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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국의 천지인] 창의와 놀이

혁신은 남다른 길 '비상도'…놀 줄 아는 아이들이 혁신도 만든다

2018.06.21(Thu) 09:23:12

[비즈한국] 구글, 애플, 아마존. 오늘날 거대한 혁신이 가져주는 선점효과를 의심하는 이는 없다. 그러나 누구나 혁신을 갈망하지만 이루는 이는 여전히 소수다. 

 

누구나 혁신을 갈망하지만 이루는 이는 여전히 소수다. 드론을 이용한 아마존의 배달 서비스. 사진=아마존


동양 고전 중에 가장 혁신적인 것 몇 권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노자’를 뽑겠다. 책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길은 길이지만 흔히 아는 그 길이 아니고, 이름은 이름이지만 알려진 그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중력이 있으니 분명 물이 가는 길이 있고, 지구가 도니 별이 가는 길이 있다. 이런 물리(物理)의 법칙은 상도(常道) 중의 상도일 것이다. 하지만 물은 그 길을 따라가면서 마주치는 장애물에 따라 수없이 모양을 바꾼다. 가끔 큰 물은 장애물을 뚫고 새 길을 낸다. 따라서 노자가 말한 ‘상도’란 물리 법칙을 벗어난 가상의 길이 아니라, 아마도 이제는 말라버린 옛 물길의 흔적일 것이다. 그리고 ‘상명’이란 말라버린 물길처럼 생명을 다한 제도를 뜻하는 것일 터이다.

 

이미 메마른 사막이 된 그 길을 고수하고 따라간다면 필시 고사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에 맞는 새 길을 찾고 새 틀을 만드는 것을 혁신이라고 말한다. 까마득한 옛날의 배, 서기전 3500년의 통 바퀴, 서기전 2000년 무렵의 살 달린 바퀴부터 근래의 기관차와 비행기와 인터넷까지 분명 거대한 혁신은 물리적인 길(道)과 관련이 있는 ‘남다른 길(非常道)’이었다. 남다른 길이 열리면 ‘남다른 제도(非常名)’가 따라온다. 항구와 열차역과 공항을 넘어 웹 상에 공간들이 생겨난다.

 

특히 근래 수많은 혁신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발생했으므로, 이 거대한 섬나라의 특성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필자의 직업인 작가도 인문계의 이론물리학 분야와 마찬가지다. 아무리 선하고 인내심 있는 독자라도 어제 쓴 글을 오늘 또 써먹는 작가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내용과 형식 모두 끊임없이 새롭고, 새 의미를 만들어가야만 작가로서 생존할 수 있다. 허나 창작의 세계에서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독보적인 아성을 구축하고 있다. 과연 이 땅에서 남다른 길을 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노자’에 버금가는 혁신적인 작품 하나를 또 꼽으라면 역시 서슴없이 ‘장자’를 꼽겠다. 여기에 유명한 나비가 된 장주(莊周) 이야기는 대강 이렇다. 꿈에 장주가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 다녔다. 물론 장주인 줄도 모르고. 꿈을 깨니 장주였다. 혹시 나는 꿈을 깬 장주가 아니라, 꿈을 꾸고 있는 나비가 아닐까? 분명 나비와 장주는 다른데.

 

자신이 나비라 착각한 정도로 사물에 가까워지는 것을 ‘장자’는 물화(物化), 즉 ‘사물이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얼마나 사물과 가까워져야 사물 자체가 될까? 사물 자체의 눈으로 보는 세계는 완전히 독창적일 테니, 그 관점에서 가는 길은 ‘비상도’가 분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단히 구체적이다. 

 

라이트 형제는 날고 싶었고, 새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서 비행기를 만들었다. 자유형 수영의 새 장을 연 알렉산더 포포프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물고기와 가장 가까워져야 가장 빨리 헤엄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선수가 초시계를 들고 0.1초를 단축시키기 위해 심장과 폐를 극한으로 단련할 때 그는 물고기를 모방하는 연습만 반복했다. 물고기와 가깝지 않은 방식으로 하는 훈련은 사막에 흔적만 남은 메마른 물길을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아예 하지 않았다. 그의 후배 펠프스는 돌고래의 동작을 가장 열심히 모방해서 무적이 되었다. 

 

그러므로 혁신의 길은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도박이 아니라, 모르는 법칙을 찾고 노력하는 겸손의 길이다. 전파는 보이지 않지만 공간을 통과해 정보를 실어 나른다. 보이지 않는 길, 최고도의 ‘비상도’가 있다는 신념을 가진 이들이 노력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보이는 세계만 믿고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비상도를 끊임없이 실천하는 인간군이 있다. 바로 상도에 오염되지 않은 어린이들이다.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비상도를 끊임없이 실천하는 인간군이 있다. 바로 상도에 오염되지 않은 어린이들이다. 어린아이는 지표면을 움직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여 땅을 파고 나무에 오른다. 웅덩이가 보이면 꼭 들어가고, 불을 손을 델 때까지 가지고 무언가를 해야 그친다. 전 세계 아이들은 모두 물화의 경지에서 논다. 새 길을 찾고자 하는 그들의 갈망과 실제 성취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왜 어떤 곳의 아이들은 새로운 길을 여는 이로 자라고, 어떤 아이들은 정해진 길만 따라갈까? 혹시 물아일체가 되어 노는 것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지쳐 쓰러질 때까지 노는 아이들이 거리에 득실거릴 때 비로소 최소한 창의력이 부족해서 허덕이는 사회는 면하지 않을까?

공원국 작가·‘춘추전국이야기’ 저자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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