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비즈한국 BIZ.HANKOOK

전체메뉴
HOME > Target@Biz > 이슈

"물건 받아 보관만" 승락하자 지옥문, '로맨스 스캠' 풀스토리

종교 연결고리로 신뢰 쌓아…1년 6개월 만에 법률구조공단 도움으로 일부 회수

2018.10.12(Fri) 16:29:12

[비즈한국] 선교사 박 아무개 씨(여)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지난해 3월이다. 페이스북에서 한 남성에게 친구 신청을 받았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푸른 눈과 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미국인이었다. 

 

그는 자신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미 해병대 장교로 복무 중이라고 소개했다. 계급장이 달린 정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보다 눈에 띈 건 정보 카테고리에 적힌 성경 구절이었다. 많이 읽히지 않는, 성경 공부를 오래 한 사람만 알 수 있는 문구였다. 그리고 박 씨가 늘 외우고 다니던 구절이기도 했다.

 

남성은 박 씨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끔찍한 전쟁터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내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그와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국군 활동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많이 알고 있을수록 속는 건 쉬웠다. 박 씨는 예비역 장교 출신의 가족이 있다. 선교 활동도 군부대에서 하고 있다. 파병을 간 군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박 씨는 남성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저 친근했고 달콤했으며 또 안쓰러웠다. 조금씩 삶에 그가 녹아들었다. 그와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한 달 뒤, 그가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다고 했다. 달러가 든 상자를 택배로 보낼 테니 보관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직접 한국에 방문해 본국(미국)으로 보낼 것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박 씨가 “직접 미국으로 보내면 되지 않느냐” “나를 어떻게 믿고 보내느냐”고 묻자 남성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최근 폭격을 받아 긴박한 상황이다. 은행이 곧 폐쇄될 예정이다. 비밀스러운 돈이라 직접 미국으로 보낼 수 없다. 부탁한다. 직원이 따로 전화를 할 거다.” 

 

박 아무개 씨가 외국인 남성과 페이스북 메신저로 나눈 대화. 남성은 박 씨에게 ‘유엔 안보 담당관과 외교 면제 특성 서비스를 통해’​ 돈을 보냈으며,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터

 

박 씨가 녹음한 전화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자신을 ‘에이전트’라고 소개한 다른 남성이 이름과 주소를 밝히며 박 씨에게 주소를 묻는다. 어눌한 한국말은 없다. 다짜고짜 돈을 달라고도 하지 않는다. 유창한 영어로 “일반 화물이 아닌 ‘비공식 외교루트’를 통해 보낼 예정이다. 물건(달러)을 받고 보관만 해달라”고 말한다.

 

문제는 박 씨가 승낙한 이후부터 시작됐다. 페이스북 남성과 ‘에이전트’는 갑자기 택배비와 ‘해외 거래 인증서 발급’ 등의 명목으로 400만 원을 요구했다. ‘물건(달러)’이 한국에 무사히 도착하면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그들이 알려준 계좌번호는 한국의 한 은행의 계좌였지만 박 씨는 의심 없이 돈을 보냈다. 

 

이제 박 씨는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는 롤러코스터에 올라탔다. 그들은 물건을 보관만 해주면 보내준 돈은 물론 30만 달러에 달하는 수수료를 챙겨준다고 했다가, “일이 틀어졌다” “세관에 적발됐다”며 추가 송금을 요구했다. 박 씨의 판단력이 흐려졌다. 그동안 보낸 돈만이라도 되찾기 위해 그들의 요구를 들어줬다. 

 

송금액은 점점 불어났다. 모아뒀던 돈에 대출까지 받아 이들에게 보냈다. 박 씨가 4개월간 수차례에 걸쳐 그들에게 보낸 돈은 총 8800만 원이다. 이 과정에서 페이스북의 남성과 에이전트는 성경 구절을 외고, 자신의 여권 사본과 집 주소, 전화번호까지 알려주며 박 씨를 안심시켰다. 사기라는 걸 알게 된 건 그다음 일이다. 우연히 뉴스에서 ‘마크 밀리 미국 육군 참모총장’​의 사진을 봤다. 남성이 페이스북에 올려놨던 사진과 같았다. 

 

박 씨가 외국인 남성과 교류할 당시 촬영한 페이스북. 사진은 마크 밀리 미 육군참모총장이다. 남성은 사진첩에도 마크 밀리 미 육군참모총장의 사진을 여러 장 올려놨다.

 

# 순식간에 빠진 덫, 기댈 곳은 없다

 

박 씨가 당한 사기 수법은 ‘로맨스 스캠’으로 불린다. 스캠은 카지노에서 속임수를 뜻하는 말로, 로맨스를 가장한 사기를 의미한다. 최근 국내에서 신종 사기로 주목받고 있지만, 오래 전부터 ‘나이지리안 메일’이란 이름으로 전 세계를 떠돌던 수법이다. 나이지리안 메일은 나이지리아 왕족의 자손이나 백만장자의 자녀를 사칭한 뒤 ‘국내 자산을 해외로 빼돌리는 데 도와주면 돈을 주겠다’는 편지를 불특정 다수에게 보내 주로 세금이나 수수료, 운송료 명목으로 돈을 뜯어낸다.

 

얼핏 보이스피싱이 떠오르지만, 현행법은 두 범죄를 다르게 취급한다. 2011년 보이스피싱 피해가 급속도로 불어나면서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최근까지 강화되고 있지만, 박 씨가 당한 사기 수법엔 해당되지 않는다. ‘물건을 보관해달라’는 부탁이 발목을 잡았다. ‘택배 수령’을 목적으로 돈을 송금했다면 보이스피싱이 아닌 ‘물품사기’에 속한다.

 

돈을 되찾는 건 그만큼 어려워진다. 박 씨는 사기라는 사실을 알고 은행, 금융감독원, 경찰을 찾아갔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모두 같았다. 은행과 금감원은 전기통신금융사기에 해당하지 않으니 도와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여기에 은행은 처음 박 씨의 민원을 받고 앞서의 ‘에이전트’가 계좌에서 돈을 인출할 수 없도록 ‘지급정지’를 걸었지만, 이후 물품사기라는 결론을 내린 직후 지급정지를 풀어버렸다. 

 

경찰 수사도 난항을 겪었다. 남성들이 모두 가명이었던 데다, 실제 외국인이라 추적이 쉽지 않았다. 일단 은행을 설득해 다시 지급정지 조치를 취해달라고 했던 게 전부였다. 이 경우  돈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범인이 돈을 옮기기 전에 잡거나, 직접 범인과 은행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박 씨는 돈을 되찾았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의정부지부의 도움을 받아서였다. 물론 이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의정부지부는 먼저 ​‘에이전트’에게 ​부당이득 등의 이유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내고 법원 판단을 받은 뒤, 다시 에이전트와 은행을 상대로 채권압류추심 소송을 제기해야 했다. 승소하면 은행이 임의로 에이전트의 계좌에서 돈을 빼내 박 씨에게 돌려줄 수 있다.

 

최근 법원은 채권압류추심 소송에서 법률구조공단의 손을 들어줬다. 박 씨는 남성 일당이 지급정지 직전 인출해간 3000만여 원을 제외한 나머지 돈을 돌려받았다. 박 씨가 사기를 알아챈 지 1년 6개월 만의 일이다.

 

대한법률구조공단 의정부지부 관계자는 “아직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이지만, 법원이  사기로 판단하고 돈을 지급하라고 결정한 것”이라며 “소송 과정에서 에이전트의 계좌가 몇 개 더 있는 것으로 확인했다. 박 씨가 보낸 돈을 다 찾지 못했고, 다른 피해자들도 더 있을 것으로 보여 공단이 직접 추가 소송을 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 SNS 친구가 금품 요구하면 범죄 의심해야

 

금융권과 수사기관 관계자들은 박 씨가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입을 모은다. 계좌에서 돈이 모두 빠져나가기 전에 지급정지 조치가 취해진 게 결정적이었고, 대응도 빠른 편에 속한다는 설명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이런 형태의 사기는 피해자들이 수치심, 두려움에 신고를 망설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범인 검거나 돈을 되찾는 일은 더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기자가 박 씨를 만난 건 지난해 7월. 현재까지 “박 씨와 같은 수법의 사기를 당했다”는 제보를 총 17건 받았다. 제보를 종합해보면, 접근한 남성들의 신원은 제각각이지만 박 씨와 비슷한 시기에 연락을 주고받았다. 제보자들은 모두 교회를 다니는 군인 가족이었으며, 자녀를 둔 여성들이었다. 대부분 페이스북에 관련 정보를 공개해뒀다.

 

실제 이 사건을 수사 중인 한 경찰 관계자는 “최근 수사 과정에서 한국인 브로커가 개입된 정황이 발견되는 등 조직적인 사기일 가능성을 열어두고 추적 중”이라며 “군인 가족뿐만 아니라 의사, 경찰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가족이 대상인 경우도 확인되었다. 시간을 들여 동정을 이끌어내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경계를 푼다. 한 차례도 직접 교류가 없던 SNS 친구가 금품을 요구하면 반드시 범죄를 의심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상현 기자 moon@bizhankook.com


[핫클릭]

· 국립중앙박물관, 근로수당 문제제기 계약직에 '부당처우' 감사 중
· 끊이지 않는 뉴스 링크 논란, 네이버·다음 '만만디'
· [현장] '비상구·소화전은 어디에…' 명동 화재안전특별조사 그후
· [김대영의 밀덕] 차질 우려되는 해군 해상작전헬기 2차 사업
· '과연 이론대로 될까' 스테이블코인 투자과열 주의보


<저작권자 ⓒ 비즈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