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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노포열전] 빈대떡과 막걸리, 열차집

2016.09.13(Tue) 11:09:29

한때 서울 시내에서 한 잔 가볍게 마시기 좋은 집을 꼽으라면 빠지지 않는 곳이 열차집이었다. 열차처럼 길쭉한 내부를 가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 원래는 광화문 교보문고 옆 버거킹근처가 이 집의 시작이었다. 건물 추녀 밑으로 길게 이어진 임시 가게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기차집’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청진동으로 가게를 옮기면서 열차집이 되었다.

열차집의 역사는 인 아무개로부터 시작된다. 전쟁통에도 있었다고 하니 창업이 1950년이라는 말도 있고, 1954년이라고도 한다. 그 후 1976년에 현재의 우제은 여사 부부에게 인수되었고, 열차집의 역사가 이어진다.

빈대떡은 평양과 이북, 서울지역에서 고루 먹는 음식이었다. 녹두를 갈고 돼지기름에 부쳐내어 영양가도 높았다. 무엇보다 값이 싼 서민의 음식이자 술안주였다. 오죽하면 <빈대떡 신사>에서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먹지”라고 읊었을까. 열차집 빈대떡은 우리 현대사의 살아 있는 생활민속 음식이다.

“오랫동안 빈대떡을 부쳤지요. 이제 아들에게 물려주고 일주일에 격일로 나옵니다. 바쁠 때만 나오는 게지요. 남편(윤해순)도 이제 연세가 많아서 쉬어야 해요.”

빈대떡 판을 지켜왔던 우제은 씨의 말이다. 이제 그는 은퇴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어리굴젓을 올려 먹는 빈대떡. 개운하고 시원하고 매콤하다.

알려진 대로 피맛골이 헐려버리면서 우리 민중의 골목도 사라졌다. 고관들이 이용하는 대로 대신 골목으로 숨어든 민중들은 이곳에서 한잔 술과 음식으로 허기를 달랬다. 그렇게 살아남은 집들이 꽤 되었는데, 재개발로 흔적이 없이 사라졌다.

다행히도 열차집은 근처 공평동에 맞춤한 자리를 얻어서 이미 여러 해 동안 빈대떡을 부치고 있다. 단골들도 여전하고, 새로운 단골도 생기고 있다. 이 집 빈대떡의 특징은 어리굴젓을 올려 먹는다는 것이다. 개운하고 시원하며 매콤하다.

옛 단골과 관련해서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어느 오후, 한 노신사가 막걸리에 빈대떡 접시를 맛있게 비우고 직원을 불렀다. 그러고는 지갑을 열었다. “계산 좀 해주시게.” 직원은 익숙하게 만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몇 장을 꺼냈다. 그 노신사는 필자와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게 웃었다. 눈이 안보여 돈을 구별할 수 없는 정도인데도 열차집을 못 잊어 멀리 양평에서 찾아왔다고 한다. 한때 서울에서 오래 직장을 다녔다고 한다.

“내가 이 집 오십 년 단골이오. 늙어서 당췌 눈이 안 보여. 허허.”

열차집은 낮술이 제격이다. 막걸리 같은 순한 술이 잘 나간다. 전국의 명물 막걸리를 받아 팔고 있는데 아들 윤상건 씨(47)의 아이디어다. 그는 열차집의 2대 주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열차집에 들어서면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다. 옛 피맛골 자리, 열차집의 오래된 모습, 상건 씨가 누이와 함께 세발자전거를 타고 옛 광화문 뒤편에서 노는 장면 같은 사진이 붙어 있다. 열차집은 조선시대의 살아 있는 민중의 길 피맛골과 함께 해왔고, 그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열차집은 광화문에서 청진동, 공평동으로 터를 옮겼다. 자전거 타던 자리에 교보문고가 들어섰다.

“아이(상건 씨)가 자전거 타고 있는 그 건물 자리에 교보문고가 들어선 거예요. 상전벽해지요. 이 앞으로는 개천이 흘렀고-삼청동에서 발원한 개천인 중학천이 청계천으로 이어지는-나중에 복개가 되었지요. 그 반대편에 열차집이 있었어요.”

우제은 씨의 말이다.

<자유신문> 1948년 12월 16일자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빈대떡이라는 이름의 수필로 글쓴이는 유영륜이며, 그는 자그마한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는 늘 빈대떡에 술 먹는 것이 즐겁다고 한다.

“내 단골집인 빈대떡집으로 찾아간다. 을지로입구에 있는 자그마한 이 집을 극성으로 찾아간다. 젊은 여인네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구수우한’ 빈대떡에 약주 맛이 유달리 기막히다…해방 후에 급속도로 보급된 것이 빈대떡인데 하여간 빈대떡이 없으면 내가 망하고 내가 없으면 빈대떡이 망할 것이다. 개중에는 貧者떡 賓待餠 함흥식 지짐이 평양식 지짐이 등으로 부르는데 어쨌든 모든 이름이 귀일되는 것은 녹두지짐이다….”

옛 서울사람들의 최고 술안주였던 빈대떡. 이제는 몇몇 집의 역사적 음식으로 아직 성업하고 있다. 한 점 빈대떡과 막걸리 한 잔. 완벽한 궁합이다.

 

   
 

필자 박찬일은 서울에서 났다. 1999년부터 요리사로 살면서 글도 쓰고 있다. 경향에 <박찬일셰프의 맛있는 미학>, 한겨레에 <박찬일의 국수주의자>(문자 그대로 국수에 대한 연속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단행본으로 한국의 오래된 식당을 최초로 심층 인터뷰하고 취재한 <백년식당>을 썼다.

박찬일 셰프 bizhk@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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