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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나] '노 굿바이 저스트 씨유' 매일 베를린과 이별하는 중

바쁨으로 애써 피하려 했지만, 절친의 편지에 정면으로 슬픔을 받아들이기로

2020.07.02(Thu) 16:01:19

[비즈한국] “안 울 거야.” 학교 가는 차 안에서 아들이 불쑥 말했다. 우연히 켜둔 라디오에서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캔트 스톱 더 필링(Can’t stop the feeling)’이 흐르고 연달아 마룬파이브의 ‘메모리즈(memories)’까지 나오자, 내가 노래를 소재 삼아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하던 차였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면서 매일 오가던 길, 자주 가던 장소, 집 앞 풍경까지 모든 일상이 소중하게만 느껴진다. 사진=박진영 제공
여느 때 같으면 떠들썩했을 마지막 등교 풍경이지만, 코로나 여파로 학기 내내 학교가 비정상 운영되면서 학년말 풍경도 고요하기만 하다. 사진=박진영 제공


“‘캔트 스톱 더 필링’은 독일 와서 1학년 때 처음 배웠던 곡이잖아. 우리 임시로 살던 집에서 네가 침대 위에서 춤추면서 노래하던 거 기억나?” “와, 이번엔 ‘메모리즈’네. 가사 봐봐. ‘메모리즈 브링 백, 메모리즈 브링 백(memories bring back, memories bring back)’. 네가 학교에서 쌓은 모든 기억들이 우리를 항상 베를린에 데려다 줄 거야. 근데 오늘 학교 가는 마지막 날인 거 라디오에서 어떻게 알고 이런 노래들을 틀어주는 거지? 너무 신기하다.” 실은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아서 일부러 더 농담을 했다. 아들을 데려다주고 데려오느라 3년을 매일같이 오가던 길이었으니 왜 섭섭하지 않을까.

 

2017년 8월, 1학년 입학을 시작으로 3년간 다닌 학교를 아들은 너무나 사랑했다. 말도 통하지 않아 힘들었을 1학년 초반조차도 아들은 학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완벽하게 적응한 2학년부터는 그야말로 학교가 아들 삶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다양한 경험을 했고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축복받은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3학년 2학기가 시작될 때부터 ‘마지막 학기’라고 강조하며 하루하루를 아쉬워하는 아들을 보며 나는 걱정했다. 언젠가 다가올 이별의 그 날, 아들이 감정적으로 힘들어할 모습에 지레 걱정부터 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코로나 시국으로 3개월간 학교를 쉬고, 마지막 한 달도 고작 일주일에 두 번, 그것도 그룹을 나눠 수업하느라 같은 반 친구들을 함께 만날 날이 단 하루도 없는 등 파행적으로 운영된 탓에 조금은 덜 슬프게 굿바이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등교길. 아들의 무거운 발걸음에 내 마음도 무거웠다. 사진=박진영 제공


그런 위안은 기대에 불과했다.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서 아들은 하고 싶었던 많은 일을 하지 못한 채 지나가버린 이번 학기에 대해, 친구들과 더 많은 추억을 쌓지 못한 것에 대해, 심지어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작별해야 하는 친구들에 대해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그래도 잘 견디는가 싶더니, 마지막 등교 전날, 잠자리에서 들면서부터 아들은 훌쩍거렸다.

 

드디어 실감이 나는 모양이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눈물 보이지 말고 멋지게 인사하고 돌아오라고 말했다. “네가 친구들 생각하면서 만든 굿바이 송을 생각해봐. ‘호프스 앤 드림즈(hopes and dreams)’잖아. 다시 만날 희망을 갖고 있으면 꿈이 이뤄질 거야.”

 

말없이 숨죽여 울다가 잠든 아들을 보면서 한국에서 독일에 오던 날을 떠올렸다. 친구들과 헤어질 때도 예상과 달리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아이는 공항으로 출발하기 직전, 아이를 안고 아쉬워하는 외할머니·외할아버지를 보고 참았던 눈물을 한 번에 쏟아냈다. 

 

이렇게 3년이 빨리 흐를 줄을 모르고, 나도 가족들과의 잠깐 이별이 얼마나 아팠던지. 그래도 거기까지였다. 지난 해 말, 나는 아들에게 한국에서 독일에 올 때는 왜 많이 슬퍼하지 않았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다. 아들이 말했다. “그때는 3년만 지나면 다시 한국에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 있었어. 그런데 독일에는 다시 올 수가 없잖아. 그래서 훨씬 더 슬픈 거야.” 언제든 여행을 올 수 있다고 했지만 큰 위로가 되지 않는 듯했다.

 

여느 때 같으면 떠들썩했을 마지막 등교 풍경이지만, 코로나 여파로 학기 내내 학교가 비정상 운영되면서 학년말 풍경도 고요하기만 하다. 사진=박진영 제공


어떻게든 위로하자고 한 말이었다. 실은 나도 베를린을 떠나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설령 온다고 해도 삶의 터전으로 있던 3년과는 너무 다른 것일 테니. 고백하건대 스스로에게도 그다지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아들에게 내색할 수 없어 괜찮은 척 할 뿐, 나 역시 한국에 돌아갈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자 감정적으로 힘들 때가 많다. 어느 날은 충분히 행복했다고, 한국에서의 삶도 기대가 된다고 의지를 다졌다가 또 어떤 날은 이곳에서 맺은 모든 인연들과 하다못해 애정하는 공간들, 잊지 못할 풍경들까지 생각이 나 끝도 없이 가라앉는다.

 

실은 귀국 준비로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크고 작은 스트레스로 애써 이별의 감정을 잊으려 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일상 중의 하나로 지나가고 싶었다. 그런 나를 무너지게 한 건 독일인 친구의 이메일 한 통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내가 떠나는 것에 대해 본인이 느끼는 감정을 길고 긴 메일에 꾹꾹 눌러 담아 보내왔다. 바쁜 귀국 준비를 핑계로 그녀의 만남 요청에 잘 응하지 않는 나에 대한 서운함과 함께.

 

그녀는 말했다. 일상을 지키며 사는 것도 좋지만, 남은 기간만큼은 소중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고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면서 마무리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우리에겐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고. 그랬다. 나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고, 더 큰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만나야 할 사람,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막상 깨닫고 보니 거리에서 마주치는 풍경 하나도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았다. 변덕스러운 독일의 여름 날씨도 소중하게만 느껴졌고, 매일 아침 독일어를 못하는 내게 끊임없이 독일어로 말을 걸어주는 이웃 할아버지도 벌써부터 그립게 느껴졌다. 매일 이별을 의식하고 산다는 건 한편으론 힘들었지만 한편으론 매 순간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슬프지만 슬프지만은 않은 감정이랄까.

 

아들 역시 그렇게 지나가길 바랐다. 다행히, 마지막 날 학교가 끝난 후 만난 아들은 생각보다 밝은 모습으로 ‘울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생님들과 작별의 순간들을 이야기해줄 땐 살짝 눈물을 보이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이별의 순간들을 잘 극복해내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담임 선생님의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언젠가 어디선가 다시 만날 테니, 안녕이라고 말하지 말자는 선생님의 마지막 인사를 읽으며 드라마 대사가 생각났다. ‘굿바이 말고 씨유(see you)’. 베를린에서 남은 시간 동안 쭉 치르게 될 이별의 의식들을 잘 통과하기를,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본다.

 

글쓴이 박진영은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에 입문, 여성지 기자, 경제매거진 기자 등 잡지 기자로만 15년을 일한 뒤 PR회사 콘텐츠디렉터로 영역을 확장,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실험에 재미를 붙였다. 2017년 여름부터 글로벌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또 다른 영역 확장을 고민 중이다.

박진영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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