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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주년 특집: 독일 통일 결정적 장면2] 급류에 휩쓸린 11개월

동독 조기 총선에서 통일 세력 집권…서독도 통일 지연은 실익 없다 판단

2018.05.04(Fri) 19:44:32

[비즈한국]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90년 10월 3일, 서독과 동독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됐다.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인 한국은 독일 통일의 과정을 어떻게든 참고할 수밖에 없다. 지난 4월 27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으로 통일의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지금 ‘비즈한국’은 창간 4주년을 맞아 독일 통일의 과정과 교훈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독일 통일 결정적 장면1] 베를린장벽 붕괴 

[독일 통일 결정적 장면2] 급류에 휩쓸린 11개월

[독일 통일 결정적 장면3] 남북한과 달랐던 동·서독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 후 3일 동안 동독 군인들은 장벽에 구멍을 뚫어 새로운 국경 출입구를 만들었고, 2주 동안 300만 명의 동독인이 서베를린과 서독을 방문했다. 서독 정부는 예전처럼 이들에게 100마르크의 환영금을 지원했고, 이를 받기 위해 더 많은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몰려들었다. 

 

장벽 붕괴 후 3일 동안 동독에서 서독행 여권 430만 매가 발행됐고, 동독경찰은 비자발급 용품 키트를 갖고 다니며 출국비자를 내줘야 했다. 10일 동안 서방 여행을 위한 비자 1030만 건이 발급됐고, 국경 50곳에 통행로가 만들어졌다. 

 

# 동독 공산당, 베를린장벽 붕괴 두 달여 만에 해체

 

베를린장벽 붕괴의 트리거가 된 여행법 개정안을 주도한 에곤 크렌츠 동독 공산당 서기장은 자신의 의도와 달리 국경이 개방되자, 장벽 개방은 동독 정부가 사전에 의도한 것처럼 하기로 했다. 사태를 되돌리기 어려운 데다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개혁가로서의 인기 하락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베를린장벽 붕괴 다음 날인 11월 10일 아침 크렌츠는 소련 대사관에 전화해 상황을 설명했다. 코체마소프 주동독러시아 대사는 전날 밤 벌어진 엄청난 일을 질책했지만, 크렌츠는 국경 개방은 이미 계획됐다는 것을 소련도 알고 있지 않았느냐고 항변했다. 

 

코체마소프 대사는 “개방한 것은 동서독 간의 국경이지,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문제인 베를린장벽은 아니지 않느냐”고 따졌다. 크렌츠는 “지금 상황에서 그건 원론적인 문제일 뿐”이라며 대답했다. 동독과 소련은 사태를 수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베를린장벽 붕괴 후 소련 외무부 대변인의 공식 논평은 “국경 개방은 동독의 주권행위로, 이주에 관한 새 규정은 현명하다”였다.

 

1989년 11월 12일 무너진 베를린장벽을 통해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동독인들. 11월 9일 장벽 붕괴 후 2주 동안 300만 명의 동독인이 서베를린과 서독을 방문했다. 사진=연합뉴스​


서독 지도자들이 앞 다퉈 베를린장벽에 나왔던 것과 달리 동독 지도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동독 정부의 실수는 공산 정권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고, 사태의 주도권은 시위 군중의 손으로 넘어갔다. 동독 공산당은 11월 10일부로 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군대와 경찰은 손을 놓았다. 주민들을 탄압하던 정보기관이자 비밀경찰인 슈타지는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모두 파괴됐다.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이던 동독은 11월 13일 기존 정부가 총사퇴를 하고, 온건파 공산주의자 한스 모드로프의 주도 아래 통일을 위한 개혁을 실시했다. 12월 1일 동독 인민회의는 국가 내 공산당의 역할을 대부분 제거했다. 12월 3일 에곤 크렌츠 서기장이 사임하고, 3일 뒤 국가수반에서도 물러났다. 12월 16일 동독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민주사회당으로 재창당했다. 

 

1989년 12월 초까지 동독 공산당은 동독인들이 통일보다 사회주의 동독의 존속을 원할 것으로 판단했다. 공산당 지도부와 타 정당 관계자들은 조기 선거가 동독의 존속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해 1990년 5월로 예정된 인민의회 의원 선거를 3월 18일로 앞당겼다. 

 

# 동독 존속 확신한 민주사회당의 총선 패배로 독일 통일 기정사실화

 

1990년 3월 18일 동독 총선 결과, 예상을 깨고 공산당의 후신인 민주사회당이 참패하고, 신속한 통일을 약속한 독일연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독일 통일은 기정사실화됐다. 독일연맹의 주축인 기독교민주연합과 사회민주당은 4월 5일 개원한 동독 의회에서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서독정부와 통일협의를 개시했다. 

 

총리에 취임한 로타르 드 메지에르는 4월 24일 서독의 수도 본(Bonn)에서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화폐·경제·사회통합 원칙에 합의했다. 5월 18일에는 동서독 재무장관이 ‘화폐·경제·사회통합조약’을 체결, 7월 1일 발효됨으로써 사실상의 통일을 이뤘다. 

 

이어 8월 22~23일 개최된 동독 인민회의에서 10월 3일 독일연방공화국(서독) 가입을 결의한 데 이어, 8월 31일 동서독 내무장관 간에 통일조약이 체결됐다. 9월 20일 동서독 의회가 통일조약을 비준하고 10월 3일 독일정부가 통일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지난해 10월 3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열린 독일 통일 27주년 기념행사. 사진=연합뉴스


베를린장벽이 붕괴될 때까지 서독인들의 통일 의지는 낮은 편이었다. 가까운 장래에 통일될 가능성이 없다고 체념한 데다 독일에서 통일을 들먹이는 것은 국수주의적 태도로 금기시됐다. 독일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독일의 분단이 나치의 죄과에 따른 결과로 세계평화를 위해선 독일 통일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봤다. ‘강한 독일’보다는 유럽통합에 더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독일 통일 뒤 3년이 지난 1993년 11월 1일 유럽연합(EU)이 창립된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고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 선언까지 걸린 시간은 11개월이 채 되지 않는다. 애초 1989년 9월 동독인의 대규모 탈출과 시위가 시작됐을 때 서독 정부는 통일보다는 동독사태를 안정시키는 데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이후의 급속한 사태 진전은 신속한 통일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 

 

# 서독, 점진적 통일은 실익 없다 판단

 

독일 통일이 신속하게 이뤄진 데는 대략 세 가지 요인으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동독인들의 대규모 탈출 사태가 이어진 데다 동독 경제가 급속히 붕괴돼 시급한 대책이 필요했다. 1989년 34만 명이 동독을 탈출한 데 이어 1990년 상반기에 23만 명이 추가로 탈출했다. 동독 경제의 파탄을 막고 서독의 탈출자 정착지원에 드는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선 신속한 통일이 불가피했다. 

 

둘째, 점진적 통일의 실익이 없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점진적으로 통일할 경우 동독인의 탈출을 억제할 방법이 없고, 동독의 정치·경제·사회가 급속히 악화되는 가운데 지원을 계속할 경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가능성이 컸고, 동서독 국민을 계속 분리시키면 동독인의 서독 적응이 늦어진다는 이유였다.

 

셋째, 서독 정부는 고르바초프가 보수세력의 공격으로 실각하거나 개혁이 후퇴할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했다. 또 소련을 구성하는 15개 연방국 내부에서 독립 기운이 강해져 소련 해체 우려가 제기됐다. 실제로 독일 통일 1년 후인 1991년 12월 고르바초프가 실각하고 소련이 15개 독립국가로 분리됐다. 이때까지 통일되지 않았다면 이들 15개 독립국가의 승인을 얻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을 것이다. 

 

소련은 2차 대전 전승 4대국(영국·프랑스·미국·소련) 중 독일 통일에 가장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990년 3월 동독 총선 후 독일 통일이 가시화되자, 독일 통일의 중립화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탈퇴 등 서방동맹국들과 서독이 수락하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하며 통일을 지연시키려 했다. 

 

그러나 동유럽 공산정권들의 급속한 붕괴로 동유럽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데다, 동독 민주정부가 서독과의 통합을 결정하고, 미국·프랑스·영국이 독일 통일을 지지하며 압박을 가하자 소련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우종국 기자 xyz@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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