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스티브 잡스는 한때 자신이 세운 애플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1985년 애플은 심각한 경영 위기에 빠져 있었다. 시장은 변하고 있었고, 애플 내부에서는 제품 전략과 경영 방식에 대한 의견 충돌이 거세졌다. 당시 CEO였던 존 스컬리와 이사회는 잡스가 추진하던 매킨토시 사업의 부진과 독단적 리더십에 문제의식을 느꼈고, 결국 이사회는 잡스의 경영 권한을 박탈했다. 창업자이자 최대 비전 제시자였던 잡스조차, 회사라는 조직이 개인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런 장면은 우리나라에선 상상하기 힘들다. ‘회장님’의 뜻이 곧 회사의 뜻으로 통하고, 이사회는 견제보다 추인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적 후진성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고착시켜온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수십년 간 우리 경제는 급속하게 성장했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은 엄혹한 현실이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는 말이 있다. 지금 국회에서 처리 초읽기에 들어간 상법개정안을 바라보는 재계의 반응이 딱 그렇다. 과거 윤석열 정부에서 거부권을 행사한 상법개정안과 달리 이번 개정안은 3% 룰(감사위원 분리선임 시 대주주 의결권 제한), 집중투표제 의무화까지 더해졌다. 한마디로 이번 개정안은 한국적 경영문화의 고질적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강력한 신호이자 실질적 변화의 출발점이다.

그동안 한국 자본시장이 떼지 못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꼬리표는 지정학적 리스크 같은 외부적 변수로만 설명할 수 없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무엇보다 우리 기업들의 지배구조 문제를 신뢰하지 못했다. 기업들이 아무리 좋은 실적과 자산 가치를 보여도, 대주주 중심의 폐쇄적 경영문화가 남아 있는 한 ‘평가 절하’는 불가피했다. 이사회가 대주주의 뜻에 좌지우지되고, 소액주주 보호 장치는 형식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장기적으로 신뢰를 갖고 투자하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번 개정안은 이 고리를 끊겠다는 명확한 의지를 담고 있다. 특히 3% 룰과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재계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이다. 3% 룰은 사실상 대주주가 감사위원회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치다. 감사위원회는 경영진과 대주주의 일탈을 견제하는 마지막 보루로 기능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주주가 우호 지분으로 장악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를 3%로 제한하면 감사위원 선임에서 대주주가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워진다.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이사회 구성 전반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조치다. 지금까지는 정관에서 집중투표제를 배제하는 기업들이 많아, 사실상 소액주주가 이사 후보를 실질적으로 추천·선임할 길이 봉쇄돼 있었다. 집중투표제가 의무화되면 최소한 주주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통로가 열린다. 이사회의 다양성과 독립성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장치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명문화까지 더해지면 변화는 한층 구조적이 된다. 그동안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은 ‘회사’로 규정됐는데, 한국적 경영현실에서는 ‘회사’라는 말이 종종 대주주와 동일시됐다. 이제 그 대상에 주주를 명시함으로써 이사회는 모든 주주의 이익을 고려해야 하는 법적 책임을 지게 된다. 이는 투자자 보호라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방향이다.
물론 재계의 우려가 적지 않다. 경영활동 위축, 소송 리스크 증가, 과도한 경영 견제 등이 예상된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실제로 경영판단의 원칙을 법원에 납득시키지 못하면 불필요한 소송전이 빈발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후속 보완 입법과 배임죄 등 사법적 판단의 정교한 적용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과거처럼 개혁의 본질을 물타기 하거나 후퇴시키려는 것은 안 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본질은 결국 한국적 경영문화의 후진성에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주식시장 전체를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기업과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문제삼는다. 이를 개선하지 않으면, 한국은 외형적으론 성장해도 글로벌 자본에 외면받는 시장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번 상법개정안은 그래서 ‘쓴 약’이다. 지금까지 미루고 회피해온 경영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3% 룰, 집중투표제 의무화, 충실의무 명문화라는 변화는 모두 경영권 견제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한다. 쉽지 않은 변화지만, 지금 삼키지 않으면 우리는 또 한 번 신뢰 회복의 기회를 잃게 된다.
변화는 불편하다. 그러나 쓴 약 없이 병을 고칠 수는 없다. 이번 개정안은 한국 자본시장이 ‘대주주 천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글로벌 표준에 다가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재계와 정치권 모두 이번 개정안의 본질적 가치를 직시하고, 정쟁이나 지연 없이 제대로 처리하기를 촉구한다. 진정한 시장 신뢰는 선언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에서 비롯된다. 이제 그 변화를 시작할 때다.
봉성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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