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해 6월 경기 성남에 메가팩토리약국이 문을 연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 창고형 약국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일반 동네 약국보다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환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는데 이달 초 제약사 CEO 출신 약사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인근에 창고형 약국을 열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이천수 르 메디 약국 대표약사는 대웅제약과 광동제약에서 임원을, 슈넬생명과학에서 CEO를 역임했다. 특히 1999년 1차 부도를 겪으며 어려움에 놓였던 광동제약에서 훗날 국민 드링크가 된 ‘비타500’ 개발을 주도했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이 약사가 기존 약국들과 상생 논란을 벌이는 창고형 약국에 도전장을 낸 이유는 뭘까. 비즈한국이 그를 만나 속사정을 들었다.
#제약사 CEO의 30년 숙원, ‘한국형 돈키호테’를 꿈꾸다
이천수 대표약사의 창고형 약국 구상은 약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약사 재직 시절 해외 출장을 다니며 마주한 선진국형 약국 모델에 꽂혔다. 이 대표약사는 “과거 제약사를 잠시 떠나 한화그룹에 스카우트돼 유통 업무를 맡으며 유럽의 더부츠나 일본의 돈키호테 같은 선진국형 약국 모델을 접했다”면서 “이를 국내에 도입하려고 했지만 당시 약사법 규제로 인해 무산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해 메가팩토리약국 개소를 보고 창고형 약국에 대한 도전 의식이 되살아났다고 털어놨다. “그동안 잊고 살다 작년에 창고형 약국이 오픈한 것을 보고 ‘나보다 빠른 사람이 있네’ 하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르 메디 약국은 출범 전부터 약사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1100평의 역대급 규모로 알려지자 골목상권 침해 등의 논란이 불거졌다. 하지만 막상 이달 초 뚜껑을 연 르 메디 약국은 60평 규모에 그쳤다. 나머지 공간은 뷰티, 건강기능식품 등 H&B 매장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대표약사는 규제 때문에 불가피하게 약국 규모를 축소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처음 기획은 약국 500평, H&B 매장 500평이었는데 상가 내 ‘공용 복도’라는 건축법상 구조와 현행 약사법이 충돌하면서 개설 허가가 2~3개월 미뤄졌다”면서 “결국 현행 규제에 맞춰 약국 공간을 60평으로 축소한 뒤 나머지를 완전히 분리해 개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규제를 준수하면서도 소비자가 원하는 바를 충족하기 위해 동선을 재설계하고 공간별 전문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재조정했다”고 덧붙였다.
#"약사 눈치 보지 마세요" 핵심은 ‘하프 응대’와 셀프서비스
창고형 약국이 주목받는 것은 약사가 추천하는 약이 아니라 환자가 원하는 약을 구매할 수 있고, 기존 약국보다 저렴하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창고형 약국 개소가 잇따르면서 이제 가격 경쟁력만으로는 지속가능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다른 창고형 약국과 차별화된 르 메디 약국만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이 대표약사는 소비자 경험을 꼽았다. 그는 “올리브영 등 대형 H&B 스토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프 응대’ 방식을 약국에 도입했다”고 말했다. 도움이 필요할 때만 전문 약사가 다가가 상담해줘 소비자의 심리적 부담을 줄인다는 것이다.
현재 르 메디 약국은 약 2000종의 일반의약품과 약국 전용 건강기능식품을 취급하며 11명의 약사를 순환 배치하고 있다. 전용면적 870평에 20여 명의 약사를 둔 다른 창고형 약국과 비교하면 훨씬 압축된 공간에 밀도 높은 전문 인력을 배치해 고객 응대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평가다.
특히 셀프 매대에서 단순 감기약 한 통을 고르더라도, 결제 전 반드시 전문 약사의 철저하고 꼼꼼한 복약 지도를 거치도록 시스템을 구축해 의약품 오남용 우려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대표약사는 “소비자가 원하면 뭐든 하는 공간, 그것이 저희가 추구하는 진정한 웰니스 플랫폼이다”라고 강조했다.
#“동네 약국과 싸울 이유 없어…약사 후배들이 도전했으면 좋겠다”
창고형 약국은 ‘저렴한 약국’으로 소비자에게 환영을 받지만 인근 지역의 약사들에게는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다. 기존 약국으로선 갑작스레 가격 경쟁과 생존의 위협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이 대표약사는 이른바 ‘난매(출혈 경쟁)’로 상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에 선을 그었다. 그는 “대량 매입(바잉 파워)을 통해 매입 단가를 낮추고 유통 마진을 최소화해 그 이익을 소비자에게 돌려줄 뿐 주변을 고사시키는 출혈 경쟁이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이 대표약사는 창고형 약국과 일반 동네 약국의 역할에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며 동네 약국과의 갈등 관계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대형 할인점과 같은 창고형 약국이 등장하는 것은 시대적 흐름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동네 약국은 지역 주민들에게 밀착된 처방 조제 및 건강 서비스를 제공하는 고유의 역할이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후배 약사들을 향해 조언도 남겼다. 이 대표약사는 “능력 있고 젊은 후배 약사들이 단순히 처방전에 얽매이는 것을 넘어 새로운 형태의 약국을 창업하는 등 도전을 이어나갔으면 좋겠다”면서 “그러면 창고형 약국보다 한 단계 더 혁신적인 모델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메기’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불러온다. 하지만 이 대표약사의 시선은 업계의 이권 싸움이 아니라 매장을 찾아온 소비자를 향한다. 규모는 작지만 창고형 약국을 표방한 르 메디 약국이 규제와 견제를 뚫고 순항할 수 있을지 이목이 쏠린다.
최영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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