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애니메이션 ‘주술회전’을 좋아하는 이 아무개 씨(23)는 최근 수원 팔달구의 한 가챠 매장을 찾았다. 피규어 키링인 ‘메지루시’를 뽑기 위해서다. 이 씨는 원하는 캐릭터를 얻기 위해 같은 기계에서 12회가량 뽑기를 시도했지만 끝내 원하던 피규어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팬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인기 없는 캐릭터 두 종류만 네다섯 개씩 나왔다. 이날 이 씨가 쓴 금액은 약 7만 원에 달한다.
#전체 라인업 비율은 깜깜이
캐릭터를 활용한 랜덤 굿즈 소비가 하나의 놀이 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이른바 가챠(GOTCHA)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2023년 100억 원 수준에 불과했던 국내 가챠 시장은 지난해 500억 원을 돌파했으며, 올해는 1000억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대형 유통업체들이 잇따라 가챠 매장을 확장하고 있다는 점도 시장 성장세를 방증한다. 총 1000여 대의 가챠 기기를 배치한 HDC아이파크몰 용산점의 경우 월 매출이 20억 원에 육박하고, 롯데마트는 전국 112개 점포에서 가챠 기기를 운영하며 올해 8월까지 가챠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0% 신장했다.
서울 마포구 AK플라자 홍대점에는 200대가 넘는 캡슐토이 기계가 2단으로 길게 늘어서 있고, 홍대 인근에만 20여 개의 가챠샵이 운영 중이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베리파이드 마켓 리서치는 전 세계 캡슐토이 시장 규모가 2024년부터 2030년까지 연평균 10% 이상 성장해 6억 3000만 달러(약 9398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이렇게 규모가 커지는 데 비해, 소비자 보호 장치는 여전히 미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기 캐릭터만 미리 빼놓고 상품 구성을 임의로 바꿔치기했다는 의혹이 반복되는 데다, 유통 과정에서 전체 라인업이 모두 포함되지 않은 상품이 랜덤 굿즈처럼 판매되는 현상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비자가 전체 구성품을 확인하거나 문제를 제기할 방법은 제한적이다.
가챠 상품은 크게 △캡슐 토이 △랜덤 박스 △이치방쿠지 등으로 나뉜다. 캡슐 토이는 소비자가 일정 금액을 넣고 기계를 돌리면 캡슐에 담긴 상품이 나오는 방식이다. 랜덤 박스는 외형상 동일한 박스 가운데 하나를 직접 고르는 형태다. 이치방쿠지는 제비뽑기권을 구매한 뒤 뽑힌 등급에 따라 경품을 받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업계에서는 국내 업체가 직접 제작해 판매하는 ‘자체 쿠지’와 일본 등 해외 상품을 들여와 판매하는 ‘수입 쿠지’로도 구분한다.
문제는 상품이 랜덤으로 판매되지만 정말 무작위가 맞는지 소비자가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캡슐 토이는 기계 내부를 볼 수 없어 특정 상품이 반복적으로 나와도 구매자가 이를 사전에 확인하기 힘들다. 랜덤 박스 역시 ‘풀박스’ 단위로 들어온 상품의 경우 캐릭터별 배치가 일정한 경우가 많아, 직원이 인기 캐릭터 위치를 알고 따로 빼두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제기된다.
#현장에선 “중복 환불 불가”…같은 상품 나와도 책임은 소비자 몫
지난 13일 기자가 서울 마포구·용산구 일대 굿즈샵 여섯 곳을 둘러본 결과, 방문한 매장 모두 가챠 상품에 대해 “중복으로 인한 교환 및 환불은 불가능하다”고 안내하고 있었다. 특히 랜덤 박스의 경우 기존에 남아 있던 재고에 새 상품을 추가로 채워 넣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이 경우 한 기계나 박스 안에 동일 상품이 여러 개 섞일 가능성이 커진다.
무인으로 운영되는 캡슐 토이 매장도 상황은 비슷했다. 기자가 한 기계에서 5번 뽑았는데 모두 동일한 캐릭터가 나왔다. 매장 안에는 문의할 직원이 없이 중복으로 인한 교환·환불이 어렵다는 취지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뽑기 기계의 회당 이용 금액은 6000원이었다.
이날 마포구 굿즈샵에서 만난 문 아무개 씨(25) 는 “애니메이션 ‘은혼’을 좋아하는데, 최애인 긴토키가 나오면 좋겠다”며 “한 번 방문하면 보통 3만 원 정도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 씨는 “사람들이 원하는 캐릭터는 대부분 비슷해서 중고 거래 가격도 높다”며 “한두 번 만에 나오면 직접 뽑는 게 더 싸다고 생각해서 가챠를 하는데, 계속 안 나오면 생각보다 돈을 많이 쓰게 된다”고 했다.
미니 피규어의 경우 공식 매장에서는 대체로 4000~7000원, 일부 비공식 굿즈샵에서는 6000~8000원대 사이에 판매된다. 원하는 캐릭터를 얻으려고 반복 구매가 늘어나면서 소비자의 지출 부담도 커지고 있다. 중복 상품을 되팔거나 교환하는 2차 거래도 활발하다. 일부 인기 캐릭터나 한정판 제품은 정가의 몇 배에 거래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행법에는 오프라인 가챠 상품에 적용되는 별도 규정이 없다. 게임의 경우 게임산업법에 따라 확률형 아이템의 구성 비율과 획득 확률 등을 공개하도록 하지만, 오프라인 랜덤 굿즈는 규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오프라인 가챠도 소비자 보호 기준 필요
중복 상품과 빼돌리기 의혹이 커지자 일부 굿즈샵은 해명에 나섰다.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A 매장은 공지를 통해 “본 상품은 박스 단위로 유통되기도 하나 이번에 확보한 물량은 수입 당시부터 ‘풀박스’가 아닌 낱개 랜덤 상품 상태로 입고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희소성 문제로 전체 캐릭터가 모두 들어 있는 박스가 아니라 개별 상품 단위로 물량을 확보했다는 뜻이다. 이 경우 매장이 직접 인기 캐릭터를 골라 빼지 않았더라도 처음부터 특정 캐릭터가 판매 물량에 포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생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전체 라인업 중 무작위로 뽑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일부 상품만 섞인 상태에서 구매했을 수도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오프라인 랜덤 굿즈 시장에도 최소한의 표시 기준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가챠 상품이라고 하더라도 전체 상품 중 어떤 종류가 몇 개씩 들어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제공돼야 한다”며 “소비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상품을 뽑을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 예측한 뒤 구매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공정거래위원회 등 기관이 랜덤형 굿즈 판매와 관련한 정보 제공 기준이나 지침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구성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사업자에게도 반드시 불리한 것은 아니다. 소비자가 확률을 알고 도전할 수 있다면 오히려 구매 의욕을 높이는 효과도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최근 관련 상담이나 피해 사례를 살펴봤을 때, 기관 차원에서 부당성을 조사할 정도로 사례가 많이 축적된 상황은 아니다”며 “게임의 경우 관련 법이 있지만, 오프라인 가챠 상품은 규정이 불명확한 측면이 있어서 현재 랜덤 굿즈 판매와 관련해 소비자 보호 기준을 명확히 답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윤채현 기자
coguszz@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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