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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욱의 나쁜골프] '백돌이'라 놀리지 말아요

미숙함의 상징 아닌 모두가 겪는 '통과의례'…스코어 아닌 태도가 '진짜 골퍼'를 만든다

2025.10.14(Tue) 10:09:15

[비즈한국] 오랜만에 학교 동창을 만났다. 이십몇 년 만인가. 조금은 서먹서먹하다. 이럴 때 참 좋은 출구 대화가 바로 골프다. 일단 “너 골프 치니?”로 시작한다. “응,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 “요즘 푹 빠졌어.”로 이어진다. 핸디가 어떻게 되냐고, 평균 타수가 어느 정도 되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고해성사하듯 말한다. “아직은 백돌이야.” 마치 미안해하듯 죄 지은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 바로 “나 백돌이야.”다.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지금까지 만난 골퍼들 중에 스스로 백돌이라고 자칭하며 왠지 양해를 구하는 듯한 골퍼가 3분의 1은 되는 듯하다.

 

골프는 타수에 따라 마치 계급이나 직급을 나누는 듯하다. 직장으로 치면 로우 싱글 핸디캡의 골퍼가 임원급 그 이상이라면 백돌이는 대리 정도의 직급에 해당한다. 골프 신입사원 딱지를 떼고 업무를 어느 정도 숙지한, 일을 좀 할 만한 직급이다.

 

백돌이는 부끄러운 단계가 아니라, ‘진짜 골퍼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100타를 치는 건 미숙함의 상징이 아니라, 규칙을 지키고 정직하게 플레이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사진=비즈한국 DB

 

백돌이는 100타라는 스코어 자체 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여기서 분명히 말할 것은 백돌이는 ‘백십돌이’나 ‘백이십돌이’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일단 ‘잘 치지는 않지만, 만약에 나랑 치기를 원한다면 칠 수 있을 정도는 돼’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나 백돌이야.”라는 말에는 ‘골프는 어려워. 난 절대 골프에 관한 한 건방 떨지 않아.’라는, 골퍼로서 자신을 낮추는 겸양의 미덕도 포함되어 있다. 때론 이 말에는 겸양이 아닌 일종의 엄살이 들어 있기도 하다. 그 유명한 ‘골퍼의 엄살’이다. 미리 밑밥을 깔아놓는 거다. 이쯤 되면 비록 백돌이라고 말해도 진정한 골퍼가 다 된 듯하다.

 

그런데 이 백돌이는 정말로 범위가 넓다. 백돌이라고 말해놓고 진짜 100개를 치는 골퍼도 봤지만, 분명 백돌이라고 해놓고 80대 초반을 치는 골퍼도 봤다. 이쯤 되면 겸양을 넘어 ‘타수 사기’에 가깝다. 물론 100개 근처에도 못 가는 백이십돌이도 있다. 그래서 골퍼들은 이 ‘백돌이’라는 말에 헷갈린다. 이건 ‘난 그냥 보기 플레이어예요.’라고 말하는 골퍼들의 천차만별의 실력과도 유사하다.

 

100타라는 타수는 간단한 구성이다. 8홀을 보기 하고 10홀을 더블보기 하면 나오는 숫자다. 이런 계산이라면 ‘그까짓것’ 쉬워 보이지만, 100타가 과연 생각만큼 쉬울까?

 

첫 번째 홀에 ‘일파만파’를 외치는 골퍼들이 있다. 누군가 파를 못 하면 ‘올파’를 외친다. 첫 홀 스코어는 올 파로 이미 인쇄되어 나오지 않았냐며 너스레를 떤다. 오죽하면 캐디가 “첫 홀 스코어, 제대로 적을까요?”라고 물어볼까. ‘제대로 적을까요’라는 말을 반대로 뒤집어 보면 ‘대충 적을까요?’ 혹은 ‘가짜로 적을까요?’가 되지 않을까? 심지어 마지막 홀도 그렇게 스코어를 적는 팀도 있다고 하니, 이런 골프는 진짜 골프도 아니지만 진짜 스코어도 아니다.

 

어쩌다 가끔 파4, 5에서 트리플 보기 이상, 파3에서 더블 보기 이상을 안 적는 캐디를 만난다. 본인 스스로 자랑스럽게 이를 밝히기도 한다. 골퍼의 스코어가 샷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캐디에게 달려 있다. 어떤 팀은 멀리건을 남발한다. 이상한 것은 본인의 멀리건 횟수는 줄여 생각하고, 동반자의 멀리건 횟수는 더 많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일파만파를 하고 멀리건을 쓰고 캐디가 소위 스코어 마사지를 해준 100타는 진짜 100타가 아니다. 진짜 스코어가 아니다.

 

이걸 다르게 이야기하면 진짜 100타는 못 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정확하게 룰대로 플레이를 하고, 한 타의 오차도 없이 스코어를 적은 거라면, 그래서 100타를 기록한 것이라면 절대 부끄러워할 스코어는 아니다. 적어도 회사에서 대리급 혹은 그 이상이 되는 실력이다. 다시 말하겠다. 진짜 백돌이는 못 치는 것이 아니다. 진짜 백돌이가 되어 봐야 그 이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고수도 처음엔 골린이였다. 그리고 백돌이였다.​

 

​​필자 강찬욱은?

광고인이자 작가. 제일기획에서 카피라이터로 시작해 현재는 영상 프로덕션 ‘시대의 시선’ 대표를 맡고 있다. 골프를 좋아해 USGTF 티칭프로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글쓰기에 대한 애정으로 골프에 관한 책 ‘골프의 기쁨’, ‘나쁜골프’, ‘진심골프’, ‘골프생각, 생각골프’를 펴냈다. 유튜브 채널 ‘나쁜골프’를 운영하며, 골프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와 생각을 독자 및 시청자와 나누고 있다.​​​ ​

강찬욱 작가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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