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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라마] 격동과 격정이 불꽃처럼 타오르네, '패션 70s'

시대의 아픔과 사랑 담은 드라마…그땐 고준희에 공감을, 이젠 한더미에 응원을

2020.10.12(Mon) 09:33:55

[비즈한국] 나는 ‘서브병’을 앓고 있다. 사연 있는 악역이나 입체적인 서브 캐릭터에 본능적으로 끌리는데, 여기에 작품성과 연기력까지 첨가되면 그야말로 환장한다. 2005년 방영한 ‘패션 70s’도 그랬다. 심지어 내가 몰두한 캐릭터 ‘고준희’를 연기한 배우가 김민정이었다. 2004년에도 김민정은 드라마 ‘아일랜드’에서 한시연 역할을 맡아 메마른 내 눈가를 짠하게 만들었다.

 

1940년대 태어나 6·25 전쟁을 겪고 격동의 70년대에 뜨거운 청춘을 살아가는 네 젊은이의 삶을 보여준 ‘패션 70s’. ‘다모’의 이재규 PD와 ‘국희’의 정성희 작가가 만나 평균 시청률 24%, 최고 시청률 31%라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진=SBS 홈페이지

 

물론 매력적인 서브 캐릭터만으로 ‘패션 70s’에 빠진 건 아니다. 이 드라마는 6·25 전쟁 당시의 어린 소년·소녀들이 운명으로 얽히는 과정과 1970년대에 청년이 된 그들이 또다시 질긴 운명에 휘말리는 과정을 격정적으로 그려낸다. 전쟁으로 온 나라가 폐허가 되었던 1950년대부터 가파른 성장과 국제 정세로 어지러운 197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그 시대 정치·외교 상황이 양념처럼 얽히고,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는 주인공들의 화려한 패션 흐름도 엿볼 수 있다. 캔디형 여주인공과 그녀만을 바라보는 남자 캐릭터들, 여주인공보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자신이 원하는 걸 얻지 못해 대척점에 선 서브 여주 캐릭터 등 빤한 설정이지만 ‘국희’, ‘황금시대’ 등 시대극에서 장기를 보인 정성희 작가의 필력은 이를 처절한 짠함으로 바꿔 놓는다.

 

사리원 군부대에서 얽힌 어린 강희와 어린 준희는 각자의 부모가 죽은 줄 알고 대구역에서 미제 군복을 훔쳐내 파는 등 끈끈한 자매애를 보여준다. 성인이 되어 고준희(김민정)와 한더미(이요원)라는 이름으로 만난 둘은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으나 김동영에 대한 사랑, 고준희라는 진짜 신분에 대한 진실과 그에 대한 집착이 얽히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사진=SBS 홈페이지

 

군부대에서 사업을 하던 고창회 사장(전인택)의 딸 고준희(아역 변주연)와 군부대에서 청소 일을 하며 몰래 물건을 빼돌리던 이양자(송옥숙)의 딸 한강희(아역 정민아), 그리고 강직한 김홍석 장군(최일화)의 아들 김동영(아역 김영찬)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갑작스럽게 1·4 후퇴를 맞으며 어린 준희는 군부대에서 깜짝 패션쇼를 하던 디자이너 장봉실(이혜영)의 아들 장빈(아역 은원재)을 만났다가 우연한 사고로 부모와 헤어지고, 어린 강희 역시 어머니와 헤어진다. 준희와 준희의 부모, 강희와 강희의 엄마는 필사적으로 서로를 찾아 헤맨다. 우연히 대구에서 상봉한 준희와 강희는 서로를 의지하며 살지만 탄피를 줍기 위해 몰래 군부대를 찾았다가 총격을 당해 헤어진다. 

 

‘패션 70s’는 여러 형태의 모정과 부정을 보여준다. 어린 강희가 부잣집 딸로 잘 먹고 잘 살길 바라는 마음에 자식을 버리고 온 이양자(송옥숙)나 아들 장빈(천정명) 때문에 ​자신의 커리어를 망쳤다는 마음으로 자식을 멀리하다 뒤늦게 후회하는 장봉실(이혜영)의 모정이 눈에 띄며, 강희를 고준희로 만든 고 사장(전인택)의 이해는 가지만 비뚤어진 부정도 인상적이다. 사진=SBS 홈페이지

 

‘패션 70s’의 흡인력은 몇 년간 전국을 헤매며 딸을 찾던 고창회 사장이 고아원에서 강희를 찾아 준희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 시작된다. 아내마저 잃고 준희를 찾던 고 사장은 강희를 딸로 키우기로 한다. 문제는 강희를 자신의 딸 고준희로 키운다는 점이다. 강희는 고준희의 이름을 부여받고 고준희의 생일과 나이로 살아간다. 강희를 고준희로 키우겠다는 고 사장의 선언은 엄청난 결과를 불러온다. 고 사장처럼 딸 강희 대신 고아원에서 어린 준희를 찾아낸 강희 엄마 이양자는 그 선언을 목격한 후, 자신의 친딸이 남부럽지 않은 부잣집 딸로 클 수 있도록 기억을 잃은 어린 준희를 자신의 딸 한더미로 만들어 외딴 섬으로 잠적해버린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1970년대, 맹골도에서 물질하며 자란 섬처녀 한더미(이요원), 정체성을 잃고 ‘고준희’로 살아남고자 남몰래 괴로워하는 고준희(김민정), 어린 준희를 찾으러 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회한을 간직한 채 준희로 사는 강희의 힘듦을 짐작하며 그녀의 곁에 있는 김동영(주진모), 역시 어린 준희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과 준희로 사는 강희가 못마땅한 장빈(천정명)이 있다. 운명처럼 이들은 다시 얽힌다. 

 

우여곡절 끝에 디자이너 장봉실의 제자로 받아들여진 한더미. 더미는 특유의 재능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장봉실을 놀라게 만들지만, 보다 많은 사람을 위한 패션을 추구하는 더미의 패션 철학은 소수의 귀족적 패션을 지향하는 장봉실과 반목하게 된다. 사진=SBS 홈페이지

 

디자이너 장봉실 밑에서 디자이너를 꿈꾸며 경쟁자로 만나게 되는 한더미와 고준희의 관계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만화 ‘유리가면’의 마야와 아유미 같은 관계지만 여기에 김동영의 사랑과 진짜 고준희라는 진실이 얽히며 파국으로 치닫는다. 

 

어릴 적 감정이 은연중에 남아 있던 걸까? 기억을 잃은 한더미와 그녀가 준희임을 몰라보는 김동영(주진모)은 운명처럼 서로에게 빠져든다. 그런데 아무리 김동영이 국방장관 아들이라 해도 30대 초반 나이에 대통령 비서관을 한다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 사진=SBS 홈페이지

 

나는 이때 남들보다 먼저 한더미가 준희임을 감지하고 어찌할 바 모르는 고준희의 심정에 매료됐다. 20년 가까이 고준희라는 가짜 정체성을 부여받고 완벽히 고준희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고준희가 진짜 준희를 발견했을 때의 그 복합적인 심정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20년 가까이 사랑한 김동영이 진짜 준희인 한더미를 사랑하고, 진짜 준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아버지 고 사장 또한 준희를 찾기 위해 절박해진다.

 

더 못 견디겠는 건 자신의 친엄마 이양자가 자신을 위해 진짜 준희를 한더미로 만든 가해자라는 사실이다. 어린 강희는 그저 친절하고 부유한 고 사장 밑에서 살고 싶다는 작은 욕심을 아주 잠깐 내비쳤을 뿐인데, 그 찰나의 욕심 때문에 엄마는 범죄자가 되었고 자신은 어린 준희의 모든 것을 빼앗은 가해자의 처지에 서게 된다. 

 

이름도 잃고 부친과 동영의 사랑도 잃을까 두려워진 고준희는 자살하고자 술에 수면제를 타지만, 그것을 고 사장이 모르고 마시면서 본의 아니게 아버지를 죽게 만든다. 절망에 빠진 고준희는 계획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진술하며 사형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준희야, 세상을 좀 더 살다 보면 그런 허명만큼 헛된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텐데. 사진=SBS 홈페이지

 

2005년 방영 당시 나는 고준희의 높은 프라이드가 서서히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이 애달팠고 그녀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됐다. 2020년의 나는 그저 고준희가 안타깝다. 20대의 나는 고준희의 절박한 심정에 공감했으나 2020년의 나는 인생에서 어떤 것이 중요한지 그리고 어떤 것은 지나고 나면 덧없기 짝이 없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인 것 같다. 

 

가짜 정체성의 허명(虛名)을 자신의 프라이드로 여길 만큼 고준희는 어리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반면 한더미는 진실을 알고도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 이양자에 대한 애정을 저버릴 수 없고 많은 사람이 다칠 것이 두려워 계속 한더미로 살고자 하는 대인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때는 고준희에 매료돼 한더미의 포용력을 몰라봤다.

 

‘패션 70s’는 한더미와 고준희가 사람을 대하고, 예술을 대하고,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극명하게 대조해 보여준다. 드라마는 고준희라는 신분에 집착하다 사고로 아버지 고 사장까지 죽음에 이르게 만든 고준희가 절망의 심정으로 사형을 받아들이면서 주인공 한더미보다 더 부각되는 스토리로 흘러간다(주인공을 맡은 이요원은 몇 년 뒤 ‘선덕여왕’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겪게 된다)​. ​한더미처럼 남을 배려하면서 자신의 삶에 책임지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지금은 뒤늦게야 한더미에게도 응원을 보내게 된다. 

 

드라마 주인공에 대한 시선은 조금 달라졌지만 기이하고도 짠한 모성과 부성의 면면, 듣고 있으면 피가 뜨거워지는 듯한 격정적인 BGM 등 ‘패션 70s’는 지금 봐도 흡입력이 뛰어난 드라마다. 앞으로 15년 뒤에는 또 어떤 심정으로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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