년 여름 한때 MWh(메가와트시)당 300유로(51만 원)를 넘으며 전쟁 전보다 10배 이상 폭등했다. 이는 여러 산업에 직격탄이 됐다. 일례로 독일 화학기업 BASF는 에너지 가격 상승을 이유로 자국 공장 생산을 축소했다.
#공포가 만드는 시장
최근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등으로 인한 중동 에너지 공급이 차단되면서 유럽 사회에서 위기감이 확산하고 있다. 하지만 무력감에 가까웠던 2022년의 ‘에너지 공포’와는 결이 다를 것이다. 그때 이후 유럽은 에너지 의존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는 사회적 담론을 꾸준히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EU(유럽연합)는 러-우 전쟁 직후 ‘REPowerEU’를 선언했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을 대폭 늘리고, 에너지 절약정책도 함께 추진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민간과 기업에서도 인식 변화가 나타났다. 독일 가정에서는 가스 보일러 대신 히트펌프 설치가 빠르게 늘었으며, 기업들도 태양광 발전 설비나 장기 재생에너지 구매계약을 확대하는 추세다.
과거 유럽의 재생에너지 전환이 “지구를 구하자”는 북유럽발 이상주의적 담론에 가까웠다면, 현재는 ‘에너지 안보’, ‘에너지 주권’이라는 현실적 의제로 탈바꿈해 설득력이 더 강하다.
이는 스타트업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투자 시장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게 현장의 평가다. 과거 기후위기를 명분으로 한 탄소 배출권 거래나 소비자용 친환경 서비스 등에 고개를 갸웃거렸던 투자자들이 ‘에너지 안보’로 명함을 바꾼 그린테크에 지갑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러-우 전쟁이 터진 2022년, 유럽 그린테크 스타트업에는 전쟁 충격과 금리 상승에도 역대 두 번째로 많은 자금이 쏟아졌다. 이후 AI 붐 등의 여파로 투자 규모는 줄었지만 방향은 달라지지 않았다. 2025년 그린스타트업 보고서(Green Startup Report 2025)에 따르면 2025년 기준 그린테크 스타트업의 투자 유치 성공률은 약 30%로, 비(非)그린 스타트업의 두 배에 가까운 수준을 유지한다. 돈의 총량보다 돈이 어디로 흐르는지가 바뀌고 있다는 얘기다. 전쟁이 그린테크 시장을 키우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란 전쟁이 또 한번의 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에너지 자립을 향한 기술 개발, 투자 속속
그린테크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최근에도 이어진다.
이달 3일 네덜란드 스타트업 리프트(RIFT)는 약 1억 1380만 유로(1950억 원)의 자금을 확보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 회사가 개발하는 기술은 ‘철가루 연료’다. 석탄이나 가스 대신 철가루를 연소해 산업용 열을 생산한다. 철이 산소와 반응하면 고온의 열이 발생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는 배출되지 않는다. 연소 후 남는 산화철은 다시 환원해 철로 만들 수 있어 반복 사용이 가능한 순환 연료라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철강·시멘트·화학 산업처럼 고온의 열이 필요한 공정에서 화석연료를 대체할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차세대 지열 기술에도 투자자들의 관심이 쏠린다.
독일 딥테크 차세대 지열 기술 및 광물 채취 스타트업 하데스 마이닝(Hades Mining)은 올해만 약 1500만 유로(260억 원) 규모의 시드 투자를 유치했다. 이 회사는 레이저 드릴링으로 기존보다 최대 100배 빠르게 땅을 파, 기존 지열 발전보다 훨씬 깊은 지층에 접근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열은 날씨나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정적인 전력원이기 때문에,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할 기술로 주목받는다.
자본 회수 기간이 길어 한때 외면받던 핵융합 딥테크 분야에도 자금이 몰린다.
독일 핵융합 스타트업 프록시마 퓨전(Proxima Fusion)은 2025년 6월 약 1억 3000만 유로(2200억 원) 규모 투자를 유치하며 업계 최대 투자 기록을 갈아치웠다. 같은 해 9월에도 추가 투자가 이어져 확보한 자금은 약 2억 유로(3400억 원) 수준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2026년에는 바이에른 주 정부가 핵융합 연구 시설 구축에 약 4억 유로(6800억 원) 지원 계획을 발표하면서 관련 기술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이 회사는 ‘핵융합 발전’ 기술을 개발한다. 핵융합은 태양이 에너지를 만드는 방식과 같은 원리로 전기를 생산하는 기술인데, 탄소를 배출하지 않으면서도 막대한 에너지를 만들 수 있어 ‘꿈의 에너지’로 불린다.
전쟁과 에너지 가격 변동은 유럽 경제에 또 다른 불확실성을 던졌고, 동시에 에너지 기술 혁신을 가속하는 계기가 됐다. 화석연료 공급망이 반복적으로 흔들릴수록 그 대안을 찾으려는 기술 투자 역시 더 빨라질 수밖에 없다. 유럽 그린테크 스타트업들은 지금 거대한 지정학적 변화의 한가운데 서 있다.
필자 이정우는 17년간 언론사 기자로 자동차, 2차전지, 중공업 등 주요 산업을 비롯해 국방, 외교, 환경, 교육, 보건복지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담당했다. 특히 모빌리티 및 에너지 전환과 지속가능성 중심의 산업 구조 변화를 현장에서 취재했다. 현재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123팩토리'의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
이정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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