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전세 제도를 둘러싼 여론이 싸늘하다. 전세사기와 역전세, 갭투자 문제가 잇따라 터지면서 “전세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는 주장도 힘을 얻는다.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거액의 보증금을 빌리고, 그 돈으로 다시 집을 사는 구조가 정상적이냐는 비판이다. 실제로 전세가 주택가격 상승과 가계부채, 임대차시장 불안의 연결고리가 된 측면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전세를 없애는 것이 답일까. 이 질문에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전세는 단순한 임대차 계약 방식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높은 주택가격과 부족한 공공임대주택, 불안정한 노후소득, 낮은 금융자산 축적률 사이에서 작동해 온 일종의 민간 주거금융 시스템이다. 문제가 있다고 제도를 없애면, 그 제도가 감당하던 비용과 위험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이전된다.
전세를 폐지하거나 급격히 축소할 경우 그 비용을 가장 먼저 떠안는 사람은 집주인이 아니라 무주택 임차인이다.
#전세는 공짜 주거가 아니다
전세를 옹호할 때 흔히 “월세를 내지 않으니 공짜로 사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세입자는 집주인에게 거액의 보증금을 무이자 또는 저리로 제공하고, 그 기회비용을 임대료로 지불한다. 전세대출을 받았다면 은행에 이자도 낸다.
그런데도 전세가 필요한 이유는 월세보다 현금흐름 부담이 작기 때문이다. 전세대출 이자는 매월 소멸하는 비용이지만, 세입자 자기자본으로 충당한 보증금은 계약이 정상적으로 종료되면 돌려받을 수 있다. 반면 월세는 매달 지출되는 순수 소비다.
예를 들어 보증금 4억 원짜리 전세주택을 보증금 5000만 원, 월세 200만 원으로 전환했다고 가정해 보자. 세입자는 3억 5000만 원의 보증금을 돌려받지만 연간 2400만 원의 월세를 새로 부담해야 한다. 반환받은 돈을 연 3% 예금에 넣어도 세전 이자수입은 연 1050만 원에 그친다. 단순 계산으로도 주거 관련 현금지출이 연 1350만 원 늘어난다.
전세대출이 많은 가구라면 계산이 달라질 수 있지만, 전세의 월세화가 모든 임차인의 부담을 낮춘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다.
한국은행도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한국은행은 전세가 주거비 부담을 낮추고 자가 보유로 이동하는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해왔다고 평가한다. 반면 월세 전환은 저소득 임차가구의 소득 대비 주거비를 크게 높이고, 소비 여력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미 시장은 빠르게 월세로 이동하고 있다
전세 폐지를 논의하기 전에 현재 임대차시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부터 봐야 한다.
한국은행이 국토교통부 실거래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체 임대차 거래에서 월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5년 10월 계약일 기준 60.2%까지 높아졌다. 신고일 기준으로는 같은 달 63.5%였다. 비아파트 월세 비중은 77.2%에 달했다. 아파트 역시 전세 비중이 계속 줄어들고 준월세와 월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2025년 12월 한 달 동안 신고된 월세 거래는 16만 6895건으로 전년 같은 달보다 26.5% 증가했다. 월세가 전세보다 예외적인 임대 방식이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 대한민국 임대차시장의 다수 거래가 월세 또는 보증부월세로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문제는 월세 전환 속도다. 주택가격이 높고 임차가구의 소득 증가가 제한된 상황에서 전세가 급격히 줄어들면, 가계는 주택 구매를 포기하는 대신 월세를 지불해야 한다. 집값 10억 원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가구가 10억 원짜리 집을 사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가구는 어딘가에 거주해야 하고, 서울과 수도권의 일자리·교육·교통 접근성을 이용해야 한다.
전세가 사라지면 주거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보증금이라는 자산 비용이 월세라는 소득 비용으로 바뀔 뿐이다.
#월세화는 저소득층에게 더 가혹하다
월세의 가장 큰 문제는 가구의 매월 현금흐름을 훼손한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이 가계금융복지조사를 활용해 전세가구의 월세 전환 효과를 계산한 결과, 소득 1분위 가구의 소득 대비 주거비 비중이 특히 크게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아파트 전세보증금의 절반을 월세로 전환할 경우 1분위 가구의 주거비 부담률은 14.0%에서 29.4%로 뛰었고, 전액을 월세로 돌릴 경우 43.0%까지 올라갔다.
이는 단순히 주거비 항목 하나가 증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월세가 늘어나면 식비, 교육비, 의료비, 노후저축이 줄어든다. 소비가 위축되고 자산 축적 속도가 느려진다. 월급의 상당 부분이 매달 임대인에게 이전되기 때문에 자가 구입을 위한 종잣돈을 마련하는 기간도 길어진다.
한국은행 분석에서는 전세를 유지한 가구보다 월세로 전환한 가구의 신용대출 사용액이 더 많이 증가했다. 월세 부담으로 부족해진 현금흐름을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신용대출로 보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전세대출을 줄이면 가계부채가 줄어들 것 같지만, 임차인의 월세 부담이 커지면 신용대출이나 생활비 대출로 부채의 형태만 바뀔 수 있다.
전세 폐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전세보증금을 ‘숨겨진 부채’라고 비판한다. 틀린 지적은 아니다. 그러나 임대인의 부채를 줄이기 위해 임차인의 가처분소득을 희생하는 방식이 바람직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전세는 주택 선택의 자유를 넓힌다
전세의 또 다른 기능은 세입자에게 소유하지 않고도 상대적으로 질 좋은 주택에 거주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자기자본 3억 원을 가진 가구가 있다고 하자. 이 가구가 매수할 수 있는 주택과 전세로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의 입지는 상당히 다를 수 있다. 매매가격 9억 원, 전세가격 5억 원인 아파트라면 일정한 전세대출을 이용해 거주할 수 있지만, 매수하려면 훨씬 많은 자기자본과 주택담보대출이 필요하다.
직장 이동 가능성이 큰 청년층, 자녀 교육 때문에 일정 기간 특정 지역에 거주해야 하는 가구, 은퇴 이후 주택 규모를 줄이려는 고령층에게도 전세는 유용하다. 집을 반드시 소유하지 않아도 일정한 품질의 주거 서비스를 장기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1인 가구는 2024년 804만 5000가구로 전체 가구의 36.1%를 차지했다. 서울은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 비중이 39.9%에 이른다. 가구 규모가 작아지고 직업과 지역 이동이 잦아질수록 매수와 월세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 선택지의 중요성은 커진다.
전세는 모두에게 최선인 제도가 아니다. 하지만 전세라는 선택지를 없애는 것은 임차인의 선택권을 넓히는 정책도 아니다.
#전세가 사라진 자리를 누가 채울 것인가
전세 폐지를 주장하려면 마지막 질문에 답해야 한다. 전세가 사라진 뒤 수백만 임차가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공공임대주택이 충분한가. 아니다. 민간 장기임대주택이 안정적으로 공급되고 있는가.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월세 세액공제만으로 서울과 수도권의 높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가. 역시 한계가 있다.
결국 전세를 급격히 없애면 상당수 가구는 월세로 이동한다. 월세 비중이 높아지면 집주인은 안정적인 임대소득을 얻지만 세입자는 소득의 일정 부분을 매달 주거비로 지출한다. 자산을 가진 계층은 임대소득을 얻고 자산이 없는 계층은 노동소득으로 월세를 낸다. 부동산 자산 격차가 소득 격차로 전환되는 구조다.
전세는 완벽한 제도가 아니다. 주택가격 상승기에는 갭투자를 자극하고, 가격 하락기에는 역전세 위험을 만든다. 한국은행 역시 월세 확대가 가계부채와 주택시장 변동성을 낮추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제도의 부작용과 제도의 존재 이유는 동시에 볼 필요가 있다. 전세는 수많은 무주택 가구가 월세 부담을 줄이고, 일정 기간 자산을 축적하며, 매수보다 좋은 입지와 주거환경을 선택할 수 있게 해왔다. 이 기능을 대체할 공공임대와 민간 장기임대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세를 없애는 것은 개혁이 아니라 비용 전가에 가깝다.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전세 폐지가 아니다. 보증금이 안전하게 반환되는 전세, 집값 하락을 견딜 수 있는 전세, 갭투자의 연료가 되지 않는 전세다.
전세를 과거 방식 그대로 방치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전세사기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전세 자체를 퇴출하는 것도 위험하다. 전세가 사라진 자리를 차지할 것은 값싼 공공임대가 아니라 비싼 월세일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제도의 실패는 제도를 안전하게 고쳐야 할 이유이지, 서민에게 필요한 선택지를 없애야 할 이유가 아니다.
※필명 빠숑으로 유명한 김학렬 스마트튜브 부동산조사연구소장은 한국갤럽조사연구소 부동산조사본부 팀장을 역임했다. 네이버 블로그 ‘빠숑의 세상 답사기’와 유튜브 ‘스튜TV’를 운영·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3040 부린이 처음 부동산 투자(2026)’ ‘다시쓰는 대한민국 부동산 사용 설명서(2025)’ ‘경기도 부동산의 힘(2024)’ ‘서울 부동산 절대원칙(2023)’ ‘인천 부동산의 미래(2022)’ ‘김학렬의 부동산 투자 절대원칙(2022)’ ‘대한민국 부동산 미래지도(2021)’ ‘이제부터는 오를 곳만 오른다(2020)’ 등이 있다.
김학렬 스마트튜브 부동산조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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