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기술은 누군가의 퇴근길 가방 속에 담겨 조용히 국경을 넘는다. 수십 년간 쌓아올린 연구 성과와 국가 전략 기술이 출력물 몇 장, USB 메모리 스틱에 담겨 사라진다. 기술 유출 사건은 매년 수십 건씩 적발되지만, 그 전모는 단편적으로만 드러난다. 비즈한국은 4부작 기획 ‘기술간첩’을 통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유출의 순간을 재구성한다.
1부 ‘황금 티켓’
잉크가 채 마르기 전, 가방은 닫혔다
1.
2022년 12월 중국 상하이.
연말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왕샤오 팀장은 차가운 현실을 마주했다. 사내 승진 명단 어디에도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메모리 반도체의 글로벌 선도기업인 한국 기업에 들어와 9년간 일하며 쌓은 자부심이 배신감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화하이로의 이직 계획은 점차 선명해졌다. 중국 최대 통신장비업체 중화하이는 기술격차를 따라잡기 위해 앞선 기술과 공정을 경험한 인재들이 필요했다. 왕 팀장은 한국 본사에서 반도체 설계의 불량을 분석하는 업무를 맡다가 2년 전부터 중국 상하이법인의 기업 거래 고객상담실에서 책임자급으로 일하고 있었다. 중화하이가 제시한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첫해 연봉 세전 160만 위안(약 3억 2000만 원)과 주거비 별도 지원.” 계약 연봉 기준 현재의 4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이듬해 봄 어머니에게 보낸 위챗 메시지에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가 가감 없이 드러났다. “엄마, 중화하이에 가기로 했어요. 8월에 중국으로 돌아가요.”
30대에 이미 관리직에 오른 그녀는 커리어 2막을 열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2.
이직이 확정되자 왕 팀장의 행보는 기민해졌다. 한국 본사 복귀 직전인 6월 말, 상하이 사무실에서는 정적을 깨는 프린터의 기계음이 이어졌다. 그녀가 뽑아낸 문서는 총 1309장, 약 40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그 안에는 D램의 누설 전류를 막는 핵심 공정인 HKMG(하이케이메탈게이트) 설계 스펙과 평가 결과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왕 연구원은 평소 메던 백팩 말고도 커다란 쇼핑백을 챙겨 출근했다. 상하이 사무소는 본사와 달리 검색대조차 설치되지 않아 탈취가 쉬웠다. 그녀는 매일 오후 5시에서 7시 사이 대량의 문서를 출력한 직후 이를 쇼핑백에 담아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3.
이천시 본사.
유난히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고 퇴사가 공식화된 7월 중순, 이상 징후를 포착한 보안팀이 움직였다. 왕 팀장은 산업보안팀 최 팀장과 마주 앉았다. 보안 시스템이 포착한 이상 징후에 대해 소명하는 자리였다. 그녀는 태연했다.
“고객사 문의가 많아 공부 목적으로 출력한 뒤 그 자리에서 모두 파쇄했어요. 이직 제안은 제 시장 가치가 얼마인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응했을 뿐이고요.”
왕 팀장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료를 인쇄한 건 맞지만 기술을 빼돌릴 의도는 없었다며 부인했다. 수상한 흔적이 남은 범행 일자들을 추궁하자 당시에 자신의 송별회가 있었고 마지막 날에는 동료와 함께 퇴근해 유출이 불가능했다며 일과를 줄줄이 읊었다.
4.
고국으로 돌아온 왕샤오는 중화하이그룹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며 사건은 잊히는 듯했다. 1년 뒤 옛 동료로부터 “법적 조치가 다 철회됐다”는 연락을 받자 안심했다. 얼마 뒤 그녀는 꽃핀 제주로의 여행길에 올랐다.
그녀를 기다린 것은 푸른 바다가 아니라 검찰의 체포영장이었다. 가족 여행을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제주공항에 입국한 그녀의 손목에는 차가운 수갑이 채워졌다. 21개월간의 도피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2부 상해의 밤
셔터가 닫히고, 기술은 국경을 넘었다
1.
박 팀장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회사가 자회사의 CIS(이미지센서반도체) 기술을 양수했을 때 자회사 소속이던 박 팀장도 자리가 바뀌었다. 벌써 6년 전 일이었다. 박 팀장이 중국 상하이 판매법인 주재원으로 발령받은 지도 4년이 넘었다. 글로벌 메모리 시장을 선도하는 자사 기술을, 중국 현장에서 설명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야경도 그에게 더는 감흥을 주지 못했다. 중화하이의 자회사인 중국의 CIS 설계 업체 화실리콘으로 함께 가자는 옛 동료 강석준의 제안을 뿌리칠 이유가 없었다. 메모리 사업 확대를 준비 중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박 팀장은 이직을 결심했다. 그에게 CIS 설계 기술은 더 이상 지켜야 할 비밀이 아니었다.
2.
2022년 2월. 이직이 확정됐다. 박 팀장은 조용히 움직였다. 직원들이 퇴근한 저녁, 상하이 사무소의 정적을 깨고 프린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보름 동안 여덟 차례, 186장의 핵심 문서가 그의 가방에 담겼다.
재택근무를 핑계로 챙겨온 노트북은 이제 그의 가장 충실한 공범이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아이패드를 들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CIS 공정 설계도 위로 그림자가 졌다.
찰칵.
화면을 넘기고, 다시 셔터를 눌렀다. 픽셀 구조, 웨이퍼 테스트 항목, 노이즈 분석 데이터…. 여름까지 집요한 수집이 이어졌다. CIS 동작 원리부터 설계도, 내부 교육 자료와 픽셀 간 상호 간섭을 방지하는 기술, AI 반도체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과 후처리 기술, 사업 전략 자료까지. 5개월에 걸친 촬영본은 5900장에 달했다.
3.
박 팀장은 이 자료들 ‘이직용 이력서’라는 이름 아래 숨겼다. 인사담당자에게 전달한 이력서 파일 행간에는 회사 기술이 박 팀장 개인의 성과인 양 둔갑해 있었다.
이력서를 첨부한 이메일이 국경을 넘는 순간 그는 더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8월에는 또 다른 경쟁사인 청도반도체에도 같은 내용의 설계도가 건너갔다.
비정상적으로 급증한 문서 열람 기록. 완벽해 보였던 그의 타임라인도 꼬리를 남겼다.
3부
법의 저울 위에 올려진 두 개의 이력서
1. 뒤집힌 양형, 국가핵심기술의 무게
중국으로 간 왕샤오 팀장은 2년 동안 별다른 사법 조치가 없자 방심한 채로 제주도 가족 여행을 계획했다. 2024년 4월 제주공항에 입국한 그는 회사의 첩보를 바탕으로 수사를 벌이던 경찰에 체포돼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
왕 팀장의 항변은 대법원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2025년 8월 대법원은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그녀에게 징역 5년 및 벌금 3000만 원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1심에서 선고된 징역 1년 6개월은 항소심에서 5년으로 대폭 늘어났고 그대로 확정됐다.
재판부는 유출된 HKMG 기술이 2016년부터 국가 안보를 위해 지정된 ‘국가핵심기술’임을 명확히 했다. 이직 확정 시점에 보안이 허술한 상하이 사무소에서 4000쪽 분량의 자료를 집중 출력해 반출한 행위는 죄질이 매우 무겁다고 판단했다. 특히 범행을 부인하며 반성하지 않는 태도와 이 기술이 해외로 유출될 경우 국가 경제에 끼칠 막대한 해악이 양형 가중의 결정적 근거가 됐다.
2. 이력서에 첨부된 무단 촬영본
지난해 1월 검찰은 박진우 팀장의 주거지 등을 압수수색해 산업기술 유출의 증거를 확보했다. 같은 해 10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그에게 1년 6개월 형을 내렸다. 박 팀장이 상하이 사무소의 보안 공백을 이용해 5900여 장의 기술 자료를 촬영하고 이를 경쟁사 이력서에 인용해 누설한 혐의가 모두 유죄로 인정됐다.
다만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을 첨단기술로 보고 기소한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부분에는 무죄가 선고됐다. 이 기술이 법령상 ‘TSV 기반 공정’과는 물리적 원리가 다른 독립된 기술적 경로라는 전문심리위원의 의견이 수용됐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초범이며 잘못을 인정하고, 유출된 자료가 실제 제조 공정으로 직결되는 수준은 아니라는 점을 참작해 형량을 정했다.
이 팩션 기사는 2022년 중국 상하이 SK하이닉스 직원들이 회사의 핵심 기술 자료를 무단 반출한 두 사건을 병렬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중국 국적 연구원 피고인 A 씨(가명 왕샤오)와 한국인 주재원 피고인 B 씨(가명 박진우)는 화웨이 이직을 위해 SK하이닉스의 산업기술 자료를 무단으로 유출한 혐의를 받았다.
피고인 A 씨는 승진 누락 이후 연봉 약 3억 2000만 원 조건에 화웨이 그룹으로의 이직을 결정하고 HKMG 기술 자료 4000쪽을 출력했다. 피고인 B 씨는 CIS 기술 자료를 사진 촬영하고 이직용 이력서에 인용해 화웨이 측에 전달했다. B 씨가 무단 촬영한 유출 자료는 총 5900여 장에 이른다. 검찰은 B 씨가 보낸 이력서가 또 다른 중국 경쟁사 간부와 대표에게 실제 전달된 사실도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대외비’ 문구나 SK하이닉스 로고 등은 삭제됐다.
국가핵심기술 보유기업인 SK하이닉스는 전산 보안 시스템과 산업보안부서의 모니터링을 통해 기술 유출 방지에 주력하고 있다. 상시 모니터링을 통해 퇴직 예정자의 비정상적인 출력량 증가나 문서 열람 로그 등 이상 징후가 포착되면 즉시 내부 조사에 착수한다. 특히 상하이 등 해외 지사의 물리적 보안 취약점을 이용한 시도에 대해서도 전산 로그 추적을 통해 대응하고, 유출 정황이 확인되면 즉각 수사 의뢰와 고발 조치를 실시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보안상 USB 등 저장매체 사용을 금지하고 있으며 출력물에 관해서도 내용과 인쇄자, 사용처 등을 상세히 기록해 관리하고 있다”며 “CCTV 및 모니터링 시스템 강화 등을 통해 보안 관리 개선을 실시한다”고 설명했다. 본 사건들 역시 회사의 내부 감사와 수사 의뢰를 통해 그 전모가 드러났다.
사법부는 국가 경쟁력의 근간인 반도체 기술을 다루는 연구자들이 신뢰를 저버린 행위에 대해 엄중한 잣대를 적용했다. 피고인 A 씨에게는 징역 5년과 벌금 3000만 원의 중형을 확정하며 기술 유출이 국가 안보에 미치는 해악을 경고했다. 피고인 B 씨의 경우 일부 기술의 법적 ‘첨단기술’ 해당 여부와 자료의 실제 제조 직결성 등을 참작해 징역 1년 6개월 형이 선고됐다.
강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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