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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왱알앵알] ‘조혜연 vs 젠(ZEN)’ 뒤늦은 관전기

2016.08.10(Wed) 16:10:49

130여 년 전 청나라의 황쭌센은 <조선책략>이란 책을 썼다. 국사를 열심히 공부한 ‘역덕’이라면 알겠지만 내용의 핵심 중 하나는 ‘러시아를 멀리하라’였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조선책략>이 등장하나 싶겠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엉뚱하게도 바둑이다. 러시아를 싫어하게 된 바둑 이야기다. 

   
▲ 'ZEN'과 대국하고 있는 조혜연 9단의 모습. 출처=조혜연 9단 페이스북

지난 7월 28일 새벽 1시 머나먼 ‘불곰국’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바둑행사가 열렸다. ‘유럽바둑콩그레스’(EGC). 흥미로운 이벤트 하나가 더해졌다. 바로 한국의 프로기사 조혜연 9단과 젠(ZEN)이라는 이름의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과의 대결이다. 개인적으로는 조 9단과 소소한 친분이 있던 사이라 더욱 관심이 갔다.

사실 조 9단은(조 9단이란 표현도 어색하다) 메신저에서는 바둑 이야기는 전혀 안 하고 만화 이야기를 자주 하고, 만나서는 빙수 먹으며 우스갯소리를 하던 사람이다. 일견 평범해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저 머나먼 러시아 원정을 떠나 ‘한일전’을 치르고 온다니. 학창 시절 평범했던 옆자리 단짝이 류준열이고 스타가 됐다는 이야기처럼 현실에서 2센티 정도 괴리된 것처럼 느껴졌다. 

현실과의 괴리와 별개로 아는 사람이 바둑을 두는데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쓰나미 수준의 알파고 충격 이후 다시 펼쳐지는 프로기사와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대결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보도가 쏟아지고 관심이 집중되던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자.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은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파였는가. 당장이라도 싱귤래리티(특이점)가 오리라는 의견으로 공포감마저 조성됐다. 심지어 정부가 나서 한국형 알파고를 만든다고도 했다. 인공지능과의 대결 외에도 일본 프로그램인 젠과 한국 바둑기사의 한일전 대결이라는 점도 주목도를 높이는 요소로 보였다.

하지만 바둑 대결의 룰은 영 시원찮았다. 2점 접바둑인 데다 시간제한도 짧아 인간 바둑기사에게 불리한 요소가 많았다. 더군다나 젠은 처음 대결할 상대를 젠6라고 했다가 19A로 바뀌더니, 그다음 젠19X로 바꿨다. 자꾸 자신들 유리한 대로 판을 바꿔 나가는 젠이 미워지며 ‘인공지능 망해라’를 절로 외치게 됐다(나중에 조 9단은 인공지능을 미워하지 말라며 ‘나쁜 건 일본이지 인공지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일전 하면 일단 눈이 뒤집히는 병을 소유한 대부분의 한국인처럼 나 또한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나봐’였다. 

개인으로도 관심이 많이 가는 대국인 데다 독자들에게도 흥미를 끌 수 있을 것 같아 조 9단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용은 대략 ‘각오나 계획 등을 써보실 생각 있으신가’였다. 조 9단에게 문자가 왔다. 역시 요약하면 ‘급하게 써서 보낸다’였다. 보통 급하게 써서 보내면 양이 적거나 문장이 두서없거나 둘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높은데 기묘하게도 둘 다 아니었다. 내용도 생각보다 훨씬 많았고(12포인트 A4 7장 분량이었다), 글도 매끄럽게 잘 썼다.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조혜연 9단. 출처=조혜연 9단 페이스북

범상치 않은 일을 찾아보는 게 기자의 본분이다. 구글에 검색하니 나무위키에 잘 정리된 내용이 있었다. 나무위키의 설명 한 토막. ‘프로 입단이 바둑기사 통틀어 조훈현, 이창호 9단에 이은 최연소 3위’, ‘공부도 잘해서 고려대 영문학과에 진학, 대학생활과 바둑을 병행. 프로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9단까지 따면서 은퇴(라고 되어 있지만 이 점은 틀렸다. 조 9단은 은퇴하지 않았다. 정정이 필요한 대목이다). 현재는 바둑책 저술, 고전 사활서를 영어로 번역, 언론대학원 공부.’ 범상치 않은 일에는 역시 이유가 있었다.

시간은 흘러 대국시간인 새벽1시가 됐다. 바둑이란 경기를 보기에 최적의 시간은 아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방송을 보는데 생전 처음 보는 장면이 등장했다. 조 9단이 한 수 두고 자신이 직접 영어로 중계하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바둑에서는 무척 불리한 또 하나의 룰이 됐다. 흔히 ‘주최 측의 농간이다’란 말이 이렇게 적합한 경기가 또 있을까. 말 그대로 근본도 없는 행사였다. 그 순간 문뜩 <조선책략>이 떠올랐다. ‘러시아를 멀리하라.’ 황쭌센의 130년 전 조언은 이 순간을 예견한 것인가.

그럼에도 경기는 계속 진행됐다. 한 수를 둔 뒤 조 9단이 영어로 자신의 수를 해설하고, 젠의 수를 예견했다. 사실 바둑이라고는 <히카루의 바둑>을 본 게 전부인 ‘바알못(바둑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다 ‘영알못(영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보기엔 바둑과 영어해설은 좋지 못한 조합이었지만 팬심으로 응원하며 봤다. 속기임에도 새벽 3시쯤 돼서 경기가 끝났다. 경기는 조 9단의 1집반 패. 2점 접바둑인 데다 최악의 룰 아래에서 거둬낸 결과였다. 전형적인 말이지만 ‘졌지만 잘 싸웠다’. 

   
▲ 러시아에서 지도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 출처=조혜연 9단 페이스북

나의 아쉬움과 달리 조 9단은 경기가 끝나고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경기 전 제정신 아닌 수들이 머릿속을 헤집는 상상력의 향연을 즐겼지만 실전에서는 지극히 나답게 두고 말았다”, “완패당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로선 시종일관 단 한 번의 엎어치기를 노렸다. 패자는 유구무언이지만, 그 단 한 번의 찬스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심으로, 젠과 대국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내용이었다. 하긴 승패를 떠나 ‘백만 달러를 구해서 알파고에게 도전하고 싶다’고 했던 조 9단이기 때문에 당연히 만족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러시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컵라면만 먹고 있다는 조 9단. 한국에 돌아오면 이번엔 차가운 빙수 대신 같이 고기를 먹기로 했다. 화로 앞에 앉아 고기를 굽다보면 마음속에 남아 있는 러시아의 차가운 기운도 모두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그녀를 위해 또 다른 우스갯소리를 준비해야겠다.

김태현 기자 toyo@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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