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비즈한국 BIZ.HANKOOK

전체메뉴
HOME > Target@Biz > 이슈

[기업의 흥망] 중동서 승승장구하다 성수대교와 함께 무너진 동아그룹

사우디 진출·리비아 대수로 공사 등 성공, 성수대교 붕괴 책임 회피해 국민적 공분…최원석 회장 사생활도 화제

2020.11.03(Tue) 18:00:24

[비즈한국] ‘동아그룹’은 1970년대 국내 건설업계에서 최초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하고 1990년대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국내 최고 건설업체로 자리 잡았다.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은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통해 기네스북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도 이름을 올렸다. 동아그룹은 한때 22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순위 10위에 올랐다. 하지만 동아건설이 시공한 성수대교가 붕괴되면서 국민적 공분을 샀고, 외환위기와 더불어 김포매립지 공사 문제로 유동성 위기를 겪다 2000년에 파산했다. 이후 동아건설 등 몇몇 계열사만이 다른 기업에 인수돼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유명인사들과의 4번의 결혼과 4번의 이혼 등 개인사로도 화제가 되었던 최원석 전 회장은 동아그룹 해체 후 학교법인 공산학원(동아방송예술대학교, 동아마이스터고등학교)의 이사장으로 조용히 지내고 있다.

 

지난 2003년 금융감독원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사진=이종현 기자

 

#동아그룹 탄생과 전성기

 

동아그룹의 역사는 1945년 최준문 창업주가 ‘충남토건사’를 설립하며 시작됐다. 최준문 창업주는 1949년 동아건설합자회사로 사명을 변경한 후 대천, 청라 등 여러 지역에서 토목, 건축 공사를 하며 업계에서 자리를 잡게 된다. 이후 1957년 동아건설산업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꿨다.

 

최준문 창업주는 1958년 흥일증권, 1966년 동아콘크리트, 1968년 대한통운, 1972년 대전문화방송 등을 인수, 설립하며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1974년 국내 건설업계 최초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1977년 최준문 회장은 건강 악화의 이유로 경영 수업을 받던 장남 최원석 씨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준다. 그룹을 물려받은 최원석 회장은 1983년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따내며 ‘동아건설’을 세계에 알렸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사하라 남부에 매장된 지하수를 끌어올려 리비아에 공급하는 프로젝트였다. 당시 리비아를 집권하던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5524km의 수로 건설을 목표로 삼았는데, 최원석 회장이 1983년 39억 달러에 달하는 1단계 공사, 1990년 62억 달러 규모의 2단계 공사, 1998년 51억 달러 규모의 3단계 공사를 모두 따낸 것이다.​

 

2000년 10월 31일 채권단의 워크아웃 중단으로 사실상 퇴출이 결정된 동아건설 직원들이 착잡한 표정으로 점심식사를 위해 사옥을 나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당시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20세기 최대 규모의 토목 공사’, ‘세계 8대 불가사의’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최원석 회장은 이 일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등재됐다. 1997년 동아그룹은 화려한 경력을 가진 동아건설을 필두로 11조 원의 자산과 22개의 계열사를 두었으며 재계 순위 10위의 재벌그룹이 되었다.

 

#성수대교 붕괴와 유동성 위기

 

1994년 10월 21일 아침 출근길, 성수대교의 중간 부분이 끊어져 6대의 차량이 한강에 추락하며 32명이 사망했다. 성수대교 시공사는 동아건설이었다. ​사고 직후 동아건설은 성수대교 하자 보수 기간인 5년을 잘 지켰다며 붕괴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밝혀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7년 후 대법원은 동아건설의 부실공사 때문에 성수대교가 붕괴됐다고 확정 판결했다.

 

성수대교 붕괴 사건으로 악화된 여론에 이어 유동성 위기가 찾아왔다. 동아건설은 해외공사에 치중해 국내에선 재건축·재개발 공사를 주로 했는데, 막대한 이주비용 때문에 제2금융권에서 돈을 끌어다 쓰곤 했다. 외환위기가 닥치자 재개발 주택사업 등에 투자한 1조 4000억 원 가량이 묶이게 된다.​

 

악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동아그룹은 김포 매립지 개발로 외환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동아건설은 공시지가만 1조 원에 달하는 370만 평의 김포매립지를 갖고 있었는데, 용도변경과 40억 달러의 외화 유치를 통해 토지 개발을 추진했다.

 

기존 3724만 2975.2㎡(1126만 6000평) 중 55%에 달하는 2075만 413.2㎡(627만 7000평)를 매립지 용도로 사용한다는 정부에게 권리를 넘겨주고, 한국전력에도 18만 1818.18㎡(5만 5000평)를 복합화력소 용지로 넘겨줬다. 정부와 한국전력은 용도변경을 통해 원하는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아그룹의 용도변경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농림부 장관은 이 땅이 처음에 농지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절대 용도변경이 안 된다고 밝혔다. 결국 동아그룹은 유동성 위기에 내몰린다. 1998년 최원석 회장은 부실 경영에 대한 책임을 지고 동아그룹의 경영권을 채권단에 넘기고 700억 원의 사재를 내놓았다.​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이 성수대교 붕괴 사건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검에 도착,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 뉴스

 

동아그룹 계열사들은 팔리거나 청산되어 사라졌다. 그룹의 핵심인 동아건설은 2000년 11월 부도를 맞았다. 2007년 프라임개발로 넘어갔다가 다시 한번 법정관리를 거쳐 현재는 SM그룹에 매각돼 명맥만 유지하는 상황이다.

 

#최원석 전 회장의 결혼 생활

 

최원석 전 회장은 현재 학교법인 공산학원(동아방송예술대학교, 동아마이스터고등학교)의 이사장으로 지내고 있다. 2017년에는 국세청 고액체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양도소득세 등 총 5건에 대해 5억 7500만 원의 세금을 체납했다.

 

2005년 7월에는 1조 2000억 원대의 분식회계를 한 뒤 7400억 원의 사기대출을 받고 비자금 184억 원을 만들어 횡령한 혐의(사기)와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비자금을 준 혐의로 각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최원석 전 회장은 4번 결혼하고 4번 이혼한 사생활로도 유명했다. 1969년 배우 김혜정 씨와 결혼했지만 이혼했고, 1976년 펄시스터즈 멤버였던 배인순 씨를 아내로 맞았지만 결국 1998년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1999년 최 전 회장은 27세 연하인 아나운서 출신 장은영 씨와 비공개로 결혼했다. 장 씨와는 12년 만인 2010년 끝내 결별했다.

 

일요신문 보도에 따르면 최 전 회장은 김혜정 씨와 혼인하기 전에도 ​​1964년 미스코리아 진 신영태 씨(개명 후 이름 신정현)와 결혼​했다가 1967년 이혼한 전력이 있다. 첫 번째 결혼 당시 최 전 회장은 최영택이라는 ​개명 전 이름을 사용해 세간에 이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핫클릭]

· [기업의 흥망] 전두환 정권에 강제해체 당한 국제그룹
· [기업의 흥망] 제5공화국에 맞섰던 '레저산업 선구자' 명성그룹
· [기업의 흥망] 삼성가의 '아픈 역사' 새한그룹
· [기업의 흥망] 전자·중공업으로 다각화 시도했던 해태그룹의 몰락
· [기업의 흥망] 정치와 자동차, 회장님 야망이 화근 된 쌍용그룹


<저작권자 ⓒ 비즈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