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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흥망] 80년대 명품 아파트 '우성' 삼풍백화점과 함께 쓰러지다

최승진 부회장 대학생 때 창업…강남 개발 뛰어들어 재계 순위 27위까지 올라

2021.06.15(Tue) 17:42:54

[비즈한국] 1974년 대학생 최승진은 아버지를 설득해 주택개발사업에 뛰어든다. 그리고 설립 5년 만에 주택건설 시장 9위에 올라섰다. 300만 원으로 시작한 우성그룹은 1980년대 명품 브랜드 입지를 차지하며 승승장구해 재계 순위 27위에 이름을 올릴 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우성의 성공신화는 길지 않았다. 1996년 총자산 2조 1000억 원을 보유하던 우성그룹은 196억 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를 내고 쓰러졌다. 

 

#국내 주택 건설에 집중한 ‘우성건설’

 

1974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무역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최승진은 건설에 관심이 많았다. 부친 최주호 씨 소유의 동대문구 중화동 ​1만 3000여 ㎡​ 부지를 담보로 300만 원을 대출받아 중화주택개발을 설립했다. 설립 3년 만에 이 회사는 자본금 10억 원 규모로 성장했다. 이때 상호를 우성주택으로 변경했다. 

 

1995년 7월 국회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국정조사특위에 증인으로 출석한 최승진 우성건설 대표가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최승진은 다른 건설업체들과 다르게 국내 주택건설에 집중하는 방식을 택했다. 특히 강남 개발에 집중해 1977년까지 서초구에 1944가구를 공급했다. 착공 실력을 인정받은 우성주택은 1978년 주택건설 지정업체 가운데 9위에 오르며 급성장했다. 최승진은 1979년 3월 (주)우성건설을 설립한 후 당시 합자회사였던 우성주택을 흡수합병해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우성건설은 서울 대치동, 잠실동 등에 주택을 건설하며 인기를 끌었고,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우성’은 명품 아파트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승승장구하던 우성건설과 달리 최승진 사장은 점차 사업다각화에 대한 고심이 커졌다. “주택사업은 한계가 있기에 다각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하던 최 사장은 1979년에 우성유통을 설립하며 업종 다변화를 시도했다. 

 

아파트단지가 건축되면 상가도 함께 들어서기에 유통업에 진출했고, 1979년 9월 서초동 우성쇼핑센터 지하 1층에 첫 점포를 열었다. 유통업만으로 부족했던 최승진 사장은 1985년 국제그룹이 해체되며 시장에 나온 원풍산업을 인수해 타이어와 모직업에 진출한다. 원풍산업은 우성타이어와 우성산업으로 분리했다. 

 

1986년엔 강남에 리베라호텔을 신축하고 호텔업을 하다 부도난 (주)만년장을 인수해 우성관광으로 사명을 변경해 호텔업에 진출했다. 1988년 우성그룹은 우성건설 등 4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매출 2630억 원으로 재계 39위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사이 최승진 사장은 우성그룹 부회장이 됐고, 아버지 최주호 씨가 우성그룹 회장에 올랐다. 우성그룹이 성장할 수 있는 배경에는 부친 최주호 회장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주호 회장은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함께 국내 최초로 화학섬유를 생산한 한일나이론을 창업했으며, 당시 제일모직 사장이던 성상영 씨와 폴리에스터 생산업체 대한합섬을 세우는 등 기업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삼풍백화점 붕괴 연루와 건설 경기 하락세로 몰락

 

1989년 아파트 건설 국내 1위 타이틀까지 거머쥔 우성건설은 당시 도급 순위 16위, 6만 가구 건설을 달성한 그룹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나머지 계열사들은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우성건설은 토목 부분 강화를 통한 종합건설업체로 도약을 꿈꾸며 1992년 삼민기업 인수를 시작으로 용마개발, 청우종합개발 등을 인수해 비계열사 형식으로 우성그룹에 편입했다. 

 

1990년대 들어 최승진 부회장은 레저 및 관광업 분야로 사업다각화를 시도했다. 한진개발(현 코레스코)을 인수해 부실 콘도를 사들였으며 (주)리베라를 통해 부산과 광주에 백화점 사업을 추진하고 안성 골프장 부지 확보에 나섰다. 코레스코가 운영하던 호텔 및 콘도는 10여 개에 달했다. 1996년 여러 노력 끝에 우성그룹은 매출 1조 2000억 원, 총 자산 2조 1000억 원으로 재계 27위에 올랐다. 

 

하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그룹에 자금경색이 심화됐고, 콘도 및 백화점 사업에서 큰 수익을 거두지 못했다. 건설업계도 상황이 점차 나빠졌다. 업계 전체에 찾아온 위기에 우성건설도 예외일 순 없었다. 미분양 아파트 물량이 쌓여 2800억 원이 묶였다. 이 와중에 1995년 붕괴된 삼풍백화점의 일부 층을 우성건설이 시공해 임원진 6명이 검찰에 소환되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우성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됐다. 

 

우성건설은 1996년 1월 18일 최종 부도처리 됐다. 당시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우성건설 본사 전경. 사진=연합뉴스


1995년 5월 우성그룹은 금융권으로부터 2050억 원의 융자를 제공받고 보유 부동산 및 계열사 매각 등 자구책도 내놓았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1996년 1월 우성그룹은 돌아온 어음 169억 원을 처리하지 못해 최종 부도를 맞았다. 부도 당시 우성그룹의 부채는 1조 6000억 원에 달했다. 1998년 2월 법정관리에 들어간 우성그룹은 2000년 12월 최종 파산선고를 받고 청산절차에 들어갔다. 

 

1996년 5월 한일그룹이 우성건설 등 모든 계열사를 일괄 인수하고자 했지만 한일그룹도 1998년 해체되면서 무산됐다. 당시 우성건설은 1만 6000여 가구를 건설하고 있었으며, 하도급 거래업체는 760여 개, 자재거래업체는 450여 개나 됐다. 우성그룹의 몰락으로 거래업체들도 피해를 면할 수 없었다. 또 3200억 원 규모의 공공토목공사, 800억 원대에 달하는 민간건축공사도 담당하고 있어 큰 피해가 우려되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범정부적 대책 마련을 지시할 정도였다. 

 

우성타이어는 넥센에 인수돼 넥센타이어로 사명이 변경됐고, 우성모직은 스쿨룩스에 매각됐다. 우성관광은 신안그룹에 인수되는 등 계열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우성건설은 파산절차를 밟은 후 사라졌다. 한편 최승진 전 부회장은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의 넷째 딸인 서미숙 씨와 이혼했다는 소식만 전해지고 이후 행적은 묘연하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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