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금융 소외계층이 최소한의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금융기본권’을 법제화하는 방안이 국회에서 논의됐다. 금융 서비스를 모든 국민이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금융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을 개별 정책이 아닌 기본권 차원에서 접근해 재기를 단계적으로 보장하자는 취지다. 학계와 현장 전문가들은 금융기본권의 법제화를 통해 서민금융 지원 체계를 통합하고, 금융 배제로 인한 빈곤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6월 11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제2차 국민의 금융기본권 실현을 위한 정책토론회 및 금융기본권 연구단 출범식’이 개최됐다. 출범식은 신용회복위원회가 주관하고, 더불어민주당 민병덕·정태호·김현정·김남희·안도걸 의원실이 주최했다.
이번 출범식은 4월 27일 열린 1차 토론회 이후 열린 것으로, 금융기본권 법제화 논의와 더불어 학계·연구 기관·현장 전문가로 이뤄진 금융기본권 연구단을 출범시키는 자리였다. 연구단은 금융기본권 제도 및 법률안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1차 토론회에서는 금융기본권 개념을 제시하고 헌법상 행복추구권 관점에서 금융기본권 보장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기했다면, 2차 토론회에서는 구체적인 금융기본권 법제화 방안이 논의됐다.
금융기본권이란 모든 국민이 금융 서비스에 차별 없이 접근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을 공정한 조건으로 이용하는 권리를 뜻한다. 금융기본권 논의의 핵심은 ‘국민기초금융보장법’을 제정해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현재는 금융 취약계층의 구제가 햇살론과 같은 개별 상품이나 채무 탕감 정책 등으로 나뉘어 이뤄지고 있는데, 법안으로 통합적인 지원책을 마련하고 서민 중심의 금융을 만든다는 취지다.
국민기초금융보장법은 민병덕 의원이 발의를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입법 추진을 지원하기 위해 의원으로 구성된 입법지원단도 꾸려질 예정이다. 민병덕 의원은 11일 개회사를 통해 “1차 토론회에서 금융기본권이라는 개념을 화두로 던졌다면 2차 토론회는 담론을 민생 현장에서 작동할 입법으로 완성하는 자리”라며 “국민기초금융보장법은 공급자 중심의 금융시장에서 서민을 구하기 위한 무기다. 민생 금융을 시혜성 정책에서 헌법상 청구권으로 격상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김은경 신용회복위원회 위원장 겸 서민금융진흥원 원장은 ‘국민기초금융보장법’ 제정 추진 방안을 발표했다. 김 위원장에 따르면 국민기초금융보장법은 5대 금융기본권(접근권·생존권·재기권·자립권·자산형성권)을 기본 체계로 하고, 4대 기초 금융을 단계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골자다.
4대 기초 금융은 △기초 상담·채무 조정 △기초 보험 △기초 대출 △기초 저축을 지칭한다. 4대 기초 금융은 자립단계에 따라 기초 상담·채무 조정→기초 보험→기초 대출→기초 저축 순으로 차례대로 작동한다. 기초 상담·채무 조정 단계에서는 자금 지원 대신 채무 조정에 초점을 맞춘다. 이어 기초 보험에서는 다시 빈곤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기초 안전망을 확보한다. 안전망 구축 후에야 기초 대출로 자립 자금을 지원하며, 마지막 기초 저축 단계에서는 발생한 소득으로 자산을 형성해 빈곤 재진입을 차단한다. 법안은 시행 초기에는 취약계층을 우선으로 보장하나 중장기적으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확대한다.
김은경 위원장은 “금융기본권은 보호받을 권리를 혜택이 아닌 접근 가능한 법적 지위로 보장하자는 것이다. 최소한의 절대성을 보장해 금융취약계층을 보호하자는 취지”라며 “헌법상 내재된 권리지만 추상적이기 때문에, 권리를 구체화하려면 법제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헌법의 행복추구권(제10조)·인간다운 생활권(제34조)·공공복리를 위한 제한(제37조)을 금융기본권으로 구체화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긴급 지원 차원에서 극저신용대출을 시행했던 경기도에서도 금융 취약계층이 제도권에 속하지 못해 위기를 겪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발제자로 나선 석희정 경기복지재단 연구위원은 “금융 취약계층이 배제 메커니즘 안에서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이들은 사회의 금융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다”며 “현 제도는 재정 안정성을 이유로 신용등급 체계를 만들어 금융 소비자를 선별한다. 이 과정에서 배제된 이들은 대출이 불가능하니 불법사금융을 찾고, 악순환에 빠진다. 개인의 실패 탓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석 위원은 서민금융에서는 상환율이 아닌 회생률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극저신용대출자의 대출 상환율이 낮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민간 시장의 상환율을 그대로 적용하면 안 된다. 회수율이 아닌 회생률에 방점을 두고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 상환을 중심으로 하면 돈을 갚기 위해 또 고금리로 대출받는 악순환이 일어난다”며 “신용 회복률, 재취업·자활률, 채무 재발 방지율 등 새로운 성과 지표를 만들어 활용하고 이를 신용 점수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발제자로 나선 한재준 인하대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는 금융기본권 관점에서 채무 조정 방안에 관해 설명했다. 한 교수는 “금융기본권 차원에서 채무 조정을 할 때는 단순히 금융을 넘어 주거불안, 건강 악화, 사회적 고립과 같은 복합적인 문제를 함께 봐야 한다”며 “시장 실패의 교정과 헌법 가치의 실현에 정당성을 두고 채무 조정을 해야 한다”고 짚었다.
한 교수는 “지금까지의 채무 조정은 채권자-채무자 권리관계 조정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금융기본권 관점으로는 채무 발생 원인에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 채무에는 계약 불이행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직·도박·금융문맹·가족 해체 등 다양한 비자발적 원인이 있다”며 “금융 양극화 실태를 교정해야 개인의 채무 부담을 덜어주는 동시에 다시 제도권으로 들어오는 선순환을 만들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한 교수는 △헌법상 기본권 보장을 통한 금융기본권의 실질적 보장 △파산절차를 간소화한 직권 면책 트랙 신설 △채무 조정 유형별 차등 생계비 기준 △원스톱 통합 지원 플랫폼 구축을 통한 복합 지원 △채무자의 법적 지위 보장과 채무 조정 거버넌스 강화 등의 개선 방안을 제시했다.
이날 발제 후 이어진 토론에는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부 교수, 임정하 서울시립대 법전원 교수, 유경원 상명대 경제금융학부 교수, 윤영미 소비자와함께 대표, 김미선 롤링주빌리 본부장이 참석했다.
심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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