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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정두언 참회록2] 온갖 반대 극복, 청계천 복원 프로젝트

이명박 “정부의 승인이 가장 어려웠다”

2016.09.29(Thu) 17:46:20

‘서울시장 이명박’을 상징하는 프로젝트는 청계천 복원과 교통개혁이다. 이명박은 취임 1년 안에 이 두 사업을 착수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취임 직후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매주 토요일은 청계천 복원 추진 회의, 매주 일요일은 교통개혁 추진 회의를 했다. 회의는 보통 오전 8시에 열렸는데 대개 2~3시간이 걸렸다. 이명박에게는 토요일, 일요일이 없었다. 말 그대로 ‘월화수목금금금’이었다. 

 

그는 천성이 부지런하고 잠이 없었다. 늘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서울시장이 되자 처음에는 오전 9시에 간부회의를 시작했는데, 이후 오전 8시로 당겨지더니, 나중에는 오전 7시 30분으로 당기려고 했다. 이대로 놔두면 결국 회의시간이 7시가 될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내가 나섰다. “모두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주말 아침 회의까지 8시 이전으로 당기면  너무 힘들다. 일에 역효과가 난다”며 ‘8시 회의’를 지키자고 했다. 결국 이명박도 고집을 꺾었다.

 

청계천 복원 공사 현장을 방문한 이명박 시장. 사진=한나라당 제공


청계천 회의, 교통개혁 회의는 이후 1년 동안 단 한 번도 거른 적 없이 진행되었다. 이명박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서울시장 단임’을 약속했다. 향후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것을 공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간이 별로 없었다. 서울시장 시절에 확실한 성과를 내야 하니 서둘러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 추진력은 세밀함에서 나온다

 

그러나 서두른다고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맞는 치밀함이 필요하다. 다행히 이명박은 그것을 갖고 있었다. 이명박은 ‘불도저’, ‘황소’로 알려져 있다. 추진력이 강하다는 데서 붙여진 별명이다. 사람들은 보통 ‘추진력’ 하면 눈을 부라리며 나를 따르라는 식의 스타일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소리만 요란할 뿐 추진력이 나오지 않는다. 이명박은 알려진 것과 달리 마이크로 매니지먼트(Micro Management)다. 신중하고 세밀하게 일을 처리한다. 

 

나는 이명박과 일하면서 추진력은 오히려 세밀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명박은 회의를 할 때면 큰 이슈부터 작은 이슈까지 모두 회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그 자리에서 일일이 결정을 했다. 예를 들어, 교통개혁을 할 때는 버스의 색깔, 로고, 크기, 번호까지 시장이 참석한 회의에서 결정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정하면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시장이 정했으니 군말이 없고 즉시 실행에 옮겨진다. 반면 일의 방향만 정해주고 구체적인 것은 알아서 하라고 맡기면, 그 실행 과정에서 갑론을박이 일어나고 책임 소재를 따지다 보면 일이 더딜 수밖에 없다. 

 

 

# ‘청계천’의 훌륭함: 결과물이 아니라, 온갖 반대를 극복한 그 과정

 

사람들은 청계천을 훌륭하다고 얘기한다. 맞다. 눈에 보이는 청계천은 훌륭하다. 흉물로 전락한 고가도로를 걷어내 맑은 물이 흐르는 청계천을 복원한 것만으로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정말 훌륭한 점은 온갖 반대를 극복하고 청계천을 복원한 그 과정이다. 반대 중 제일 컸던 것은 청계천 주변에서 생업을 영위하던 상인들의 반대였다. 

 

청계천 복원 당시에는 주변 상인들의 반대도 컸다. 사진=서울시시설관리공단 홈페이지


더구나 청계천 복원은 서울시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부가 승인(구체적으로는 경찰청의 교통 통제)을 해줘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당시 대통령은 노무현이었는데 야당의 유력 대선 후보가 될 수 있는 사람을 키워주려고 했겠는가. 이처럼 상인과 정부라는 엄청난 장애와 난관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복원을 했다는 점이야말로 정말로 평가받아야 한다. 

 

청계천 상인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이명박의 집요함이 제일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서울시는 청계천 상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그들을 무려 4200여 회나 만났다. 이것은 서울시 주장이 아니라 청계천 상인들이 스스로 만든 자료에서 밝힌 것이다. 그 전에 나는 ‘청계천 복원, 몇 가지 오해’라는 제목으로 2002년 8월19일자 <조선일보>에 기고문을 썼다. 청계천 상인단체의 지도부가 소속 상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스스로 이 기사를 복사해 대량으로 뿌렸다. 서울시가 할 일을 상인단체가 대신 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서울시에서 근무한다고 하면 누구나 먼저 묻는 것이 청계천 복원 문제다. 그만큼 이 문제는 수많은 서울시정(市政) 중에서 단연 으뜸가는 이슈가 됐다. 일찍이 서울시장 선거 공약이 이처럼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적은 없었던 것 같다.그런데 일종의 유명세라고나 할까. 그만큼 관심이 많다 보니 오해도 많은 것 같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몇 가지만 들어 보겠다. 먼저 청계천은 복원 계획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 대대적인 보수계획이 확정돼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청계천은 전임 시장 시절 그 안전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자(미군들은 오래 전부터 청계천의 차량 진입을 통제하고 있음), 1000억원 정도의 예산을 들여 2년10개월에 걸친 전면적인 보수공사를 실시하기로 돼 있었다. 여기서 전면적이라 함은 고가도로나 복개도로의 상판뿐 아니라 교각까지 리노베이션(renovation)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부수고 다시 짓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여기에 비해 청계천을 복원하는 것은 오히려 공사기간이 짧고(2년 정도로 예상) 공사 자체도 더 쉽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안전도 문제 때문에 보수를 한다고 하면 예상되는 불편과 주변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반대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아니 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오히려 공기(工期)가 더 짧은 복원공사를 한다는데, 교통이 마비된다느니 주변 상권이 죽는다느니 하며 마치 무모한 공사를 강행하는 것처럼 오해를 하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둘째, 청계천을 복원한다니까 주변 상가를 일부 허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복원공사는 최소한 양쪽으로 2차로를 남겨두고 높게 가림막을 친 채 진행되기 때문에 주변 상가는 건드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 물론 영업활동을 하는 데는 지금보다 더 불편하겠지만, 거기에 대해서도 충분히 대비책을 마련하고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셋째,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 복원공사에 마치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고가와 복개도로를 걷어내고 난 후, 고기가 뛰놀 수 있는 맑은 물이 흐르게 하고, 그 양쪽으로 아름다운 걷는 거리와 함께 2차선 이상의 도로를 내는 데 드는 비용은 3600억원 내외가 소요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조원 이상이 소요된다는 얘기는 아마 주변의 재개발 비용을 두고 하는 말 같은데, 재개발은 주변의 민간 상권이 스스로 알아서 추진하는 것이지 시가 예산을 들여서 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재개발이 진행될 경우 수십만명의 고용창출 등 수십조원의 경제유발 효과가 예상된다.

 

마지막으로 청계천 복원문제는 선거과정에서 졸속으로 제기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청계천살리기연구회 등 청계천을 사랑하는 많은 학자·전문가들과 함께 오랜 기간 준비해온 사업이다. 때문에 교통문제, 주변 상권문제, 기술공학적인 문제, 생태환경적인 문제, 물을 공급하는 문제, 그리고 역사성 문제 등에 관한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져 있다. 더구나 앞으로 2년여에 걸친 사전 검토와 준비를 더함으로써 문제점을 최소화할 계획이다. 청계천 복원은 시민의 안전과 환경, 그리고 역사와 경제를 살리는 일로서 우리 세대가 천년을 내다보고 해내야 할 필수 사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궁극적으로 상인 문제를 풀어낼 수 있었던 데에는 청계천 상인들의 이주 대책으로 만든 ‘가든파이브’의 힘도 컸다. 상인들은 강남 쪽에 세워지는 대형 쇼핑몰로 가는 것에 큰 매력을 가졌다. 이처럼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해관계로 설득 당하지, 명분으로 설득 당하지 않는다. 일종의 당근으로 추진된 가든파이브는 나중에 SH공사에 상당한 부채를 떠안겼다. 만약 이명박의 후임이 오세훈 시장이 아니라 다른 당 소속이었다면 가든파이브 문제가 크게 불거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상인들의 설득 막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런 대가가 지불된 것이다.

 

상인 문제를 풀어낼 수 있었던 데에는 청계천 상인들의 이주 대책으로 만든 ‘가든파이브’의 힘도 컸다. 사진=비즈한국DB


이명박 서울시의 3기 정무부시장을 지낸 정태근은 이명박으로부터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청계천 프로젝트에 대해 노무현 정부가 협조하기로 결정하는 장면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무회의 참석자들에게 청계천 복원과 관련해 의견을 물었다. 초반에는 협조를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국무위원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그런데 중간쯤 왔을 때 노무현 대통령의 표정이 바뀌는 듯했다. 끝에서 세 번째로 앉아 있던 김화중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대통령의 표정 변화를 눈치챘는지 ‘복원에 협조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협조하는 것으로 합시다’하며 최종 결론을 냈다.”

 

 

# 이명박,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 등 만나 도움 청해

 

국무회의가 있기 얼마 전 이명박은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을 만났다. 함께 골프를 치며 청계천 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유인태는 청계천 복원에 호의적이었다. 이후 그는 노무현에게 “청계천을 복원하도록 돕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세상에는 그냥 이루어지는 일이 없는 것 같다. 이명박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만나 청계천 사업의 당위성과 효과를 설명하며 사업 성사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대권을 바라보는 그의 입장에서 ‘청계천’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대권의 문을 열 수 있느냐 없느냐가 거기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다른 이유로 청계천 복원 사업에 협조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경찰청, 국정원 등 정보기관으로부터 ‘청계천 프로젝트는 성공할 수 없다’는 보고가 계속 올라갔다고 들었다. 노무현은 어차피 실패할 것인데 굳이 내가 막아 그 책임을 떠맡을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태근은 “이명박이 당시 그 일을 겪으며 정치가 이래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의 소통, 여의도 정치권과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인식 등을 새로이 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었다. 

 

복원 공사가 끝나고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에 참석한 이명박 시장과 노무현 대통령 내외. 사진=청와대 제공


현대건설에서 일하면서 건설 프로젝트 추진에 상당한 경험과 노하우가 있는 이명박의 역량은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그것은 평생 공직에만 있었던 공무원들이 보기에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신선한 리더십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이다. 청계천 공사와 관련해 실무 책임을 진 공무원들은 ‘모든 공정을 도저히 2년 내에 끝낼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이명박은 한마디로 정리했다.

 

‘공사를 꼭 일렬로, 차례로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나. 구간을 몇 개로 나누어 동시에 진행하라. 정확히 설계 하고 감독을 철저히 하면 한 업체가 공사한 것과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구간을 나눠 동시에 공사에 들어가면 완공 기간을 나눈 만큼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무원들로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이었다. 이후 청계천 공사는 세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됐다. 재미있는 점은 역시 이명박이 회장을 지낸 현대건설이 맡은 공사구간이 다른 구간보다 압도적으로 일찍 마무리되었다는 것이다. 

 

 

# 청계천 완공까지는 운도 많이 따라

 

청계천이 완공되기까지는 운도 굉장히 작용했다. 우선, 인명 사고가 하나도 없었다. 만약 인명 사고가 있었다면 이를 빌미로 노무현 정부가 중단시켰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청계천’이 각광을 받으면서 노무현 정부로서는 대놓고 반대하기도, 그렇다고 찬성하기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착공 초창기에 인사 사고가 한 번 있기는 했다. 삼일고가 쪽에서부터 철거를 시작했는데, 공사 중에 콘크리트 덩어리가 떨어지면서 그 아래 서있던 승용차의 보닛을 쳤다. 많이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차에 타고 있던 두 사람이 부상을 당해 인근 백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제대로 치료도 받지 않고 그냥 사라져버린 것이다. 정상적인 남녀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는 말이 오갔다. 어쨌든 청계천 복원 공사 중 일어난 인명 사고는 이것이 전부였다. 진짜 인명 사고는 복원한 청계천을 일반에게 공개하는 날 일어났다. 구경하던 사람이 추락해 사망한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공사가 마무리된 이후라는 점에서 보면 천우신조였다. 

 

청계천이 복원되기까지는 이른바 ‘동남풍 사건’도 있었다. 어느 날 청계천 복원에 반대하는 극렬 반대파들(주로 황학동 노점상들)이  일전을 벌인다며 폐타이어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시위를 벌였다. 대치한 경찰은 안전문제에 대한 책임 때문에 이들을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다. 이명박의 참모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경찰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되는 것을 염려했다. 

 

시위대는 드디어 폐타이어에 불을 질렀다. 매캐한 냄새와 함께 솟아 오른 검은 연기가 서울시청 뒤 프레스센터 옥상에서 보일 정도로 하늘을 뒤덮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소위 동남풍이 불면서 연기가 시위대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시위대가 흩어지면서, 정상적인 시위가 이어질 수가 없었다. 믿거나 말거나, ‘동남풍 사건’은 정말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청계천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국민들의 지지였다. 그리고 그 압권은 청계천 걷기 대회였다. 공사에 들어가기 위한 교통 통제 승인 문제를 놓고 서울시가 정부와 한창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2005년 가을 무렵이었다. 승인권자는 겉으로는 경찰청장이었지만 사실상 노무현 대통령이 갖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명박 시장은 청계천 프로젝트를 현실화시키기 위한 마지막 위닝샷으로 이 청계천 걷기 대회를 기획했다. 치밀한 계산이라기보다는 번쩍이는 아이디어로 내놓은 이벤트였다. 

 

그런데 전날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행사 당일 아침까지 그치지 않았다. 나도 밤새 잠을 못 이루며,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행사 날 아침, 다들 행사를 치르기 어렵겠다며 낙심해 있는데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행사 시작 1시간 전이었다. 게다가 밤새 비가 왔음에도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걷기 대회는 성황리에 끝났다. 완전 대성공이었다. 다음날 모든 신문의 1면에 관련 사진이 실렸다. 그런데 사진보다도 사진 제목이 의미심장했다. ‘마지막 청계천’이었다. 이 사진 제목은 청계천 복원 사업을 결정적으로 기정사실화시켜 주었다. ‘아, 이제 청계천 고가가 사라지는구나’하는 생각을 대세로 굳히는 결정적인 이벤트였다. 

 

복원 완료를 일주일 앞둔 2005년 9월 25일 시민들이 청계천에 나와 걷고 있다.


<한겨레>가 적극적으로 ‘청계천 프로젝트’를 찬성했던 것도 큰 힘이 됐다. <한겨레>는 서울시장 선거를 치르기 전에 청계천을 복원해야 한다는 시리즈를 6개월 정도 연재한 적이 있다. <한겨레>는 왜 청계천 복원을 찬성했을까? 청계천 복원이나 교통개혁은 우파 정책과는 거리가 있다. 환경친화적이며, 준공영제적인 사업이기 때문에 오히려 전형적인 좌파적 정책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명박이 이 좌파정책을 추진하고, 성공시켰다. 이명박은 국민을 위하는 것이면 좌우를 가릴 필요가 없다는 실용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이명박은 굉장히 탈권위적이고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어떤 때는 슬리퍼 차림에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보고를 하면서, “그건 안 됩니다”라고 스스럼없이 이의를 제기해도 되는 상관이었다. 그래도 서로 아무 불편함이 없었다. 청계천과 교통개혁 프로젝트는 이런 문화 속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청계천 복원을 위한 착공식이 끝난 날 나는 이명박과 서울시장실에 마주 앉았다.

 

정두언 : 시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명박 : 나도 이것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

정두언 : 무엇이 제일 어려웠다고 생각하세요?

이명박 : 정부의 승인이지.

정두언 : 시장님은 청계천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까?

이명박 : 나도 확신하지는 못했어. 하지만 나라도 확신하고 있는 척해야지. 내가 불안해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나. 

 

2005년 8월, 청계천이 조기 완공된 이후 이명박은 사전 개장을 했다. 유력 인사들을 불러다가 미리 보여주며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이벤트였다. 이름이 ‘청계천 프리투어 사업’이었다. 이명박 대권 플랜은 순풍에 돛을 달았다.

정두언 전 국회의원 bizhk@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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