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유럽에서 회사를 키워본 창업가는 안다. ‘유럽은 단일 시장’이라는 개념이 현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말이라는 것을. EU는 하나라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다른 언어, 다른 소비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정책, 다른 규제 등 공적 영역에서조차 모두 개별적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이를 처리하는 행정마저 유럽 관료주의의 악순환에 빠지는 악몽을 맞닥뜨린다. 그때야 비로소 유럽이 단일 EU로 묶인 것이 아닌, 결국 27개의 국경으로 나누어진 국가들의 조합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실제 유럽 창업가들 사이에서 어느 국가에서 얼마나 행정처리가 힘들었는지, 어느 국가에서는 얼마나 세금을 많이 냈는지, 고생 스토리 ‘배틀’을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유럽 최대 경제 대국이자 시장이라길래 행정 처리가 느려도 참고 견뎌가며 독일에서 법인을 세우고 나면, 프랑스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정책의 장벽에 부딪히고, 세금 문제가 생기면 룩셈부르크로 본사를 옮기는 게 좋을 것인지 고민을 하다가도, 그럴 바에는 타 글로벌 시장에도 유리한 영어권 지역, 런던이 결국 답인가 싶은 순간이 있다. 이 과정에서 낭비되는 것은 돈만이 아니다. 가장 치명적인 손실은 ‘시간’과 ‘속도’다. 그간 미국 시장에 비교해 유럽에서 ‘스케일업이 어렵다’는 말은 결국 ‘국경의 벽이 너무 높다’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
#다보스포럼에서 들린 유럽 스타트업 생태계의 환호
이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 지난 2026년 1월 20일 다보스포럼에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EU Inc.’를 공식 선언했다.
이른바 ‘28번째 레짐(28th regime)’이다. 이는 27개국 국별 법체계를 건드리지 않고, 희망 기업이 선택할 수 있는 ‘EU 공통 법인격’을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28번째 레짐’ 개념은 2024년 4월 엔리코 레타(Enrico Letta) 전 이탈리아 총리가 발표한 ‘단일 시장의 미래’ 보고서가 공식 제안했다.
핵심은 기존 27개 회원국의 복잡한 회사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그 위에 EU 전체에서 공통으로 통용되는 별도의 법인 프레임워크를 하나 더 얹는 것이다. 창업가는 자국 법인, 독일에서 GmbH를 세울지, 프랑스에서 SAS를 세울지, 아니면 EU 공통 법인인 ‘EU Inc.’를 세울지 선택할 수 있다.
주요 내용은 파격적이다. 먼저 자본금 1유로부터 설립이 가능하다. 최소 자본금 문턱을 낮춰 창업 진입 장벽을 없애겠다는 취지이다. 두 번째로 48시간 내 설립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목표다. 복잡한 공증 절차를 생략하고 100% 온라인으로 이틀 안에 법인 설립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골자다. 세 번째로 EU 27개국 어디서나 동일하게 인정되는 표준화된 지배구조와 운영 규칙을 적용하는 표준 정관을 기본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국가별로 제각각인 스톡옵션 세제와 권리 체계를 표준화해 유럽 전역의 인재를 하나의 계약서로 채용할 수 있게 한다.
#아래로부터의 청원이 만든 결실
EU Inc.는 관료들의 머리에서 나온 탁상공론이 아니다. 2024년부터 유럽 스타트업 신을 상징하는 파란색 ‘EU Inc.’ 캡을 쓴 창업가들이 링크드인을 뒤덮으며 시작된 거대한 청원의 결과물이다.
독일 페르소니오(Personio)의 하노 레너(Hanno Renner), 딥엘(DeepL)의 야렉 쿠틸로프스키(Jarek Kutylowski), 요즘 유럽에서 가장 핫한 스타트업 러버블(Lovable)의 안톤 오시카(Anton Osika) 등 유럽 대표 유니콘 수장을 포함해 1만 3000명 이상의 혁신가들이 이 서명에 동참했다. “미국은 델라웨어가 있는데, 왜 유럽은 27번이나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라는 현장의 분노에 EU가 ‘시스템 개혁’으로 답한 것이다.
#EU Inc.로 무엇이 달라질까
스타트업에게 48시간은 단순히 서류 처리가 빨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확장 전략을 즉시 실행할 수 있는 시간이다. 지금까지 유럽 내 확장은 ‘첫 제품 출시’보다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다. 나라별 법인 형태와 회사법 및 노동법이 달라 한 국가에서 검증을 마쳐도 다음 나라에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EU Inc.가 도입되면 질문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창업가는 더 이상 “어느 나라 법이 유리한지” 고민하며 시간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 대신 “어떤 시장부터 공략할지”에 집중하면 된다. 법인의 지리학이 전략의 지리학을 가로막던 시대가 끝나가는 것이다.
유럽 스타트업 신이 이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투자 언어’의 통합이다. 그동안 유럽 VC들은 투자 검토 시 ‘법인 소재지’를 주요 리스크로 꼽았다. “독일 법인의 폐쇄성”이나 “프랑스 법인의 복잡함” 같은 논의가 딜 클로징을 늦췄다. 하지만 공통 프레임인 EU Inc.가 안착하면 투자자는 본질적인 질문, 즉 제품, 시장, 실행력에만 집중할 수 있다. 특히 스톡옵션 규정이 표준화되면, 국경을 넘어 인재를 영입하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대응해 유럽이 자본과 인재의 속도를 회복하려는 강력한 무기가 생긴 셈이다.
#한국 스타트업들도 ‘각개격파’에서 ‘통합 공략’으로
유럽 진출을 꿈꾸는 한국 스타트업에게도 환영할 만한 소식이다. 이제 첫 단추는 “어느 나라 법인이 유리한가”가 아니다. “EU 전역을 아우르는 확장형 구조를 처음부터 가져갈 것인가”가 핵심이다.
이 변화는 기회이자 도전이다. 복잡한 27개국의 행정 장벽이 하나로 줄어들어 진입 전략이 단순해지고, 이제는 규제를 바르게 뛰어 넘어 실력으로 평가 받는 시대가 될 것이다.
EU Inc. 법안은 2026년 1분기 내 구체화될 예정이다. 따라서 유럽에 진출하려는 기업들도, 이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유럽 내 2개국 이상을 동시에 운영할 계획인지, 유럽 VC로부터 글로벌 자금을 조달할 의사가 있는지, 현지 핵심 인재들에게 스톡옵션을 적극 활용할 것인지, 이 질문에 하나라도 해당한다면 EU Inc.는 매우 주목해야 할 뉴스다. 유럽은 지금 창업가들의 목소리를 반영해 거대한 ‘디지털 단일 운동장’을 만들고 있다. 우리 기업들도 유럽을 ‘각개격파’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 시장’으로 보고 전략을 다시 짜야 할 시점이다.
필자 이은서는 한국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베를린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예술의 도시이자 유럽 스타트업 허브인 베를린에 자리 잡고 도시와 함께 성장하며 한국과 독일의 스타트업 생태계를 잇는 123factory를 이끌고 있다.
이은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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