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기업의 CI 변경은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개발 후 10년, 심지어 5년도 안 되어 전면 교체하는 기업이 있는가 하면 한번 정착된 CI를 웬만해선 바꾸지 않는 기업도 있다. 각 사례를 몇 가지로 간단히 분류하기는 어렵지만, 소비자 신뢰를 중시하고 보수적 색채가 짙은 기업일수록 후자에 속하는 경향이 있다. 50여 년간 기업 상징을 바꾸지 않았던 제약사 종근당은 지난 5월 서울 충정로 본사에서 제84회 창립기념식을 갖고 새로운 CI를 공개했다.

종근당의 기존 상징은 한글 ‘종’자를 종(鍾)의 형상으로 표현한 심벌과 붓글씨 로고타입이다. 1960년 도입된 종 모양 심벌은 대단히 모던하고 직관적이다. 반면 로고타입 ‘종근당’은 서예가인 일중 김충현의 일중체를 활용하여 고전적으로 느껴졌다. 종근당은 이번에 종 모양 심벌은 유지하되 로고타입을 새로 개발한 ‘종근당 미래체’로 바꾸었다. 가로세로 획 두께의 차이가 큰 것이 특징인 종근당 미래체는 고딕의 뼈대에 굴림을 가미한 형태다. 영문 기업명 ‘ChongKunDang’은 ‘CKD’로 축약됐다.
1970년대까지 한국 기업 로고타입의 주류는 붓글씨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원시적인 붓글씨 로고타입이 지닌 문제는 외곽선이 비정형적이라 대량복제가 어렵다는 점이다. 현장 작업자의 제작 과정에서 디자인이 왜곡될 확률이 높아지고 확장성이 떨어진다. 그러다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래픽 디자이너 그룹이 규칙을 세워 자와 컴퍼스, 운형자로 작도한 결과물을 도입했다. 컴퓨터 작업이 대세가 된 90년대 이후엔 뚜렷한 주류는 없지만 한글 버전을 없애고 영문으로만 만든 로고타입이 상당히 늘어났다.
종근당 미래체의 도입은 동떨어져 있던 심벌과 로고타입 간의 시각적 거리를 좁히고 종근당건강·종근당바이오·종근당홀딩스 등 다른 문자열의 파생이 쉬워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반면 현 시점에 쓰기에 여전히 올드하다는 한계도 있다. 한글을 상하 길이보다 좌우가 넓은 네모틀에 맞추고 부분적인 굴림을 적용한 디자인은 한글 폰트 ‘그래픽체’를 생각나게 한다. 변하긴 변했는데 그 속도가 한 템포 늦다. 1970년대에서 80년대로 점프한 셈이다.

이런 접근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개선을 원한다면 두 가지 방향을 상상해볼 수 있다. 하나는 현대적인 고딕으로 만드는 방향이다. 종 심벌은 이미 고딕에 가까운 모양을 갖고 있다. 여기에 룩을 맞추어 글자틀을 좌우보다 상하 길이가 긴 장체로 설정하기만 해도 올드한 느낌은 많이 완화된다. ㅈ,ㅗ,ㅇ 같은 개별 자소도 네모틀 안에 너무 꽉 채우지 말고 약간의 여유를 주는 것이 좋다. 다른 하나는 원래 쓰던 일중체를 부분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이다. 붓글씨가 원시적이라고는 하나 업계에서 붓글씨 로고타입이 거의 사라진 상황에서 오히려 기업 뿌리를 강조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자유곡선에 가까운 비정형의 라인을 규칙성을 갖도록 다듬는 작업은 이뤄져야 한다.
트렌드에 따라 계속 바뀌는 CI가 범람하는 세상 속에서 종근당의 케이스는 역으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브랜드 디자인을 공부하거나 현업에 종사하는 입장이라면 CI 관련하여 방향을 정해 토론하거나 리디자인물을 만들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 한동훈은?
서체 디자이너.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현재 서체 스튜디오 얼라인타입에서 다양한 기업 전용폰트와 일반 판매용 폰트를 디자인한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등에 기고했으며 온·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서체 디자인 강의를 진행한다. 2021년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한동훈 서체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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