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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스타트업열전] 프랑스 '유통재벌'이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까닭

'오샹' 창업자 가문, 자회사 만들어 벤처 투자 '미래사업 창출 위한 전략적 투자'

2019.06.21(Fri) 19:08:26

[비즈한국] 올초, 사료용 곤충을 생산하는 프랑스의 스타트업 인섹트(YnSect)가 시리즈 C 펀딩을 통해 약 1400억 원에 달하는 투자를 유치했다는 소식을 이 칼럼에서 전했었다. 사실 사료용 곤충을 개발·사육·생산하는 스타트업은 이외에도 많다. 싱가포르의 엔토벨, 네덜란드의 프로틱스, 같은 프랑스의 넥스트프로틴 등도 비슷한 사업 모델로 출사표를 던진 바 있다. 2018년 말에 시리즈 A 투자를 통해 4000만 유로(530억 원) 투자 유치에 성공한 프랑스의 이노바피드(InnovaFeed)도 그중 하나다. 

 

오늘은 이노바피드에 거액을 투자한 프랑스의 투자사 크레아데브(Creadev)와 이를 소유한 물리에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유통업체 ‘오샹’ 설립자 제라르 물리에. 사진=luxuo.com


2002년에 설립된 크레아데브는 현재까지 약 10억 유로(1조 3000억 원)에 달하는 자금을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주요 투자 영역은 식품·농업, 친환경, 돌봄 서비스(헬스케어), 인재 개발(에듀테크), 고객 서비스(CRM, 고객 데이터 분석) 기술 등으로, 주로 소비재와 관련되어 있다. 연간 2억 유로(2600억 원) 정도의 투자 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직접 투자를 통한 지분 확보와 VC 등을 통한 간접 투자를 병행하고 있다. 

 

크레아데브는 프랑스의 숨은 유통 재벌 물리에 가문이 스타트업에 투자할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다. 물리에 집안의 중심인물은 오샹(Auchan)의 창업자 제라르 물리에(Gérard Mulliez)이다. 

 

오샹은 직원 35만 명에 세계 17개국 3800개 매장에서 530억 유로(약 70조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소비 유통업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형 마트, 미국에서는 빅박스 소매점(big-box store) 또는 창고형 매장(warehouse stores)이라고도 부르는 하이퍼마켓(hypermarket) 체인이다.

 

미국 월마트에 이어 세계 2위 유통기업인 까르푸그룹이 이 분야 선구자답게 하이퍼마켓에만 집중하는 반면* 오샹의 모기업인 물리에 가의 지주회사 AFM(Association familiale Mulliez)은 오샹 외에도 스포츠 용품 체인 데카트론(Decathlon), 전자제품 체인 불랑제(Boulanger), 자동차 정비소 체인 노로토(Norauto), DIY용 건축자재 및 정원용품 판매점 르로이 메흘랑(Leroy Merlin), 저가 의류매장 키아비(Kiabi) 등 50여 개 기업의 대주주다. 쉽게 말해 프랑스인들이 일상에서 익숙하게 이용하는 각종 유통 판매점의 상당수가 이 가문 소유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가문의 구성원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데다 대부분의 계열사가 비상장인, 지극히 보수적인 경영을 하는지라 프랑스인 중에서도 이 가문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베일에 싸여 있는 물리에 가의 숨겨진 뒷이야기들을 심층 취재해 ‘물리에 제국의 감춰진 얼굴(La face cachée de l’empire Mulliez)’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한 언론인 베트랑 고뱅(Bertrand Gobin)에 따르면, 매년 프랑스인의 소비 지출의 10%가 이 가문의 금고로 들어간다.

 

물리에 가문이 소유한 회사들. 이른바 ‘물리에 은하계’를 이룬다. 사진=le-blog-de-roger-colombier.com

 

한국의 송도에 자리한 데카트론 송도점 전경. 사진=최준필 기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가족애가 강한 제라르 물리에의 뜻에 따라 이 가문의 재산은 700명에 이르는 일가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분산되어 있다. 가문의 총재산이 380억 유로(49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는데도 매년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발표되는 자산가 순위에서 물리에라는 이름을 찾기 힘든 게 이 때문이다. 

 

다산(多産)이 모토인 이 집안의 수장인 제라르 물리에는 13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 13명의 자녀들 대부분이 최소 3명에서 7명의 자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리에 가문에서 태어나면 가문의 지분을 나눠받되 그에 합당한 역할을 맡아 해내야만 한다. 가문의 지분은 함부로 외부에 매각할 수 없다.

 

1931년 생인 제라르 물리에는 할아버지 때부터 포목점을 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그때까지는 어디까지나 지역 상인에 불과했다. 공부에 별다른 뜻이 없었던 그는 고등학교도 낙제에 가까운 성적으로 간신히 졸업했고, 대입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를 통과하지 못해 대학을 포기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1년 동안 럭비와 당구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한편 영어를 익혔는데, 이때의 경험이 유통 제국을 이룩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제라르는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 아버지의 포목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이미 섬유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든 상황이었다.

 

이때 미국의 컴퓨터 회사 NCR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유통업에 대한 마케팅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를 이끌던 사람은 콜롬비아 출신의 마케팅 전문가로서 흔히 ‘하이퍼마켓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베르나르도 트루히요(Bernardo Trujillo)였다. 

 

트루히요는 1957년부터 1965년까지 8년여 동안 수천 번의 세미나를 통해 전 세계 유통업체 고위 관리자들에게 넓은 주차장과 많은 품목과 싼 가격으로 고객을 끌어들이는 대형 슈퍼마켓을 건설하라고 역설했다. 이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이들은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 경영자들이었다. 

 

트루히요의 세미나를 수강한 제라르 물리에와 까르푸의 공동창업자 드니 데포레이(Denis Defforey), 마르셀 푸니에(Marcel Fournier)는 프랑스에 돌아와 앞서거니뒤서거니하며 세계 최초의 하이퍼마켓, 즉 대형 마트들을 만들었다. 이들 외에도 프랑스 대형 서점·미디어 체인 프낙(Fnac, 우리나라의 교보문고와 비슷)의 공동창업자 앙드레 에셀(André Essel), 유럽 최대 전자제품 유통업체 다티(Darty, 2016년에 Fnac과 합병)의 창업자 베르나르 다티(Bernard Darty), 래플즈·소피텔·노보텔 등의 호텔체인을 보유한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 최대 숙박업체 아코르호텔(AccorHotel)의 창립자 폴 뒤브륄르(Paul Dubrule) 등이 트루히요의 프랑스인 제자였다.

 

오샹 1호점은 1961년에 제라르 물리에의 고향인 프랑스 북부 릴 지방의 작은 도시 루베의 오샹(Hauts Champs) 지구에 오픈했다. 동네 이름과 발음이 같으면서도 전화번호부에서 가장 앞에 위치하도록 이름을 ‘오샹(Auchan)’으로 지었다고 한다.

 

오샹은 직원 35만 명에 세계 17개국 3800개 매장에서 530억 유로(약 70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소비 유통업체다. 사진=오샹 페이스북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크레아데브는 유통 재벌인 물리에 가문이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위해 설립한 일종의 벤처캐피털(VC), 그중에서도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 Corporate VC)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알 수 있듯이 CVC는 단순히 투자 금액을 회수하려는 재무적 투자보다는 모기업의 미래 사업 창출을 위한 전략적 투자를 위주로 한다. 

 

과거에 기술적 진보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던 유통업계가 현재는 인공 지능과 로봇/드론 등의 최신 기술로 무장한 스타트업들의 격전지가 되고 있다. 유통 관련 스타트업들이 연이어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며 유니콘의 반열에 진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마냥 선수를 빼앗길 수만은 없는 기존 유통 대기업들에게 스타트업 투자는 개방형 혁신의 필수적인 수단이 되고 있다.

 

*까르푸는 1963년에 세계 최초로 파리 인근에 하이퍼마켓을 오픈했다. 하이퍼마켓(hypermarket)이라는 말은 프랑스어 이페르마르셰(hypermarché, 대형 슈퍼마켓)를 영어로 번역한 것. 2017년 매출 788억 유로(100조 원). 199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에도 진출하였으나 2006년에 월마트와 함께 철수하였다.

 

**NCR Corporation은 1879년에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세계 최초의 기계식 현금지급기를 생산하며 문을 열었다. NCR은 National Cash Register의 약자. 1914년부터 40년간 IBM의 회장으로 재직하며 실질적인 IBM의 창업자로 기억되는 토마스 J 왓슨(Thomas J. Watson)의 경영 철학은 대부분 그가 NCR에 재직하던 시절 얻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 곽원철은 한국의 ICT 업계에서 12년간 일한 뒤 2009년에 프랑스로 건너갔다. 현재 프랑스 대기업의 그룹 전략개발 담당으로 일하고 있으며, 2018년 한-프랑스 스타트업 서밋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기재부 주최로 열린 디지털이코노미포럼에서 유럽의 모빌리티 시장을 소개하는 등 한국-프랑스 스타트업 교류에도 힘쓰고 있다.

곽원철 슈나이더일렉트릭 글로벌전략디렉터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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