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하는 무역 협상은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한다. 직접 상대국에 총을 쏘거나 미사일을 날리지는 않지만, 상대국을 굴복시키기 위한 압박은 여느 전쟁 못지않다. 관세는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미국 시장을 열어주는 대신 상대국에게 ‘무언가’를 받아내는 방식, 즉 거래처럼 보이지만 실은 협박에 가깝다.
재선에 성공한 트럼프는 예전보다 더 강하게 이 전략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 결과 세계 여러 나라들이 ‘협상’이라는 이름으로 줄줄이 테이블에 불려 앉는다. 이 협상은 예전처럼 서로 이익을 주고받기 위한 거래가 아니다. 얼마나 덜 손해 보고 빠져나올 수 있느냐의 싸움이다.

최근 일본이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마무리했다. 트럼프는 일본과 자동차·반도체·제약 관련 협정을 체결하면서, 그 대가로 일본이 5500억 달러(약 720조 원) 규모의 미국 투자 패키지를 제공하기로 했다. 표면적으로는 ‘투자’지만, 실제로는 일본 정부 기관이 나서 미국 기업들을 도와주는 구조다. 더구나 투자에서 나오는 이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가고, 일본은 10%만 챙긴다. 일본 정부는 “우리는 핵심 산업에 대해 낮은 관세를 확보했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에 천문학적인 돈을 내주며 겨우 체면을 지킨 수준이다.
일본만이 아니다. EU, 멕시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압박에 밀려 수입을 늘리고, 방위비를 올리고, 심지어 정책을 바꿔야 할 수도 있다. 지금 세계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협상하는 게 아니라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다. 이득이 목적이 아니라 손실을 줄이는 게 목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잊는다. 타결이 임박한 우리의 협상 결과를 두고 “어떤 경우에든 일본보다 못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직접적인 비교는 금물이다. 중요한 건 비교가 아니라 구도의 이해다. 이 판에서 잘하는 것이란, 얼마나 덜 상처받고 빠져 나오느냐에 달렸다. 여론에 밀려 일본이 기준점이 되면 결국 우리 정부의 협상력만 악화될 뿐이다.
이제 무역은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안보와 정치가 얽혀 있다.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같은 산업은 ‘국가 안보’의 영역으로 옮겨갔다. 무역은 규칙을 지키는 게 아니라 필요할 때 규칙을 바꾸는 도구가 되었다. 이런 흐름은 트럼프 한 사람의 문제만은 아니다. 미국 정치 전체가 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국도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20년 전만 해도 미국은 자유무역을 가장 강하게 밀었던 나라다. 한국과 FTA를 맺은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 안에서는 “자유무역 때문에 우리 일자리가 줄었다”, “중국이 이득을 다 챙겼다”는 불만이 커졌다. 특히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진 중서부 지역에서는 그런 불만이 정치적 힘으로 바뀌었다. 트럼프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대통령이 되었고, 그때부터 미국의 무역 정책은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 세계는 완전히 달라진 새로운 질서를 학습하고 있다. 미국과만 거래하면 안 된다. 언제든 룰이 바뀔 수 있다는 학습 효과가 점점 퍼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을 통하지 않는 금융망을 만들고, 유럽은 자체 공급망을 강화하고 있다. 모두가 ‘다음 트럼프’에 대비하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국가지만, 이런 변화가 반복되면 언젠가는 신뢰를 잃게 될 수 있다.
무역뿐만 아니라 외교 역시 점점 전쟁처럼 바뀌고 있다. 협상은 서로 윈윈하는 과정이 아니라 덜 잃기 위한 방어전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는 미국의 압박에 맞서 구조를 바꾸고 있다. 트럼프식 협상은 지금은 먹힐지 몰라도, 그 대가는 분명히 돌아온다. 강대국의 일방주의는 늘 반작용을 부른다. 미국도 언젠가는 지금 선택의 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역사는 늘 그렇게 흘러왔다.
봉성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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