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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노포열전] 만두와 호떡과 계란빵으로 육십 년, 부산 신발원

부산 차이나타운에서 가장 오래된 만두 전문점

2017.01.17(Tue) 15:21:25

고속열차가 서는 부산역. 맞은편에 아치가 하나 서 있다. 예전부터 차이나타운으로 불리는 곳이다. 한때 꽤 많은 화교가 살았다. 그들이 쇠퇴하자 러시아인들이 들어왔다. 러시아어 간판이 보이고, 눈 파란 선원들이 돌아다닌다. 그래서 초량 텍사스라고도 불린다. 텍사스는 ‘코 큰 사람들이 있는 유흥가’를 말한다. 차이나타운은 흔적만 남았다. 

 

시계를 옛날로 돌려본다. 일제강점기에도 이곳에는 중국인이 살았다. ‘지나마치(支那町)’라고 했다. 중국인거리라는 뜻이다. 그 시절, 많은 중국인들이 이 땅에 건너왔다. 부도 노동자를 비롯한 토목 노동자, 벽돌장이, 이발사, 요리사 같은 생활 깊숙이 필요한 일들을 했다. 철을 잘 만지기도 했다. 고향 산둥성이 가뭄으로 기록적인 기근에 시달린 까닭도 있었다. 주로 남자들이 건너왔다. 이주가 아니라 당시에는 ‘돈 벌러 온’ 것이었다. 그들은 배가 고팠다. 고향의 음식도 그리웠다. 가게가 하나둘 생겼다. 국수도 팔고, 호떡도 구웠다. 만두집도 생겼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차이나타운의 생성 역사다.

 

이 작은 차이나타운에는 만두 잘하는 집이 몇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되고 만두만 거의 전문적으로 하는 집은 신발원이다. 신발원(新發園). 새롭게 일으키는 가게. 이름으로 보면 갓 만들어진 집이어야 하는데, 무려 역사가 육십 년이 넘었다.

 

이 집에서는 아직도 꽈배기를 손으로 직접 꼬고, 만두를 하나하나 빚는다.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1951년에 처음 문을 열었어요. 아주 작은 가게였죠. 지금 자리는 아니었고 옮겨 온 겁니다. 만두 전문이었어요, 처음부터.”

신발원의 3대를 맡고 있는 수의덕 씨(39)의 설명이다. 그는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그래도 화교의 혈통을 의식한다.

“한국인은 아니지만, 부산 사람은 맞습니다. 롯데를 응원하고요.(웃음).”

 

이 집 만두의 비밀은 바로 어머니 곡서연 씨(61)의 손에 있다. 손을 보니, 두툼하고 잔 근육이 많다. ‘생활의 달인’에도 나왔을 정도다. 직접 만두를 빚는다. 그것이 신발원 만두의 전설을 유지하는 이유다. 만두는 탄력있고 고기의 함량이 많다. 줄줄 육즙이 흐르는 식은 아니고 담백한 쪽이다. 필자가 육즙이라고 표현했지만, 만두에는 실은 육즙은 없다. 갈아낸 고기에 즙이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대개는 가열할 때 녹는 지방이거나 젤라틴 성분이다. 이 집은 파오츠라고 부르는 대륙형 전통 만두라고 봐야 한다. 바로 산둥만두인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만두는 여자의 음식이에요. 여자들 손으로 빚고 여자들로 대를 이어 조리법이 비전되었어요. 저도 이 만두를 며느리한테 줘야지요.”

 

만두에 대한 한 가지 오해가 더 있다. 피가 얇지 않으면 제대로 된 만두가 아니라는 오해다. 산둥식 물만두의 경우, 피가 두툼한 것이 보통이다. “만두는 소가 전부가 아니라 피(밀가루)와 소가 잘 어울려야 제맛이에요.”​

 

원래 화교 만두집은 만두만 빚는 것은 아니었다. 샤오츠라고 부르는 간식거리를 대개 취급했다. 나중에 일손도 적고 효율도 나빠지면서 만두만 하는 쪽으로 바뀌게 된다. 특이하게도 신발원은 옛 만두집의 메뉴를 거의 가지고 있다. 공갈빵, 호떡, 계란빵, 꽈배기 같은 것들이다. 이제 역사속으로 거의 사라져가는 메뉴들이다. 필자는, 이 메뉴를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속 유산이 아닌가, 그렇다면 뭔가 보존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산둥식 물만두는 피가 두툼한 것이 보통이다. 피가 얇은 것보다 소와 잘 어울리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긴다.


“맞습니다. 찾는 손님이 줄어들면 사라질 수 있겠지요. 아직은 하고 있지만, 전문 일손이 거의 없고 이문도 나빠서 계속될지 저도 모릅니다.”​

 

수 사장의 설명이다. 이 집에서 만드는 빵과 과자는 일반 요리에 비해 두 배 정도의 공력이 든다고 한다. 그것은 곧 비용이다. 주방에 들어가봤다. 옛 레시피가 한자로 칠판에 가득 써 있다. 직원이 열 명이 넘는다. 작은 주방이 꽉 찼다. 별로 남지도 않아 보이는 꽈배기를 일일이 손으로 꼬고 있고, 반죽을 치고 있다.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여기 계란빵은 아주 전설적인 것입니다. 요새 누가 이런 걸 먹겠어요. 맛있는 현대식 빵이 좀 많습니까. 그래도 우린 만들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지요.”

 

계란빵은 수분이 적고 단단한 빵이다. 그래서 상하지 않아서 옛 중국인들이 도시락 삼아 며칠씩 가지고 다니던 식량이었다. 소다 냄새가 난다. 원 레시피가 그렇기 때문이다. 바꾸지 않고 옛 모습을 지킨다. 솔직히 말해서 클래식이라는 의미 말고는 이 빵을 먹을 일은 별로 없어보인다.

 

수의덕 씨 집안은 일제 때 건너와서 수영화(36년생)-병곤(54년생)으로 이어져 수의덕 사장까지 왔다. 한눈팔지 않고 중국식 호떡집, 즉 스낵집으로 이 긴 세월을 이어왔다. 처음에는 국제시장 내 속칭 미싱골목 내에서 2년간 영업하다가 현재의 자리에서 내리 세월을 잇고 있다. 

 

오늘도 신발원 만두솥에 불이 붙고 물이 끓는다. 언제까지 그럴 것이다.​ 

박찬일 셰프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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