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은중과 상연’을 보고 나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올 것 같다는 감상들이 SNS에 종종 보인다. PTSD는 아니어도, 묻어뒀던 과거의 감정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감상이 쉽지 않다는 이들도 많다. 그만큼 이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속내를 건드린다는 소리.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은 15부작으로, 요즘 보기 드문 긴 호흡의 드라마다. 그러나 속도가 감질난다고, 감정의 파고 때문에 감상이 쉽지 않다고 빠른 배속으로 보는 건 금물이다. 느린 호흡엔 다 이유가 있으니까.

‘은중과 상연’은 제목 그대로 류은중과 천상연이란 두 인물과 그들의 인연을 다룬다. 은중과 상연은 1992년, 초등학교 4학년일 때 만난다. 중고등학교 시절 친해지지만 헤어지게 되고, 대학 때 다시 만나 얽혔다 절교를 선언한다. 30대의 만남은 최악이었고, 10년 세월을 두고 다시 40대에 조우하게 된다. 한 줄 시놉시스는 이렇다. 매 순간 서로를 가장 좋아하고 동경하며, 또 질투하고 미워하며 일생에 걸쳐 얽히고설킨 두 친구, 은중과 상연의 모든 시간들을 마주하는 이야기. 두 인물의 전 생애와 켜켜이 쌓이는 감정의 굴곡을 좇아야 하니 호흡이 빠를 수가 없다. ‘사이다 전개’를 원한다면 애당초 ‘은중과 상연’을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부러움에서 출발한다. 초등학교 4학년 은중은 우유 배달하는 엄마를 따라 우연히 한 아파트에 들어간다. 채광 좋은 방이 여럿인 데다, 화장실이 두 개나 있는 아파트. 반지하 단칸방에서 엄마와 동생과 복작이며 사는 은중에게 그 아파트는 천국 같았을 테다. 누군지 모를 대상에게 “넌 참 좋겠다”라고 쓴 쪽지를 붙박이장 문 안쪽에 남길 정도로. 그 천국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인공이 상연이다. 뽀얗고 예쁜 얼굴에, 할아버지가 장관 출신이라는 상연은 은중네 반으로 전학오자마자 이내 선망의 대상으로 떠오르며 반장이 된다. 학급에서 인기만점인 남학생마저 짝꿍인 은중이 아니라 상연을 좋아한다. 알고 보니 은중이 제일 좋아하는 윤현숙 선생님도 상연의 엄마란다. 어린 은중에게 상연이 얼마나 부러움의 대상이었을지 짐작되지 않나.

그런데 모두의 선망의 대상으로 보이는 상연은 정작 은중의 것들을 갈망한다. 딸과 모든 일을 공유하고 이해하는 따스한 은중의 엄마가 부럽다. 오빠를 편애하고 자신에겐 엄격하기만 한 엄마가 은중에게는 자애로운 선생님이란 사실도, 자신과는 데면데면한 오빠 상학(김재원)이 은중에겐 웃는 표정을 보이는 사실도 신경 쓰인다. 반지하 단칸방에 살지만 기죽기는커녕 누구와도 친한 은중의 밝은 붙임성이 부러웠다.

거기까지였다면 은중과 상연의 관계는 흔한 친구 관계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연의 오빠이자 은중의 첫사랑 상학의 죽음이란 큰 사건이 일어난다. 설상가상 상연네 집안이 쫄딱 망해 이사하면서 두 사람 사이엔 몇 년간 공백이 생긴다. 어쩌면 그 공백이 두 사람의 질긴 인연의 향방을 지은 걸지도 모른다. 2002년, 대학 사진동아리에서 만난 은중과 상연. 은중 옆에는 공교롭게도 상연의 오빠와 같은 이름을 지닌 김상학(김건우)이 있었고, 은중은 어쩐지 상연이 신경 쓰인다. 두 여자와 한 남자라고 하면 흔한 청춘 드라마의 클리셰 같지만, ‘은중과 상연’은 그들의 관계를 뻔한 클리셰로 만들지 않기 위해 복잡미묘한 감정의 서사를 촘촘히 밀도 있게 쌓아간다.

‘은중과 상연’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사는 덴 이유가 있다. 누구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친구, 연인 등 여러 인연들이 생기고 그들 사이에 동경, 질투, 애증, 열등감과 콤플렉스 등 수많은 감정이 피어 오른다.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이야기와 보편적인 감정이니, 은중과 상연의 이야기에 자연스레 나를 대입하게 되는 것. 주인공들과 비슷한 연령대라면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의 풍경을 섬세하게 복기한 것에도 아련한 감정이 들 테다. 최근 몇 년 사이 레트로 바람을 타고 그 시절을 추억한 작품이 많긴 했으나 그 시대를 강력한 소재나 소품으로 삼으려는 강박이 느껴지는 사례가 많아 안타까웠다. 반면 ‘은중과 상연’은 그 시대를 섬세한 디테일로 접근하되 자연스러운 배경으로 묘사해 도리어 강하게 추억을 환기시킨다.

또한 은중과 상연을 연기하는 김고은과 박지현의 연기를 곱씹고 감탄하는 즐거움이 크다. 김고은이란 배우에 항상 감탄해 마지않았지만, 이번에도 역시 20대에서 40대에 이르기까지 나이대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선을 유려하게 표현한다. ‘유미의 세포들’ ‘재벌집 막내아들’ ‘재벌X형사’ 등으로 대중에 얼굴을 각인시킨 박지현은 이번 작품이 배우 커리어의 변곡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상연은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파괴할 줄만 아는, 이해하기 다소 어려운 역할이지만 박지현의 세밀한 연기로 다소의 납득을 충족하고 시청자로 하여금 저마다의 상연을 소환시킨다.

다만 40대에 시한부 인생이 되어 갑작스레 찾아온 상연과 그를 대하는 은중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릴지도 모르겠다. 스위스 안락사행에 동행해 달라는 상연의 ‘폭력적인 부탁’을 내가 접하게 되면 어떨지 계속 생각 중인데··· 글쎄. 쉬이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니다. 친구란 존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되는 것도 이 드라마를 보는 묘미이니, 이번 기회에 내 주변의 인연들에 대해 생각해보시라. 나이가 사십이 되고, 오십이 되어도 친구 관계로 고민하는 게 일상다반사더라. 그렇다고 과거 끊었던 은중이나 상연에게 새삼 연락하려는 시도는 금물. ‘시절인연’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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