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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의 계정공유] '노무사 노무진' 죽은 자의 원혼보다 무서운 건, 산 자의 무관심

기계 사고, 병원 '태움', 고용주 갑질 등 무거운 주제를 코믹하게 풀어낸 '리얼리즘 판타지'

2025.06.18(Wed) 11:07:38

[비즈한국] “학생들도 졸업하고 나면 학생이 아니라 노동자야. 이분들의 오늘이 당신들의 미래가 될 거라고.”

“저희는 법대생인데요?”

 

‘노무사 노무진’ 6회에서 나오는 대사다. 청소 노동자들을 손쉽게 해고하려는 꼼수로 대학교 측에서 청소와 무관한 ‘교양시험’으로 갑질을 벌인다. 주인공 노무사 노무진(정경호)의 도움을 받아 청소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을 벌이자 이에 대해 일부 학생들이 수업권 침해에 따른 업무방해혐의로 고소를 하겠다며 파업 중단을 요구한다. 그 모습을 보고 학생들에게 가한 일침과 돌아오는 답변이 저것이다. 

 

애초 생각도 못했던 노무사의 길에 들어서게 된 노무진. 당연히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힘을 쓰는 선비라는 뜻의 노무사의 마인드는 장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사진=MBC 제공

 

“저희는 법대생인데요?”라는 말에는 무수히 많은 함의가 담겨 있다. 그 답을 하는 학생의 표정에는 청소 노동자에 대한 무시와 함께 ‘우리는 다르다’는 선민의식이 진하게 담겨 있다. ‘노동자’란 단어에 대한 혐오도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 모두 어느 순간 알게 되지 않나? 나이를 들먹거리고 싶진 않지만, 살다 보면 인생 마음대로 되지 않고, 또 길게 보면 인생 별거 없다는 거.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거. 법대생이란 자부심이 넘치는 그 학생 또한 나중에 변호사가 된다 한들 고용된 변호사라는 노동자의 위치에서 일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책상에서 서류 뒤적거리며 일하고, 남들에게 ‘변호사님’이라고 대접받는다 한들 노동자란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어느 순간 그 역시 누군가에게 고용된 노동자로 취급당하는 모멸의 순간이 있을 텐데, 그때도 ‘그래도 난 변호사니까’ 하고 자위하려나. 

 

언니와 별거 중인 형부 노무진을 돕는 처제 희주와 희주를 짝사랑하는 기자 출신 유튜버 견우. 노무진과 함께하는 셋의 ‘케미’가 상당히 좋다. 이들의 천연덕스러운 코믹 연기가 무거운 드라마 속 에피소드들을 달랜다. 사진=MBC 제공

 

청소 노동자들을 대하는 학생들의 선민의식과 무례는 그 다음 대사에서도 이어진다. “여러분들의 월급이 저희들 등록금에서 나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세요.” ‘돈을 주는 우리가 갑’이라는 황금만능주의가 절절히 녹아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노동자에 대한 기본적 무시와 황금만능주의. 5, 6회에서 나오는 명문대 청소 노동자 에피소드뿐 아니라 ‘노무사 노무진’에 나오는 대부분의 노동 문제 에피소드가 이로 인해 벌어진다. 이 나라에서 하루 평균 1.6명이 일하다가 사고를 당해 사망하는 근본적인 원인 또한 이로 인해 벌어지지 않나 싶다. 노동자에 대한 무시가 없다면, 노동자를 그저 내 주머니의 돈을 불리게 하는 기계 취급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사람이 죽어 나가도록 시스템 구조를 방치하지 않겠지. ‘노무사 노무진’은 그러니까, 노동 문제를 들여다보면서 이런 일들이 자행되는 현실이 왜 여전한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드라마다. 

 

산업 재해 가능성이 높은 현장을 급습했다가 진짜로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던 노무진. 그가 살아난 것은 의문의 보살 때문인데. 사진=MBC 제공

 

재미난 건 ‘노무사 노무진’의 주인공 노무진 역시 노동자의 현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인물이었다는 점. 오히려 노무진은 앞서 언급한 “저희는 법대생인데요?”에 가까웠던 위치의 인물로 볼 수 있다. 법대를 졸업했고, 변호사시험에 붙진 못했지만 대기업에 취직했다. 파이어족이 목표였던지라 화끈하게 코인과 선물 투자도 감행했다. 그러나 쫄딱 망해 겨우 전공 살려 공인노무사 자격증을 딴 케이스. 돈을 벌기 위해 처제인 희주(설인아)와 기자 출신 유튜버 견우(차학연)의와 함께 산업재해 발생 가능성이 높은 현장을 급습해 협찬금을 뜯는 일을 하는 것만 봐도 그는 ‘일할 노(勞), 힘쓸 무(務), 선비 사(士), 즉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힘을 쓰는 선비인 노무사’와는 거리가 멀다. 

 

그랬던 그가 진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힘을 쓰는 선비로 거듭나게 되는 건 얄궂게도 판타지의 영역 덕분이다. 노무진이 산업 현장을 찾았다 죽음에 순간에 처하고, 그때 그를 살려준 의문의 보살(탕준상)과 불공정 계약을 맺는 바람에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 죽은 원혼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성불시켜야 하는 게 계약 조건이다.

 

위아래도 청재킷과 청바지를 입어 ‘청청맨’이라 불리는 의문의 보살. 노무진에게 산업 재해로 죽은 원혼들을 성불시키라는 조건을 걸고 목숨을 살려준다. 누가 봐도 전태일 열사를 모티프로 했다. 사진=MBC 제공

 

그렇게 보기 시작한 원혼들의 면면은 하나같이 애처롭다. 실습을 나갔다가 공장 기계에 끼어 죽은 특성화고 실습생, ‘태움’을 당하고 의료사고 과실 누명을 쓰고 자살한 간호사, 그리고 앞서 언급된 ‘갑질’ 당하는 청소 노동자들. 그들이 겪는 현실이 21세기 대명천지에 일어나는 일들이 맞나 분노하게 되지만, 사실 우리는 안다. 그런 사연이 실린 뉴스들을 반복해서 보아왔다. 구의역 김군 사건이나 제빵공장에서 기계에 끼여 사망한 숱한 노동자들의 사망 사고를 기억한다. 그럼에도 그저 안타까워만 하고 소소하게 분노하고 말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내 일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일 거다. 원혼을 보기 전의 노무진처럼, 혹은 명문대 법대생처럼. 

 

공장에서 기계에 끼여 죽고, 병원에서 선배 간호사들의 ‘태움’과 위계로 누명을 씌우는 의사로 인해 자살하고, 고용자 측의 무례한 갑질로 인한 스트레스로 숨지고. 노동자들이 죽는 이유는 숱하게 많다. 사진=MBC 제공

 

드라마 속 묘사된 에피소드들은 모두 현실에 있었던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 앞으로 나올 에피소드들도 마찬가지. 폭염 속에서 마트 카트 수거 일을 하다 숨진 노동자 에피소드가 7~8회에 허윤재(유선호)를 통해 등장할 예정이다. 노무진의 아버지 노택용(최홍일)이 경비원으로 일한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뉴스에서 많이 본 ‘매 맞는 경비원’ 등 갑질에 시달리는 경비원의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이런 일련의 사례들은 모두 무겁기 그지없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친 일이 아니라면 무겁고 어려운 일들을 외면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노무사 노무진’이 택한 방식이 코믹 판타지 활극이란 장르다. 보살의 존재가 전태일 열사로 추정되지만 굳이 이를 명명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인 듯. 

 

대명천지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놀라움도 잠시, 사실 우리는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걸 안다. 슬픈 건 그 와중 ‘태움 빌런’으로 나오는 가해자 또한 어떤 의미로는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 사진=MBC 제공

 

우리나라에서 날고 기는 대기업들의 창업주들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는 안 된다’였던 것처럼, 여전히 노동자 그리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말하는 노조에 대한 불편한 시선은 암암리에 존재한다. ‘노무사 노무진’은 그 불편한 시선이 온당한 것인지를 들여다본다. 외면했던 그 문제들이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는 일들이며, 또한 내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직시한다. 무겁지만,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유쾌한 결론을 곁들이면서. 

 

드라마 속에서 현실의 있는 자, 고용자들이 뜨끔이라도 하는 시늉을 하는 게 카메라, 그것도 대중의 시선을 담보로 한 유튜버의 카메라란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사진=MBC 제공

 

현실에선 원혼 보는 노무사와 재기 넘치는 크리에이터 일당들의 기지로 모든 일들이 해결되진 않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유구했던 노동자에 대한 시선이 이 한 편의 드라마로 달라질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누구도 직시하지 않으려 했던 문제를, 그것도 지상파 드라마에서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소중하다. 다만, 드라마를 연출하는 임순례 감독의 노동권 침해 논란이나 드라마를 방영하는 MBC의 기상캐스터 직장 내 괴롭힘 사건 논란 등을 떠올리면 묘한 느낌도 든다. 노동 문제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이렇게나 오묘하고 어렵다.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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