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정부의 반도체 산업 육성 전략이 ‘수도권 집적’에서 ‘지산지소(地産地消·전력을 생산한 지역에서 소비함)’로 급선회하고 있다. 지난 10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보고회’ 이후, 반도체 업계와 관가에서는 사실상 용인 클러스터 중심의 일극 체제에 제동이 걸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력 수급의 물리적 한계와 송전망 건설의 난항이 확인되면서, 전기가 있는 곳으로 공장을 옮기는 새로운 산업 지형도가 그려질지 주목된다.
시민사회에서는 전력 수급 계획의 비현실성과 지역 불평등을 지적하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면 재검토와 지역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맞서 인력 수급 문제와 이미 용인과 인근에 들어선 반도체 시설의 집적 효과를 위해 원래 계획대로 진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용산 대통령실에서 10일 열린 ‘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보고회’에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 수급 계획이 언급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필요한 전기는 원자력발전소 10개 이상의 전력”이라며 “송전망 구축도 쉽지 않고 근처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송전이 가능한지”라고 질문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필요 전력 상당 부분은 다른 지역에서 송전망을 통해 끌어와야 하는 상황이다. 정부는 2030년까지의 초기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동서·남부·서부발전이 총 3GW 규모의 LNG 발전소 6기를 건설할 예정이다. 이를 포함해 4.5GW가 클러스터 내에서 건설될 예정이지만, 10GW 이상의 나머지 전력은 호남과 동해안으로부터 대규모 송전선로 건설을 통해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전력 수급 계획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유제국 국회입법조사처 산업자원농수산팀장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 공급 리스크 진단’ 보고서에서 반도체 클러스터가 요구하는 전력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을지 물리적 가능성부터 따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용인 클러스터의 면적당 전력 공급 밀도가 서울의 32배에 달한다며, 좁은 지역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변전소 집중 설치와 송배전망의 이중화·지하화가 필수적인데 이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한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장거리 송전의 불안정성도 지적됐다. 반도체 산업은 양질의 전기로 설비를 가동할 때 수율이 높다. 고품질 전기는 전압과 주파수가 일정하게 유지돼야 하며, 정전 없는 전기 공급이 필요하다. 반도체 제조 시설인 팹은 1분의 정전만으로도 수십억 원의 피해를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장거리 송전과 수도권 중앙집중식 전력 시스템은 전압 안정도를 떨어뜨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송 한계량이 설정되면 장거리 송전망은 그 규모에 비해 제한적인 전력만 송전하면서 비용 낭비가 커진다. 또한 동해안 전력을 연결하기 위해 계획된 초고압 직류망(HVDC)은 고장 시 복구 시간이 길고, 기존 교류 선로와의 상호 간섭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변호사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전압 안정도와 전력 계통의 복잡성 문제로 전력의 안정적 공급이 가능하지 않다”며 “특정 기업을 위해 큰 사회·경제적 비용이 들어가는 현 전력 수급 계획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시민사회는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고 지역 불균형 해소에도 기여할 수 있는 비수도권으로 반도체 클러스터를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충남·전북 지역에 송전선로 건설에 따른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정현 송전탑건설백지화 전북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은 “국민의 희생을 통해 기업이 성장해왔는데, RE100 실천을 위해서라도 재생에너지가 있는 지역으로 이전해야 한다”며 “지역에서도 기업에 맞춰 삶의 질을 높일 방안을 찾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인력 수급과 반도체 클러스터의 집적 효과를 고려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본래 계획대로 진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반도체 인력의 수도권 선호 현상을 고려할 때 용인 입지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 용인과 인근에 반도체 설비가 있어 집적 효과 증대를 위해서라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유지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기업이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수도권에 있는 이유는 인재들 때문”이라며 “계획된 전력과 용수 공급 계획에 따라 적극적인 추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보고회에서 ‘지산지소’ 원칙을 강조하며 균형 발전을 위해 앞으로 반도체 생산 시설을 지역에 구축해 줄 것을 강조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제 송전 비용을 전기요금에 부담하는 송전 거리 비례 요금제를 피할 수 없다”며 “반도체 생산비에 송전 비용이 포함될 수도 있고, 균형 발전을 위해서도 가급적 지역에서 (반도체 생산 시설을) 구축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호현 2차관도 “앞으로는 새로운 반도체 클러스터나 국가첨단전략산업처럼 전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곳은 지방이나 전력이 풍부한 곳에 입지하는 것이 국가 균형 발전 차원에서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지역 반도체 기업은 지역 투자 확대를 위해 정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광주에 위치한 반도체 패키징 기업 엠코테크놀로지코리아의 이진안 대표이사는 보고회에서 “해외 고객은 RE100 실천을 위해 신재생에너지 직접 사용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지만, 부족한 공급과 비용 문제로 경쟁력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며 “태양광 보조금 확대, 전력구매계약(PPA) 중재, 망 이용료 면제 등의 지원이 확대된다면 국내 반도체 기업이 지방 성장 거점이 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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