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베를린에서 새로운 바이오 행사가 열렸다. 이름은 ‘바이오캡(bio:cap)’. Biotechnology의 ‘bio’와 capital의 ‘cap’을 합친 이름이다. 여기서 capital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품고 있다. 하나는 자본, 다른 하나는 수도다. 다시 말해 bio:cap은 바이오 기술과 자본이 만나는 곳이자,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유럽 생명과학 생태계를 새롭게 연결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행사다.
#업계 관계자 위한 전문 행사, 규모보다 ‘내실’에 집중
올해 처음 열린 bio:cap은 일반적인 박람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흔히 대형 전시회를 떠올리면 수많은 일반 방문객, 넓은 전시장, 홍보용 브로슈어, 지나가는 관람객을 붙잡는 부스 운영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bio:cap은 애초부터 그런 행사를 지향하지 않았다. 일반 대중을 위한 행사가 아니라, 바이오·헬스케어·AI·투자·임상·제약 산업 관계자들이 서로를 정확히 만나도록 설계된 전문 행사에 가까웠다.
이 점이 오히려 bio:cap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방문객 수로 성과를 과시하는 행사가 아니라, 누가 왔는지,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그 대화가 실제 PoC(기술검증), 투자, 임상협력, 유럽 시장 검증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보는 행사였다. 부스 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도 제대로 된 투자자나 병원 관계자, 제약사 사업개발 담당자 한 명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한 자리였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행사 구조였다. 낮에는 컨퍼런스, 피칭, 파트너링, 투자자 미팅이 진행되고, 저녁에는 전시자 파티와 네트워킹 이벤트가 이어졌다. 공식적인 미팅에서는 나누기 어려운 대화가 저녁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첫날 짧게 인사를 나눈 사람과 다음 날 다시 부스나 미팅룸에서 만나는 식의 연결도 가능했다. 바이오 분야 특성상 신뢰가 중요하고, 한 번의 피칭보다 여러 차례의 대화가 더 큰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구성은 상당히 실용적이었다.
bio:cap은 베를린에서 처음 열렸지만, 처음부터 지역 행사에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이 행사는 미국 보스턴의 바이오 생태계와도 연결되고, 실제로 미국 바이오 생태계 관계자들도 다수 참석했다. 유럽의 연구 역량, 독일의 임상·제조 기반, 미국식 투자·스케일업 문화가 한 공간에서 만나는 장면은 베를린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바이오 생태계를 키우려 하는지를 보여줬다.
#베를린의 숨겨진 매력 산업, 바이오
그동안 베를린은 핀테크, SaaS, 이커머스, 모빌리티, AI 스타트업 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반면 독일의 바이오·제약 중심지는 뮌헨, 하이델베르크, 라인-넥카 지역, 쾰른·뒤셀도르프 인근, 혹은 스위스 바젤과 연결된 독일 남서부 클러스터가 더 자주 언급됐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베를린은 샤리테 병원(Berlin Institute of Health at Charité), SAP 창업자인 하쏘 플라트너가 설립한 연구소(Hasso Plattner Institute), 헬스 클러스터인 막스 델브뤽 센터(Max Delbrück Center), 국가 보건 연구소 격인 로버트 코흐 연구소(Robert Koch Institute) 등 임상·연구·디지털 혁신 인프라가 결합되며 새로운 헬스케어 혁신 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이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름이 바로 헬스캐피탈 베를린-브란덴부르크(HealthCapital Berlin-Brandenburg)다. 헬스캐피탈은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를 하나의 헬스케어·라이프사이언스 클러스터로 묶는 지역 브랜드이자 네트워크다.
이 지역에는 바이오텍, 제약, 메드테크, 디지털헬스, 병원, 연구기관, 투자자, 공공기관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특히 베를린·브란덴부르크에는 바이엘(Bayer), 비브라운(B. Braun), 베를린케미(Berlin-Chemie), 바이오트로닉(Biotronik), 에커트 운트 치글러(Eckert & Ziegler), 화이자(Pfizer), 사노피(Sanofi), 다케다(Takeda), 써모 피셔 사이언티픽(Thermo Fisher Scientific)과 같은 글로벌 헬스케어·제약·메드테크 기업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 기업의 이름빨(!)은 중요하다. 베를린이 단지 창업가들이 모이는 자유로운 도시라는 이미지만 가진 것이 아니라, 실제 산업 파트너와 임상·연구 인프라, 글로벌 기업 네트워크를 함께 보유한 바이오헬스 클러스터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바이오·헬스케어 스타트업에게 유럽 진출은 단순히 현지 법인을 세우거나 전시회에 참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병원에서 검증받고, 규제기관의 기준을 통과하고, 제약사나 의료기기 기업과 협력하고, 투자자에게 장기적 성장 가능성을 설득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베를린·브란덴부르크의 헬스캐피탈 생태계는 한국 스타트업에게 매우 흥미로운 진입점이 될 수 있다.
#글로벌에 도전장 내민 5개사
올해 bio:cap에는 한국 바이오·헬스케어 스타트업들도 함께했다. 메디아이플러스, 메디허브, 아이넥스코퍼레이션, 나인바이오웨어, 마이크로트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기술 영역이 모두 다르지만, 공통점이 분명했다. 한국에서 개발한 의료·헬스케어 기술을 유럽의 임상, 투자, 제약·의료기기 산업 생태계와 연결하려 한다는 점이다.
메디아이플러스(MEDIAIPLUS)는 임상시험 준비와 CRO 선정, 임상 데이터 분석을 지원하는 AI 기반 플랫폼을 개발하는 기업이다. 바이오벤처나 제약사가 신약개발을 진행할 때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적절한 임상시험 전략을 세우고, 경쟁 임상 현황을 파악하며, 신뢰할 수 있는 CRO와 기관을 찾는 일이다.
메디아이플러스는 이러한 과정을 데이터와 AI로 효율화하려는 회사다. 특히 유럽은 국가별 의료 시스템, 규제, 임상기관 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에 임상시험 준비 과정에서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의 필요성이 크다. 현장에서 메디아이플러스는 바이엘, 노보노디스크와 같은 제약사, CRO, 바이오텍 관계자들과의 대화에서 임상개발 효율화라는 명확한 문제의식을 제시하며 관심을 받았다.
메디허브(MEDIHUB)는 환자의 통증을 줄이고 의료진의 시술 편의성을 높이는 스마트 주사·약물전달 의료기기 기업이다. 의료기기는 기술 자체도 중요하지만, 실제 의료 현장에서 쉽게 쓰이는지, 기존 워크플로를 방해하지 않는지, 환자 경험을 얼마나 개선하는지가 중요하다. 메디허브의 솔루션은 바로 이 지점에 초점을 맞춘다.
유럽 시장에서는 의료기기 인증, 유통 파트너, 병원 내 사용성 검증이 중요한 만큼, 메디허브는 행사장에서 의료기기 투자자, 유통 파트너, 임상 네트워크와의 연결 가능성을 모색했다. 환자 중심 의료와 의료진의 효율성을 동시에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장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특히 당뇨와 비만 치료제로 유명한 노보노디스크는 이틀 연속 부스를 방문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아이넥스코퍼레이션(Ainex Corporation)은 소화기 내시경 분야의 실시간 AI 진단 보조 솔루션을 개발하는 기업이다. 내시경은 이미 전 세계 병원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검사 방식이지만, 의료진의 숙련도와 판독 집중도에 따라 결과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
아이넥스코퍼레이션은 AI를 통해 위·대장 내시경 검사 과정에서 이상 부위를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의료진의 판단을 보조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유럽에서는 의료 AI가 병원 워크플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임상근거, 데이터 보호, 의료기기 규정, 기존 장비와의 연동성이 모두 중요하다. bio:cap은 아이넥스코퍼레이션이 이러한 사안을 유럽 병원, 투자자, 의료기기 생태계 관계자와 직접 논의할 수 있는 무대가 되었다. 현장에서 우연히 독일 대형 병원 체인 중 하나인 비반테스 클리닉과 연결되어 직접 베를린에 위치한 병원을 찾아가 의사에게 시연을 보여줄 기회도 갖게 되었다.
나인바이오웨어(NineBioWare)는 퇴행성 뇌질환의 조기 진단을 목표로 하는 혈액 기반 초고감도 진단 기술 기업이다. 알츠하이머병과 파킨슨병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은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유럽에서 매우 중요한 의료·사회적 과제다.
조기 진단이 가능해진다면 치료 개입 시점, 환자 관리, 임상시험 대상자 선별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나인바이오웨어는 아직 초기 단계 기업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bio:cap과 같은 행사에서 투자자, 연구기관, 제약사 초기 혁신팀과 만나는 것이 중요했다. 기술의 완성도만큼이나 어떤 질환 타깃을 우선할 것인지, 어떤 임상 파트너와 검증을 진행할지, 유럽에서 어떤 근거를 쌓을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였고, 현장에서는 이러한 방향성을 점검하는 대화가 이뤄졌다. 특히 샤리테 신경학과에서 나인바이오웨어의 솔루션을 매우 흥미롭게 관람하고 갔다.
마이크로트(Microt Inc.)는 녹내장 치료를 위한 최소침습 안과 임플란트, 즉 MIGS 분야의 의료기기 기업이다. 녹내장은 세계적으로 실명 원인 중 하나로 꼽히며, 고령화와 함께 치료 수요가 증가하는 질환이다. 기존 치료 방식은 약물 순응도, 수술 부담, 장기 관리 측면에서 여러 한계를 갖고 있다. 마이크로트는 보다 낮은 부담으로 녹내장 치료 접근성을 높이는 솔루션을 제시한다. 유럽 시장에서는 안과 전문의 네트워크, 임상 데이터, CE 인증 전략, 유통 파트너 확보가 핵심이다. bio:cap 현장에서 마이크로트는 안과 의료기기라는 명확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의료기기 투자자와 임상 파트너 후보들에게 구체적인 대화를 이끌어냈다. 특히 유럽 내 투자자들과 미팅할 기회를 얻어, 사업 확장을 위한 좋은 첫걸음이 되었다.
bio:cap에 한국 기업들의 참여가 의미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한국 스타트업이 유럽 행사에 참가했다”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각자의 기술을 유럽 시장에서 검증 가능한 언어로 설명하려 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이미 제품의 기술력이나 병원 도입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 익숙하더라도, 유럽에서는 질문이 조금 달라진다. 유럽에서 어떤 임상근거를 갖고 있는가. 의료기기 규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개인정보보호와 의료 데이터 거버넌스는 어떻게 설계되어 있는가. 보험수가나 병원 구매 구조 안에서 어떤 비즈니스 모델이 가능한가. PoC를 한다면 어떤 병원, 어떤 환자군, 어떤 지표로 검증할 것인가.
bio:cap은 이러한 질문을 피할 수 없는 자리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한국 스타트업에게 유익했다. 해외 전시회 참가의 실패는 종종 “많이 알렸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에서 온다. 그러나 bio:cap처럼 전문성이 높은 행사에서는 불특정 다수에게 홍보하는 것보다, 적은 수의 관계자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큰 성과가 될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은 현장에서 투자자, 병원, 제약사, 연구기관 관계자들과 만나며 유럽 진출의 다음 단계를 구체화하려 했다. 특히 PoC와 투자 기회를 함께 발굴하려는 접근은 유럽 시장 진입에서 매우 현실적인 전략이다.
유럽 바이오·헬스케어 시장은 기회가 큰 만큼 진입 장벽도 높다. 의료기기라면 CE 인증과 임상평가가 필요하고, 디지털헬스나 의료 AI라면 데이터 보호와 알고리즘 검증, 병원 도입 절차가 중요하다. 바이오 진단이나 임상시험 플랫폼이라면 제약사와 CRO, 병원, 연구기관 사이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한국 기업에게는 기술력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현지 파트너, 임상근거, 규제 전략, 투자자 설득 논리가 함께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bio:cap은 한국 스타트업에게 좋은 테스트베드였다. 베를린이라는 도시는 아직 전통적인 의미의 독일 최대 바이오 생산 클러스터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AI와 디지털헬스, 임상연구, 정책, 투자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데서는 매우 강력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강력한 병원 인프라, 베를린 보건연구소의 전환의학 관점, 하쏘 플라트너 연구소의 디지털 역량, 그리고 헬스 캐피탈을 중심으로 한 산업·연구·정책 네트워크는 베를린만의 조합이다. 여기에 글로벌 제약사, 미국과 유럽의 바이오 투자자, 독일 경제 미디어가 결합되면서 bio:cap은 단순한 신생 행사를 넘어 향후 유럽 바이오 생태계에서 중요한 네트워킹 플랫폼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줬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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