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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나] 독일에서 뒤늦게 만난 가사노동의 신세계

친정어머니에 의존했던 한국과 달리 집안일 매진하며 눈 뜨게 돼

2020.08.13(Thu) 09:36:44

[비즈한국] 지난 2~3주가량 좀 우울했다. 어이없게도 그 원인은 식기세척기 때문. 남의 집 식기세척기는 몇 년을 써도 고장 한 번 없이 멀쩡하다는데, 어찌 된 게 우리 집 세척기는 툭하면 ‘배수불량’ 사인과 함께 ‘삐삐’ 소리 내며 멈추기 일쑤였다. 한두 번 껐다 켜면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며칠씩 꺼두었다 작동시키면 잘 되는 경우도 있어서 이번에도 귀찮고 번거롭지만 며칠씩 기다려 다시 해보기를 두세 번 반복했다. 농담 삼아 ‘우리 집 세척기는 가끔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이번엔 그 수준이 아니었던 모양.

 

예정대로 8월 귀국이었다면 버티고 말았겠지만, 코로나 사태로 귀국이 두 달 연장되면서 잘 돌아가는 식기세척기가 너무나 그리웠다. 그 사이 예정돼 있던 저녁 식사 초대를 두 번 치르면서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한 상황. 1년 전 같은 문제로 수리 서비스를 받을 당시, 달랑 작은 부품 하나 교체하는데도 어마어마한 인건비 덕에 무려 120유로 넘는 비용이 나왔던 것을 떠올리며 잠깐 멈칫했지만, 이건 비용의 문제를 넘어서는 스트레스였다. 관리인이 수리비용을 내준 1년 전과 달리 이번엔 우리 측 책임이라며 수리비용을 전가한다 하더라도 나는 꼭 식기세척기를 고쳐야만 했다.

 

지멘스시티에서 만난 독일 주방의 예. 오래된 주택들은 주방이 독립적 공간으로 닫힌 경우가 많지만 새로 짓거나 리모델링을 거치는 집들은 대부분 오픈 주방 형태를 선호한다. 사진=박진영 제공


잦은 고장으로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애초 불량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나의 불만 가득한 이메일을 받고 관리인은 배관공을 보냈다. 그는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모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고, 새로운 제품으로 교체를 해주었다. 그것도 하이엔드 브랜드의 업그레이드된 제품으로.

 

3주 만에 식기세척기를 사용하게 되니 감동스러울 지경이었다. 원인 모를 통증이 있던 왼쪽 어깨가 매일 몇 차례씩 손 설거지를 하느라 악화되곤 했는데 그로부터도 해방이었다. 설거지가 뭐 그리 힘든 일이냐고, 과도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예 안 썼으면 모를까 있다가 없어지니 그 존재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게 느껴졌다. 한국에 돌아가 반드시 구비할 가전 1순위로 식기세척기를 꼽는 나를 이해할 수 없어했던 남편조차 지난 몇 주간 아픈 나를 대신해 잦은 설거지에 시달리는 동안 식기세척기 예찬론자가 됐을 정도.

 

독일 생활 초기만 해도 집에 멀쩡한 새 식기세척기를 놔두고 꼬박꼬박 손 설거지를 했었다. 손 설거지보다 물도 절약되고 더 깨끗하다고들 하는데, 일단 매 끼니 몇 개 안 되는 그릇을 세척기 사용을 위해 모아두는 게 성격에 안 맞았다. 몇 달을 그렇게 살다 손님 초대를 계기로 처음 써본 식기세척기는 신세계였다. 평소 같으면 설거지하고 물기를 닦아 넣느라 한 두 시간이 거뜬히 흘렀을 텐데 애벌 세척을 하고 넣어도 15분이면 끝나니 제대로 시간을 번 느낌이었다. 몸 편한 거야 말해 뭐할까.

 

독일의 대표 가전 브랜드 지멘스그룹에서 운영 중인 지멘스시티. 주방 가구 및 가전에 대한 모든 것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사진=박진영 제공


어쩌다 식기세척기 찬가가 되었지만, 독일 생활을 하며 나는 식기세척기 포함 수많은 홈 가전의 세계에 눈 뜨게 되었다. 독일이 가전의 나라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막상 내가 여러 버전의 가전에 ‘홀릭’ 하게 된 것은 유명하다는 독일 가전을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생활의 편리함 때문이었다. 기본 백색 가전 외에 작게는 계란을 삶는 미니 가전부터 제빵 등에 필요한 반죽기, 커피머신과 와인냉장고, 스테이크 전용 그릴까지, 살다 보니 하나 둘 늘기 시작한 가전들이 필요할 때 제때 기능을 발휘해주는 것만으로 생활이 윤택해진 느낌이랄까. 아직 들여놓지 않은, 눈여겨보고 있는 건조기와 로봇청소기까지 들인다면 보다 완벽해질 것 같은데 한국 가기 전에 현실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 그 외에도 어떤 가전들이 보다 삶을 이롭게 해줄 지 검색하는 게 귀국을 앞둔 나의 주요 일과 중 하나다. 

 

요즘 한국도 가정마다 필수 가전이 많이 늘었다던데, 심지어 로봇이 요리까지 해주는 스마트 주방이 멀지 않은 시대에 살면서, 나는 왜 오랫동안 ‘옛날 사람’ 마인드로 살았던 것인지. 문명의 이기를 일찌감치 활용했어야 하는데 독일 생활을 하고 나서야 눈 뜨게 된 데는 살림에 들이는 물리적 시간이 한국에서보다 월등히 많다는 배경이 있다. 결혼 후에도 살림을 거의 도맡아준 친정어머니 덕분에 기껏해야 주말에 한두 번 요리하고 정리하는 게 전부였으니, 딱히 집안일이 힘들다고 느끼지 못했던 것.

 

지난해 IFA에서 삼성이 선보인 퓨처 키친의 모습. 요리하는 로봇을 내 주방에서 만날 일이 그리 멀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진=박진영 제공​


반면 독일 생활을 하는 내내 기본 요리와 청소는 물론 잦은 손님 초대 및 학교 행사나 기념일 등에 제빵 제과까지 뚝딱 해내야 했으니 그나마 가전이 열일 해주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수밖에. 생활방식의 차이가 자연스레 변화를 불러온 셈이다. 

 

한편, 가전의 나라 독일에서도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보편적’ 가전이 있다면 바로 양문형 냉장고와 에어컨 등이다. 그나마 요즘은 양문형 냉장고가 제법 팔리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최근35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을 선풍기 한 대로 버티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하루 빨리 에어컨 보급이 시급하지 않을까 싶다.

 

글쓴이 박진영은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에 입문, 여성지 기자, 경제매거진 기자 등 잡지 기자로만 15년을 일한 뒤 PR회사 콘텐츠디렉터로 영역을 확장,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실험에 재미를 붙였다. 2017년 여름부터 글로벌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또 다른 영역 확장을 고민 중이다.

박진영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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