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폭군의 셰프’의 아는 맛이 무섭다. 1회로 올해 tvN 토일 드라마 중 첫 방송 시청률 1위를 기록하더니, 4화에 이르러 전국 11.1%로 올해 tvN 드라마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불미스러운 이슈로 신예 배우가 남주인공을 맡게 되었으나, 도리어 전화위복이 된 모양새다. ‘폭군의 셰프’는 과거로 타임슬립한 셰프가 최악의 폭군이자 절대 미각의 소유자인 왕을 만나 벌어지는 서바이벌 판타지 로코. 이와 유사한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중은 빠르게 이 드라마에 빠져들고 있다. 어째서일까?

‘폭군의 셰프’에서 셰프는 연지영(임윤아). 2025년, 연지영은 프랑스 최고 요리대회에서 우승하며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의 헤드 셰프가 될 기회를 얻는다. 기쁨도 잠시, 어느 순간 500여 년 전 조선으로 타임슬립하게 된다. 사학자인 아버지의 부탁으로 고서적 ‘망운록’을 챙겨 귀국행 비행기를 탔다가 커피에 젖은 망운록을 닦던 중, 책의 한 구절을 읽는 순간 벌어진 일이다. 망운록 때문인지, 당시 있었던 개기일식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어떻게든 책을 찾아 돌아가야 한다.

연지영이 상대하게 되는 폭군은 이헌(이채민). 태어나 보니 왕이 될 운명이었고, 연지영이 타임슬립한 현재 조선의 왕이다. 구식례(일식이나 월식 등 이변이 있을 때 실행한 재난 의례)에 의례 대신 사냥을 떠나고, 전국 팔도에서 채홍사를 보내 여인을 진상케 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듯 보이나, 속내는 어린 시절 폐위당하고 죽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복수심으로 가득하다.
과거로 타임슬립한 연지영의 절대 무기는 요리. 처음 악연으로 마주한 왕 이헌이 까다롭고 예민한 입맛의 소유자인데, 연지영은 고추장버터비빔밥부터 수비드 스테이크, 오트 퀴진 등 현대 요리 기법을 총동원해 이헌의 혀를 사로잡는다.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는 왕이라지만 조선 시대에 듣도 보도 못한 음식에 놀라는 건 당연하다.

재미난 건 요리 과정을 사뭇 진지하게 담아내는 것과 별개로, 요리를 맛보는 이들의 표현은 만화의 한 장면처럼 풀어내 웃음을 준다는 점이다. 감칠맛 폭발하는 MSG를 첨가한 음식을 먹는 순간 눈동자가 번쩍 빛나는 건 기본, 사슴고기로 만든 육회 타르타르를 먹으면 사슴이 들판에 뛰노는 듯한 환각을, 완두콩 타락죽을 음미하면 햇볕 아래 영근 완두콩이 펼쳐지는 과장된 CG를 선보인다. 섬광이 스치며 환각 상태에 빠지는 장면에 ‘美味(미미)’라는 글자를 채워 넣는 식의 연출은 90년대 인기 애니메이션 ‘요리왕 비룡’을 연상케 한다.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피식 웃음을 자아낸다.
타임슬립물의 전형인 과거와 미래의 괴리에서 오는 코미디도 웃음의 큰 축이다. ‘폭군의 셰프’는 특히 코믹 연기에 능숙한 배우들 덕분에 웃음이 한층 맛깔나다. 4화에서 연지영이 간신 임송재(오의식)와 거래하며 가방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을 보라. ‘가방’을 설명하려 애쓰는 모습이 예능의 ‘몸으로 말해요 퀴즈’처럼 연출돼 임윤아와 오의식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맞물리며 웃음을 터뜨린다. 드라마 전반에는 영화 ‘공조’ ‘엑시트’, 드라마 ‘킹더랜드’ 등에서 발랄한 코믹 연기를 다져온 임윤아의 내공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12부작 중 4화까지 진행됐으니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서사 흐름이 친숙하고 편안해 진입 장벽이 낮다는 것도 강점이다. 연지영과 이헌이 ‘혐관(혐오 관계)’에서 시작해 ‘로맨스’로 발전할 것은 뻔하다. 전개 또한 빠른데, 이미 4화 말미에서 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 연지영의 요리로 어머니의 상실이라는 내면의 상처를 지닌 이헌이 치유될 것도 불 보듯 뻔하다. 실제로 그는 연지영의 첫 요리 고추장버터비빔밥을 먹으며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떠올리고 눈물을 흘렸다. 강목주(강한나), 제산대군(최귀화) 같은 빌런 포지션과 서길금(윤서아) 같은 동조자 포지션이 뚜렷하고, 여러 사극·타임슬립물에서 익숙한 클리셰들이 가득해 이야기에 녹아드는 데 무리가 없다.

또한 원작 웹소설 ‘연산군의 셰프로 살아남기’와 달리 ‘폭군의 셰프’는 원작을 각색해 실제 역사와 인물에서 모티프를 차용한 가상역사물이다. 역사 왜곡 논란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역사 마니아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미래에서 온 연지영이 연희군으로 아는 이헌은 우리가 잘 아는 연산군. 희대의 요부 장녹수를 강목주로, 왕위를 물려받을 뻔했으나 밀려난 제안대군을 제산대군으로 변주했다. 사극은 ‘역사가 곧 스포일러’라 결말의 긴장감이 떨어지는 편이지만, 가상역사물은 창작의 자유가 크다. 따라서 폭군 연희군과 연지영의 결말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증을 자극한다. ‘구르미 그린 달빛’, ‘철인왕후’처럼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면서도 역사와는 다른 결말을 보여준 사례가 있기에 이번 작품의 결말도 기대를 모은다.
다시 말하지만, 아는 맛만큼 무서운 게 없다. ‘폭군의 셰프’는 그 아는 맛을 극대화해 누구나 편안히 웃고 즐길 수 있도록 만든다. 넷플릭스를 통해 해외에도 공급되며 글로벌 흥행 중이니, 앞으로 어떤 기록을 세울지 알 수 없다. ‘대장금’, ‘철인왕후’에 이어 또다시 궁중 수라상이 해외 시청자들에게 강렬하게 각인될 수도 있겠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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