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2017년 독일 쾰른에서 태어난 AI 번역 스타트업 딥엘(DeepL)은 오랫동안 유럽 기술 생태계의 자랑이었다. 폴란드 출신 컴퓨터과학자 야로슬라프 쿠틸로프스키가 다국어 사전 서비스 링귀(Linguee)의 데이터셋을 기반으로 신경망 번역 기술을 개발해 만든 회사다. 처음부터 구글 번역의 대항마를 자처했고, 실제로 여러 독립 정확도 평가에서 구글을 앞섰다. 단순히 단어를 치환하는 게 아니라 문맥과 어조까지 살리는 번역이 입소문을 탔다.
2024년 매출은 전년 대비 31% 증가한 1억 8520만 달러(약 2800억 원). 같은 기간 기업가치는 10억 달러에서 20억 달러로 2배로 뛰었다. 사용자층도 범상치 않았다. 포천 500대 기업의 절반 이상, 각국 정부기관과 법원이 계약서·판결문·외교 문서 같은 민감한 자료를 딥엘에 맡겼다. 서버를 독일과 아이슬란드에만 두고 “당신의 데이터는 유럽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약속이 신뢰를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올해 초였다. 딥엘은 고객들에게 5월 20일부터 약관이 달라진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앞으로 데이터를 자체 서버에서만 처리하지 않고 아마존 웹서비스(AWS)를 추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동의한 것으로 간주했고, 반대한다면 올해 12월 31일부로 계약 해지가 되는, 사실상의 일방적 통보였다.
#딥엘의 ‘대항복’
독일 기술 커뮤니티 일각에서는 이 결정을 ‘딥엘의 대항복’이라고 맹비난한다. 딥엘은 태생부터 ‘구글에 맞서는 유럽의 대안’이라는 정체성으로 미국 빅테크에 맞서 싸운다는 서사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 무기가 바로 유럽 서버와 데이터 주권이었다. 그런데 그 무기를 스스로 내려놓고 자진 귀순한 모양이 됐다. 단순히 딥엘이라는 회사의 사업 결정이 아니라 ‘유럽 디지털 주권 담론 전체의 상징적 패배’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이유다.
논란이 커지자 딥엘은 “데이터는 암호화되고, 아마존은 내용을 볼 수 없으며, AI 모델 학습에도 쓰이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아마존이 미국 회사라는 점이다. 미국이 2018년 도입한 클라우드법(CLOUD Act)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아마존 같은 클라우드 사업자에게 서버에 저장된 데이터를 요구할 수 있다. 서버가 유럽에 있어도, 데이터가 암호화돼 있어도, 운영사가 미국 기업이라면 이 법의 사정권 안에 들어온다.
일례로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 프랑스의 앙톤 카르노 법무·공공업무 이사는 프랑스 상원 청문회에서 “프랑스 시민 데이터가 미국 당국에 넘어가지 않을 것을 보장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했다. 그는 “다만 미국 정부의 요구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면서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 얼마나 오래 유효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딥엘의 변화에 따른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독일어권 기술 미디어 사이버뉴스(Cybernews)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소프트웨어 기업 말로지카그룹은 발표 직후 딥엘 사용을 중단하기로 했다. 이 회사 대표 바이스하우프트는 “새 약관은 우리가 처음 딥엘을 선택한 이유와 양립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딥엘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었던 공공 부문과 법조계에서도 이탈이 예견되고 있다. 독일의 경우 연방정보보안청(BSI)의 엄격한 데이터 보안 가이드라인을 준수해야 하는 행정기관들과 지자체들이 유럽 자체 서버를 둔 대체재를 찾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의뢰인의 비밀 유지가 생명인 법조계의 반응은 더 민감하다. 독일 현지 법률 테크 전문가들은 “소송 데이터나 기업 인수합병(M&A) 기밀이 미국 클라우드법의 잠재적 사정권에 들어가는 위험을 로펌들이 감당하긴 어려울 것”이라며 “기업용 계정의 이탈과 내부 금지령이 도미노처럼 확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딥엘의 ‘딜레마’
물론 딥엘 입장에서 이 결정은 불가피했을 수 있다. 전 세계 228개 시장에서 서비스하기 위해서는 빠른 응답속도와 안정적인 인프라가 필요하다. 이러한 수준의 인프라를 자체적으로 구축하려면 천문학적 비용이 든다. 딥엘은 현재 미국 증시 상장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고, 목표 기업가치는 50억 달러(7조 7000억 원)다. 글로벌 투자자들 앞에 서려면 글로벌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사업적으로 지극히 타당하다.
이는 딥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럽에서 글로벌 규모로 서비스를 운영하려는 기업이라면 누구나 같은 벽에 부딪힌다. 아마존·구글·마이크로소프트 수준의 클라우드 인프라를 자체 구축하려면 수조 원이 들고, 현재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유럽 기업은 없다. 이미 유럽은 클라우드, AI, 반도체 등 핵심 디지털 제품과 서비스의 80% 이상을 비유럽 국가에 의존하고 있다. 딥엘의 선택은 개별 기업의 변심이라기보다 구조가 강요한 결과에 가깝다. 결국 나쁜 선택을 한 게 아니라 좋은 선택지가 없었을 뿐이다.
#“강제로라도 데이터 주권 지킨다” 벼랑 끝 EU ‘초강수’
유럽의 자존심이던 딥엘마저 미국 빅테크의 클라우드 인프라에 무릎을 꿇자 유럽연합(EU)도 마침내 칼을 빼 들었다. 지난 6월 3일 EU 집행위원회는 ‘클라우드 및 AI 개발법(Cloud and AI Development Act, CADA)’을 전격 발표했다. 미국이 독점하고 있는 클라우드와 AI 인프라 판도를 뒤엎고 ‘유럽의 데이터 주권’을 강제로라도 지키겠다는 것이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공식 성명에서 “병원을 돌리고, 전력망을 안정시키고, 서비스를 지키는 기술을 다른 나라에 의존하는 상황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며 법안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이번 법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4단계 클라우드 주권 등급제’다. EU는 국가 안보, 사법, 보건, 금융 등 민감한 데이터를 다루는 공공 분야에는 최고 등급(Level 3~4)의 클라우드만 사용할 수 있도록 강제할 방침이다. 이 등급을 받으려면 데이터가 무조건 EU 영토 내에서 처리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법인의 소유권과 통제권 역시 EU 기업에 있어야 한다.
헤나 비르쿠넨 기술 주권 담당 부위원장은 언론 브리핑에서 “어떤 공급자도 유럽 데이터의 ‘킬 스위치’를 가져서는 안 된다”며 “미국의 클라우드법 때문에 미국 기업들이 최고 주권 등급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선을 그었다.
이와 함께 EU는 앞으로 5~7년 내에 유럽 자체 데이터 센터 용량을 현재의 3배 이상으로 확충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약 2000억 유로(약 340조 원)에 달하는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고 인허가 절차를 대폭 간소화해 ‘유럽산 클라우드 생태계’를 육성하겠다는 전략이다. 다만 비르쿠넨 부위원장은 “우리 기술의 80%가 유럽 외부에서 유입되므로 단기간에 역량을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가시적 성과는 이르면 2030년이 돼야 나타날 것”이라며 ‘장기적 과제’임을 인정했다.
시장에서는 우려와 기대가 격렬하게 교차한다. 법안이 발표된 당일, 유럽 내 4만여 테크 중소기업을 대변하는 유럽디지털중소기업연합(DIGITALSME)과 프랑스의 로컬 클라우드 기업 오바이에이치클라우드(OVHcloud) 등은 “유럽 기업들이 미국 빅테크로의 인프라 종속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결정적 발판이 마련됐다”며 일제히 환영했다.
반면 미국 하이퍼스케일러 기업들을 대변하는 컴퓨터통신산업협회(CCIA Europe)와 소프트웨어연합(BSA) 등은 즉각 브뤼셀에서 반대 성명을 내고 거세게 반발했다. 이들은 이번 조치가 “기술의 성능이 아닌 기업의 본사 위치와 소유 구조 등 ‘출신 성분’을 이유로 글로벌 기업을 배제하는 차별적 보호무역주의”라며 “결국 유럽 기업들의 기술 고립과 경쟁력 저하를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법안이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의 심각한 무역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EU의 초강수가 딥엘처럼 미국 인프라로 떠나가는 유럽 AI 기업들을 붙잡을 ‘구원투수’가 될 것인가, 아니면 글로벌 스탠더드로부터 유럽을 고립시키는 ‘자충수’가 될 것인가. 유럽이 내건 ‘기술 주권’의 유효기간을 증명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필자 이정우는 17년간 언론사 기자로 자동차, 2차전지, 중공업 등 주요 산업을 비롯해 국방, 외교, 환경, 교육, 보건복지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담당했다. 특히 모빌리티 및 에너지 전환과 지속가능성 중심의 산업 구조 변화를 현장에서 취재했다. 현재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123팩토리'의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
이정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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