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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노포열전] 택시기사와 함께 반세기, 성북동 돼지갈비집

2016.09.20(Tue) 09:58:09

어렸을 때 이른바 ‘가정환경조사서’라는 게 있었다. 가전제품을 무얼 갖고 있는지 체크하는 페이지가 있었다. 제일 중요(?)한 난이었다. ‘환경’이란 거의 경제적 상황을 보는 것이었으니까. 라디오, 녹음기, 재봉틀도 있었다. 전화가 있는 집이 거의 드물었고, 자가용은 전교에 몇 명이니 될까 말까 했다. 고등학생이 되자(1981년) 좀 더 많아지기는 했다. 그래도 반에 한두 명이 고작이었다. 중산층 동네였는데도 그랬다. 다들 뭘 타고 다녔을까. 대중교통도 아주 열악했던 때였다. 당연히 택시였다.

   
 

1977년도 통계를 보면 서울시 인구가 750만 명이었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택시는 고작 2만 4000대. 지하철도 1호선밖에 없었고, 버스는 늘 모자랐다. 택시까지 적으니 차 잡기가 전쟁이었다. 요새 주말 강남역이나 연말 종로, 을지로의 밤 같은 전쟁이 매일 벌어졌다고 봐도 된다. 합승 정도가 아니라 쿼드러플 합승도 있었으니까. 처음 승객 한 명, 그다음 세 명을 각각 더 태웠다는 얘기다. 네 명이 다 다른 승객이었다. 하루에 500킬로미터 이상을 뛰는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엄청난 거리다. 돈이 됐으니까 뛰었다. 죽기 살기였다. 승객도 기사도.

그때 번성한 산업(?)이 바로 기사식당이었다. 차 대기 좋고 맛 좋은 집에 택시가 줄을 이었다. 경쟁이 이어지면서 동전 바꿔주기, 커피 서비스, 박카스, 장갑 판매업, 무료 세차도 있었다.

“먹을 데가 없어서 밥을 받아다가 자기 차에 가서 먹는 기사도 흔했어요.”

성북동의 전설적인 기사식당 ‘성북동돼지갈비집’ 안주인 강부자 씨(73)의 증언이다. 그이는 지방에서 올라와 친정어머니를 따라 이곳에서 터전을 잡았다. 친정어머니가 솜씨가 좋아 이곳에서 음식 장사를 했는데, 그걸 이어받다시피 하여 밥집을 낸 것. 1970년의 일이다.

세를 얻어 집 안에 마당과 방에 상을 깔고 손님을 받았다. 그러다가 택시 경기가 터지면서 기사식당이 움트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서울 동부권의 송림기사식당이 유명했고, 성북동 쪽은 시내를 돌던 기사들이 가장 빨리 도착해서 먹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집이었다.

기사식당의 특징이 있다. 혼자 와도 환영받는다. 1인분인데도 고기를 판다.

“원래 고기란 2명 이상을 받지 1인분은 없었어요. 지금도 고깃집은 다 그럴 겁니다. 기사식당에서 그걸 깼지. 불백이니 하는 것이 터진 것도 바로 기사식당입니다.”

강 씨의 말이다. 그이도 처음엔 일반 백반을 팔다가 돼지갈비를 메뉴에 넣었다. 이게 대히트였다. 하루 종일 운행에 지친 기사들에게 거한 한 상이 되었으니까. 무엇보다 맛이 좋았다.

“연탄 피워서 초벌 재벌 구웠어요. 돼지는 아주 한 마리씩 떼어다가 팔았고. 부위별로 섞어서 팔았고요. 그때는 돼지갈비가 그렇게 비싼 부위가 아니었어요.”

간장에 잰 돼지고기를 석쇠 깔고 연탄에 구우니 맛이 기가 막혔다. 기사식당은 경쟁이 격화되면서 ‘기사님식당’이 되었다. 세차서비스도 환경오염 때문에 금지되었다. 카드로 계산하면서 동전교환도 필요 없게 되었고, 무엇보다 손님이 크게 줄어서 기사식당에서 느긋하게 밥 먹는 기사도 적어졌다.

   
 

“옛날 기사들은 정말 바빴어요. 스트레스도 말도 못했고, 그래도 돈은 좀 벌었지만 그때 다들 뭐 일자리가 없던 때도 아니고 나을 것도 없었지. 그때 기사들과 지금의 차이는 결정적으로 위장약이에요. 지금 위장약 털어넣는 기사들은 거의 없어요, 그때는 다들 밥 먹고 위장약을 물고 있었어요.”

요새는 손님이 줄어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로 운행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 합승도 없으니 눈치 보기, 골라 태우기 하면서 욕먹을 일도 없다. 그래서 위장약 먹는 기사도 적어졌다는 분석이다.

갈비백반을 시켜본다. 연탄불 맛이 살아 있다. 마늘을 곁들여 밥 한 그릇 뚝딱이다. 늘 조갯국이 나오는데, 강 씨가 80년대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메뉴가 똑같다. 이제 이 가게는 아들(윤영호 씨)에게 이어지고 있다.

“대를 잇는 거지. 내가 허리가 아파서 이제 좀 힘들어요.”

기사식당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전설의 안주인 강부자 씨다.

이 집 갈비는 여전히 19공탄 때는 옛날 화덕에서 굽는다. 초벌로 구운 후 재벌로 한 번 더 구워나간다. 다른 건 현대화되고 있지만, 연탄화덕은 포기하지 않는다. 돼지고기는 도축된 걸 마리째로 들여온다. 갈비, 다리 등을 고루 섞어 굽는다. 단골만의 주문법이 있는데, ‘기름 빼기’, ‘기름 많이’다. 비계 부위 없는 걸 싫어하는 이나 좋아하는 이의 기호에 맞춰낸다. 연탄 값은 요즘 600원. 20원 할 때부터 땠으니 연탄재만 해도 산을 이루었을 것이다.

 

   
 

필자 박찬일은 서울에서 났다. 1999년부터 요리사로 살면서 글도 쓰고 있다. 경향에 <박찬일셰프의 맛있는 미학>, 한겨레에 <박찬일의 국수주의자>(문자 그대로 국수에 대한 연속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단행본으로 한국의 오래된 식당을 최초로 심층 인터뷰하고 취재한 <백년식당>을 썼다.

박찬일 셰프

bizhk@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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