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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기업과 친일②] 두산·삼양·현대 ‘친일멍에’

박승직·김연수·현준호 일제 협력 대가로 부의 대물림

2016.08.13(Sat) 12:34:49

8·15 광복절이 올해로 71주년을 맞았다. 친일 기업인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들이 있다. 두산그룹 창업주 박승직, 삼양그룹 창업주 김연수, 현영원 전 현대상선 회장 아버지이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조부 호남 갑부 현준호가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일생을 호의호식하며 보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의 장래는 어둡다. 아픈 역사는 더욱 그렇다. <비즈한국>은 박승직, 김연수, 현준호의 기록을 남긴다.

박승직, 김연수, 현준호의 삶은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화신 이회영, 이시영 6형제의 삶과 완전히 상반된다. 6형제는 소값 1만 3000여 마리(현재 시세 650억여 원)에 달하는 전 재산을 팔아 그 돈으로 중국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이 됐다. 6형제 중 이회영을 비롯한 다섯 명은 옥사하거나 먹을 것이 없어 쓰레기통을 뒤지다 굶어 죽는 등 생전에 광복을 보지 못했다. 다섯째인 이시영만 해방후 귀국해 초대 부통령이 됐을 뿐이다. 

 

#원조 친일기업인, 두산 박승직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를 원조 친일기업인으로 꼽는다. 두산의 시작은 박승직이 1896년 서울 종로에 세운 ‘박승직 상점’이다. 

   
▲ 두산 창업주 일가 3대.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박승직, 박용곤, 박두병. 출처=두산

<친일인명사전> 등에 따르면 박승직은 안중근이 중국 하얼빈에서 암살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는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이자 위원으로 참여했다.

박승직은 친일단체 설립과 활동을 주도했다. 1919년 조선경제회 이사, 1921년 일선(日鮮) 기업의 융합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산업대회의 지방위원, 1922년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 1924년 동민회 평의원에 선임됐다. 박승직은 1938년 조선인 강제징용과 위안부 모집 등에 앞장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후에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편)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1938년 2월 2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는 ‘쌍수드러 축하’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박승직은 “조선인에게 지원병제도를 실시하게 된 것은 조선인의 의무. 내선인의 차별을 완전히 철폐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 <매일신보> 1938년 2월 2일자 ‘쌍수드러 축하’ 기사. 출처=한국언론진흥재단

그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12월 1만 원을 일본 해군에 헌납했고 그 이후에도 두 차례 더 헌납했다. 박승직의 딸 박영희와 결혼한 이인기와 그의 부친 이우정도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박승직이 창씨개명한 이름은 미키 쇼우쇼크(三木承稷)다. 1941년에는 사명을 아예 ‘미키상사’로 바꾸기까지 했다. 

두산그룹은 1996년 창립 100주년을 맞아 기업사를 발간했다. 창업주 박승직의 이러한 친일행각들이 기업사에 기록됐을까.

두산그룹 관계자는 “박승직 창업주의 일제 강점기 시절 활동은 자세하게 알 수 없다. <친일인명사전>에 게재된 내용들이 그룹이 발행한 기업사에는 적혀 있지 않고 적어야 할 의무도 없다. 창업주는 민족 자본 형성에 기여한 인물이다”고 말했다. 

 

#훗날 죄과 속죄, 삼양사 김연수

김연수는 인촌 김성수의 친동생이다. 1925년부터 경성방직 경영을 주도했다. 김연수는 경성방직을 비롯해 삼양사, 해동은행 등을 경영했고 일제의 만주 침략 후에는 만주까지 사업을 확장해 1939년 남만방적주식회사를 설립해 경영했다. 

김연수는 1939년 경성부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 194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직을 받았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경성방직을 기반으로 군수 산업에 뛰어들었고, 1944년 전쟁 지원을 위한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조선총독부 산하 각종 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다.

김연수는 1942년 1월~1943년 1월까지 <매일신보>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러한 친일공로로 조선총독부로터 네 차례나 포장을 받았다.

   
▲ 김연수 삼양그룹 창업주. 출처=삼양그룹

김연수는 광복 직후 반민특위로부터 친일파로 지목돼 조사를 받았으나 1949년 반민특위 재판에서 풀려났다.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비의책 15>에는 김연수가 검찰 앞에서 자신의 죄과를 순순히 시인하고 속죄했다고 적혀 있다. 

그는 이후 자신의 일대기인 <한국 근대기업의 선구자>를 통해 “설사 내가 지녔던 일제치하의 모든 공직이나 명예직이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고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런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국과 민족 앞에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통렬한 자기반성의 글을 실었다.

김연수는 1961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전신인 경제협의회 회장을 맡고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았다. 

삼양그룹 지주사인 삼양홀딩스 홈페이지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삼양그룹은 1924년 수당 김연수 회장이 산업보국 정신으로 삼양사를 창업한 이래 사업 초기부터 중용을 바탕으로 한 정도경영과 신뢰경영을 통해 꾸준히 내실을 다져왔습니다.” 

삼양그룹 관계자는 “김 창업주의 친일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일제가 서슬퍼런 강권을 휘두르던 시절이라 강압에 대항하기 어려웠다. 삼양사는 척박한 국내 산업 현실에서 공업을 선도했다. 1939년 한국 최초의 장학재단인 양영재단을 설립해 민족 교육사업에도 앞장섰다”고 말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2009년 6월 김연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고 그의 전북 고창군 땅 1만여 제곱미터를 국가에 귀속시키기로 결정하자, 후손 김 아무개 씨는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2013년 김연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본 것은 적법하다며 원고 패소 결정을 내렸다. 

 

#현정은 현대 회장 조부 현준호

호남 갑부 집안으로 일제에 협력하며 중추원 참의를 지낸 현기봉과 아들인 현준호는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인명사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두 사람은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기록돼 있다.

현준호는 1920년 8월 호남은행을 설립했다. 그는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된 시기를 전후로 한때 몸담았던 민족주의 진영과 결별했다. 

   
▲ 실업가 현준호.

중일전쟁 발발 후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시국강연반에 참여해 전쟁 지원을 역설함으로써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산하 시국대책조사위원회에도 조사위원으로 임명돼 참여했다. 이후 광복 전까지 징병제 홍보와 학병 지원 권유 등에 적극 가담했다. 

현준호는 광복 후 반민특위로부터 조사를 받았지만 특위가 해체되면서 처벌받지 않았다. 이후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게 피살되었다.

2012년 4월 서울고등법원은 현준호 유족이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결정처분취소 청구소송에서 현준호의 친일행위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현준호가 8년간 광주보호관찰심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 감시와 독립운동 의지를 꺾는 사상전향사업을 수행했다”며 그의 친일 행위를 인정했다.

김정훈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해 9월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국가에 귀속되었던 현준호의 토지 가운데 일부(3건, 8001제곱미터)는 후손들이 반환소송을 제기한 뒤 승소해 반환됐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친일행위 평가는 당대에 한정돼야 한다. 호남은행이 일본인 직원을 채용하지 않고 일본인에게 융자를 해주지 않아 강제 합병된 사실도 있다. 현준호는 자본을 형성해 막후에서 독립운동 비용을 지원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장익창 기자 sanbada@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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