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비즈한국 BIZ.HANKOOK

전체메뉴
HOME > Target@Biz > 비즈

[기업의 흥망] 철강회사와 프로야구…'삼미 슈퍼스타즈'로 남은 삼미그룹

비관련 사업다각화 실패 후 '특수강' 집중했지만 외환위기로 해체…2대 회장은 도미니카에서 선교

2020.11.20(Fri) 17:35:28

[비즈한국] 삼미그룹은 ​1989년 ​11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1조 3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던 재계 순위 18위 대기업이었다. 1970년대 국내 최고층 빌딩이자 랜드마크였던 삼일빌딩을 본사로 두고 무역과 목재업으로 승승장구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지 오래다. 삼미그룹 오너였던 김현철 회장은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 해외에서 선교사로 지내고 있다.

 

#소규모 제조업체로 시작해 대형 무역업체로 성장

 

김두식 삼미그룹 창업주(1925~1980)​는 21세이던 ​1946년 서울에서 비누와 식용유를 만드는 소규모 제조업체를 차리며 사업의 꿈을 펼쳤다. 1950년 6·25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가 화공약품 사업을 이어가다 1954년 서울로 돌아와 청량리 일대에 목재 가공업체인 대일기업을 세웠다.

 

1982년 2월 5일 인천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삼미 슈퍼스타즈 프로야구 팀 창단식에서 삼미그룹 회장​인 김현철 구단주(왼쪽)가 이혁근 단장에게 단기를 수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두식 창업주가 목재 가공업에 뛰어든 이유는 6·25 전쟁 이후 훼손된 집, 공장, 관공서 등을 복구하기 위해 목재 수요가 높아질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예측이 들어맞으며 대일기업의 사세는 확장됐다. 1959년 2월 국내 최대 규모의 제재공장을 인천 만석동에 마련했다. 

 

전후 복구사업으로 목재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해외에서 목재를 수입할 정도였다. 김두식 창업주는 자연스럽게 수출입업의 흐름을 이해하며 무역업에 발을 들이게 됐다. 1960년 김두식 창업주는 (주)삼미사를 세워 건어물, 수산물 등 여러 품목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명에 ‘삼미’를 사용했다.

 

전쟁 복구가 마무리된 후에도 목재의 인기는 여전했다. 국내산 합판 수출이 크게 늘어난 덕에 삼미사는 대형 무역업체로 급격히 성장했다. 김두식 창업주​는 사업 영역을 점점 넓혀갔다. 1963년 원목을 수송하기 위해 삼창해운을 인수했고, 1967년 삼미광업개발을 설립해 광산업에도 진출했다. 삼양특수강과 한국특수강공업을 인수해 1975년 9월 삼미특수강주식회사를 세웠다. 1976년 자본금 3억 원으로 삼미문화재단을 설립했고 뒤이어 1977년 삼미금속, 1979년 시흥관광개발을 설립했다.

 

고도성장을 거듭한 삼미그룹의 성장세는 삼일빌딩으로 상징된다. 1968년 삼미그룹은 청계천 고가도로에 지하 2층~지상 31층 규모의 건물을 올렸다. 당시 대한민국 최고층 건물로 이름을 알린 삼일빌딩이다. 1970년 완공된 삼일빌딩은 84년까지 삼미그룹 본사로 사용됐다.

 

1970년부터 84년까지 삼미그룹 본사로 사용된 삼일빌딩. 사진=최준필 기자


삼미그룹의 기초를 다진 김두식 창업주는 1977년 골수암을 판정받고 3년의 투병 끝에 1980년 55세로 사망했다. 김두식 창업주의 뒤를 이어 장남 김현철 씨가 30세에 회장에 오르며 2세대 경영이 시작됐다.

 

#2세 경영 이후 외형 성장

 

30세의 이른 나이에 그룹 총수에 오른 김현철 회장은 당시 대부분 기업들과 비슷하게 몸집 불리기에 나섰다. 1982년에만 프로야구단인 삼미 슈퍼스타즈, 자동차 부품 회사인 한국단조, 삼미유나백화점, 삼미조선, 삼미전산 등을 인수·설립했다. 5개의 계열사를 두고 35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던 삼미그룹은 김현철 회장이 이끈 10년 동안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1989년 삼미그룹은 계열사 11개, 매출 1조 3500억 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여러 난관이 있었다. 무역, 해운, 광업, 특수강으로 성장한 삼미그룹은 1980년대 오일쇼크(석유파동)에 크게 흔들렸다. 그룹의 주 수입원이던 해운업이 휘청거리자 무역업 등 모든 업종에 악영향이 미쳤다.

 

김현철 회장은 1984년 삼미해운이 소유한 18척의 배와 수송권 등을 1770억 원에 매각하고 해운업에서 손을 뗐다. 1985년 프로야구단 삼미 슈퍼스타즈를 청보식품에 70억 원에 매각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3년 동안 45억 원이 넘는 적자를 기록했다. 삼미그룹 계열사들 가운데 프로야구를 통해 홍보효과를 누릴 수 있는 업종은 거의 없었다.

 

악화된 재무상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1984년 삼미그룹의 상징이던 삼일빌딩마저 295억 원에 매각하는 결정을 내린다. 삼미그룹은 여러 계열사와 사옥 등을 매각하며 자기자본 대비 은행 대출 비율을 493%에서 190%로 끌어내렸다.

 

한 차례 위기를 극복한 김현철 회장은 특수강 전문 그룹으로 사업다각화 방향을 변경했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삼미정공, 삼미이튼(상용차 앞차축 생산업체), 삼미켄하(지게차 포크 생산업), 삼미전자, 삼미아구스타항공을 설립했다. 캐나다 아틀라스, 미국의 알텍을 3000억 원 이상 들여 매입했다. 11개의 계열사 중 6개를 특수강 관련 업체로 채웠다. 

 

1985년 3저 호황, 자동차 경기 호황 등으로 특수강이 뜨는 상황은 삼미그룹에 호재가 되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얼마 가지 못했다. 금세 특수강 열기가 꺼지면서 해외 공장 삼미특수강은 1992~1993년 2년간 1685억 원의 적자를 냈다. 

 

그룹의 주요 사업인 특수강이 불경기에 시달리자 1991년부터 삼미그룹은 다시 한 번 자금 위기를 겪게 된다. 1992~1995년까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방배동 사옥, 토지, 공장부지, 유나백화점 등을 매각해 4000억 원 정도를 마련했지만 거듭된 적자로 불어난 1조 5000억 원의 부채를 해결할 수 없었다. 

 

1998년 6월 8일 삼미특수강 해고노동자들이 국민회의 여의도 당사 앞에서 상복을 입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외환위기에 결국 좌초

 

​1995년 12월 김현철 회장은 돌연 동생 김현배 씨에게 회장직을 넘긴다. 당시 김현철 회장은 노태우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검찰에 불려가기 일쑤였으며 언론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1996년 삼미그룹 회장이 된 김현배 회장은 삼미특수강 일부 설비를 포항제철에 7000억 원에 매각해 부채를 해결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곧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분식회계와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던 한보그룹 등 여러 대기업이 줄줄이 무너졌다.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은 삼미그룹을 옥죄었고, 자금난에 시달리던 삼미그룹은 결국 해체되고 만다. 

 

(주)삼미는 삼림종합건설 컨소시엄에 매각됐고, 삼미종합특수강은 법정관리를 받다가 2001년 현대자동차그룹에 편입된 후 2011년 현대비앤지스틸로 변경됐다. 대부분의 계열사들도 매각, 합병, 폐업을 거치며 뿔뿔이 흩어졌다.

 

한편 김현철 전 회장은 2002년 두 차례 직장암 수술을 받고 극적으로 회복한 뒤 2004년부터 아내와 함께 도미니카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동생 김현배 전 회장은 그룹 부도 이후 전해지는 소식이 없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핫클릭]

· [기업의 흥망] 중동서 승승장구하다 성수대교와 함께 무너진 동아그룹
· [기업의 흥망] 전두환 정권에 강제해체 당한 국제그룹
· [기업의 흥망] 제5공화국에 맞섰던 '레저산업 선구자' 명성그룹
· [기업의 흥망] 삼성가의 '아픈 역사' 새한그룹
· [기업의 흥망] 전자·중공업으로 다각화 시도했던 해태그룹의 몰락


<저작권자 ⓒ 비즈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