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선거철만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골 공약이 있다. 바로 ‘기업 규제 철폐’다. 규제를 풀어야 기업이 숨 쉬고, 경제가 살아난다는 주장이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규제가 그렇게 과도했다면, 대한민국이 지금처럼 빠른 시간 안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급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겪은 나라가 과연 다른 선진국에 비해 규제가 과도하기만 할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규제 공화국’으로 단정 짓는다. 그러나 한국의 전반적인 기업 환경은 세계은행의 기업환경평가나 세계경제포럼의 글로벌경쟁력지수에서 늘 상위권을 유지한다. 행정 효율성, 창업 용이성, 전자정부 수준은 매우 높다. 물론 노동시장, 산업별 인허가, 재벌 지배구조 등 일부 핵심 분야에서 규제가 강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노동시장 규제는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형성된 고용 안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결과다. 대량 실업 이후 ‘정규직 보호’가 최우선 가치로 자리 잡으면서 해고 요건이 까다로워졌고, 이는 다시 청년 고용 위축과 비정규직 양산으로 이어졌다. 이 규제는 단순한 제도라기보다 사회적 불안정에 대응해 만들어진 방어선이다.
산업별 인허가 규제는 의료, 금융, 교육 등 공공성이 강한 산업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망으로 작동해왔다. 하지만 규제 과정의 불투명성, 이익집단 보호를 위한 장치로 변질된 부분이 적지 않다. 전관예우, 면허권 장사 같은 비판이 반복되는 이유다.
재벌 규제는 고도성장기에 집중된 대기업 중심 경제 구조의 불공정성을 해소하려는 시도였다. 순환출자, 내부거래 등으로 지배력을 유지해온 구조에 대해 시민사회와 중소기업계가 공정한 경쟁을 요구했고, 공정거래법과 각종 감시 체계가 형성됐다. 요컨대 기업 억제책이 아니라 시장 질서 유지를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
이처럼 한국의 규제는 다수 영역에서 과도하다기보다는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선택적 규제다. 문제는 그것이 시대 변화와 산업 구조 변화에 따라 적절히 조정되느냐다.
일부 대선 후보가 강조하는 ‘규제 철폐’는 유권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단순하고 선명한 메시지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산업은 신뢰와 질서 위에서 자란다. 예측 가능하고 공정하며, 기술과 사회 흐름을 반영한 규제 혁신이 필요한 이유다. 규제 철폐는 늘 통용되는 해답이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시대에 맞는 규제로 설계를 전환하는 것이다.
오히려 신산업일수록 정교한 규제가 더 필요하다. 핀테크, 바이오, 인공지능, 자율주행 등 기술 발전이 빠른 영역일수록 그 기술이 사회와 어떻게 맞물리는지에 대한 기준과 가이드라인이 없다면, 오히려 산업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무너진다. 신뢰가 무너지면 자본도, 인재도, 소비자도 떠나게 된다. 규제는 산업의 성장을 막는 게 아니라 그 성장이 건강하게 이어지도록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한다.
기업에게도 중요한 것은 규제 철폐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규제 환경이다. 불합리한 규제를 줄이자는 요구와, 규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다르다. 규제가 있더라도 그것이 투명하고 일관되며 시대 흐름과 함께 변화한다면 기업은 기꺼이 그 안에서 경쟁할 수 있다. 오히려 규제가 전무하거나 일관성 없이 변경되는 시장이야말로 기업 활동을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규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재설계하는 것이다. 그것도 시대 변화에 맞춰, 산업별 특성과 사회적 신뢰를 고려한 체계적인 혁신이어야 한다. 규제의 목적은 억제가 아니라 조율이며, 통제보다 방향성을 제공해야 한다.
‘규제 철폐’는 당장 정치적 구호로는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의 이면에 숨어 있는 사회적 맥락과 역사적 경험을 무시한 채 단칼에 모든 규제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산업의 신뢰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규제는 산업의 적이 아니라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육성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핵심은 철폐가 아니라 설계이며, 양이 아니라 방향이다.
봉성창 기자
bong@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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