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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흥망] 다각화 아픔 겪고 '초심'으로 돌아온 쌍방울

97동계유니버시아드 무리한 투자로 그룹 부도…속옷 생산 주력, 남영비비안도 인수

2020.07.28(Tue) 18:26:25

[비즈한국] 지난 4월 1일 (주)쌍방울 대표로 영업사원 출신 김세호 씨(42)가 선임되면서 ‘샐러리맨 신화’로 화제가 됐다. 속옷 제조기업​ 쌍방울은 ‘트라이’ 상표로 한때를 풍미했다. 1980년대에는 무역, 패션, 컴퓨터까지 영역을 넓혔고, 1997년 15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매출 5000억 원을 기록했다. 2019년 12월 현재 쌍방울 매출은 965억 4347만 원이다. ​많던 계열사들은 대부분 폐업했다. ​국내 대표 ​섬유기업 쌍방울의 쇠락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1995년 7월 15일 전북 이리공장에서 열린 쌍방울 비전 21 선포식에서 이봉녕 회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이 회장은 2010년 11월 4일 작고했다. 사진= 연합뉴스

 

#‘녕’자 돌림 형제가 만든 쌍방울

 

쌍방울그룹은 1954년 전북에서 이봉녕, 이창녕 두 형제로부터 비롯됐다. 전북 이리시(현 익산시)에서 ‘형제상회’로 속옷 도매업을 시작한 이들은 1962년 삼남메리야스를 설립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하지만 자금압박 등의 문제가 있었던 데다 이봉녕 회장은 ‘삼남표’라는 상표가 전국 소비자들의 의식 속에 파고들기 어렵다고 판단, 상표 변경을 모색했다.

 

1963년 두 형제는 쌍녕섬유공업사라는 이름으로 제조업을 시작했다. 여기서 쌍녕은 ‘두 쌍(雙)’, ‘방울 령(鈴)’으로, 자신들의 이름 돌림자 ‘령’에서 따왔다. 이듬해인 1964년 ‘방울 령(鈴)’​의 음 대신 뜻을 가져와 ‘쌍방울’ 브랜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쌍녕섬유공업사는 10여 년간 ‘쌍방울’을 브랜드명으로만 사용하다가 1977년 사명을 바꿔 (주)쌍방울로 거듭났다.

 

1960~1970년대 경제 성장과 더불어 쌍방울도 크게 성장했다. ‘메리야스’의 경우 생활필수품이기에 국민 소득 증가에 따라 수요 증가로 연결됐다. 하지만 메리야스의 주 원료인 면사의 공급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해 원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쌍방울은 전국 방적공장을 찾아다니며 면사 확보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했다. 이때 많은 섬유사업체들이 문을 닫았지만 쌍방울은 지속 성장했다.

 

쌍방울그룹이 1975~1989년까지 사용한 로고.


그 결과 1974년 5억 2000만 원에 불과했던 쌍방울 매출액은 1년 만에 29억 8900만 원으로 6배 정도 성장했다. 1977년에는 매출 100억 원을 돌파하면서 재계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편 1970년대 중후반 메리야스 시장은 백양, 쌍방울, 독립문, 세 업체로 시장을 점유했다. 특히 70% 이상을 쌍방울과 백양이 나눠가지며 치열하게 경쟁했다. 

 

#2세 경영의 도래

 

1979년 이봉녕 창업주의 장남 이의철 씨가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며 쌍방울의 2세 경영이 시작됐다. 이의철 사장은 사업 다각화에 주력하며 쌍방울을 그룹으로 만들어갔다. 이 사장은 1980년 12월 계열 면방업체인 쌍녕방적을 흡수합병하고, 이듬해 1월 제품 다각화 일환으로 유아복을 생산했다. 1982년에는 팔봉컨트리클럽(골프장)을 9홀에서 18홀로 키우고 섬유 부문을 중심으로 확장을 시도했다. 

 

1989년부터 사용한 쌍방울 로고로 두개의 원을 겹쳐 꽃을 표현했다. 사진=쌍방울그룹 제공


1984년부터 쌍방울은 본격적으로 사업 다각화에 나섰다. 무역 부문을 ‘쌍방울상사’로 분할해 종합무역회사로 키웠다. 1985년에는 일본 다반과 합작해 ‘한국다반’을 출시해 패션업계에 진출했다. 1988년 ‘마이크로웨어컴퓨터’를 인수해 소프트웨어 사업에도 진출한다. 이외에 전화기 생산업체 동전산업도 인수했다.

 

이 사장의 사업 다각화는 성공적이었다. ​계열사들은 대부분 흑자를 남겼다. 1993년 22개의 계열사가 5000억 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자산규모는 1조 4200억 원에 달했으며, 종업원은 6000명이 넘었다. 쌍방울그룹은 재계 순위 51위에 이름을 올렸다.

 

#건설업과 관광업 진출이 부른 그룹의 몰락

 

쌍방울그룹의 쇠락은 쌍방울개발로부터 비롯되었다. 1990년 ​무주리조트를 개장한 쌍방울개발은 3년 후 이곳에 3800억 원을 쏟아붓는다. 1997년 열릴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 개최를 위해 국제 규격에 맞는 경기장 시설 및 관련 부대시설을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쌍방울개발이 무주리조트를 만들 때 투자한 돈을 채 회수하기도 전에 또 다시 거액을 들여 동계유니버시아드를 준비했다는 것이다. 당시 쌍방울개발은 자금난에 부딪치자 금리가 높은 제2금융권에서 추가로 2870억 원을 빌리며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 투자를 강행했다.

 

결국 쌍방울그룹은 1997년 10월 외환위기 당시 만기가 도래한 8700억 원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부도를 맞게 된다. 당시 (주)쌍방울은 쌍방울개발에 4600억 원에 달하는 지급보증을 선 상태였다.

 

부도 당시 쌍방울그룹 전체의 부채 규모는 1조 1780억 원이었는데, 쌍방울개발의 무주리조트, 동계유니버시아드 관련 부채가 8700억 원에 이르렀다. 제2금융권에서 빌린 돈이 7000억 원이었다. 1998년 9월 쌍방울그룹에 대한 회사정리절차 개시결정이 내려지고 1999년 8월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계열사들은 다른 기업에 팔려나갔다. 이후 모기업인 (주)쌍방울은 2002년 11월 에드에셋(현 SBW홀딩스)에 매각된다.

 

당시 이의철 부회장은 이봉녕 회장과 선배 경영진의 ‘안전 경영’ 원칙을 저버리고 무리하게 사업 다각화를 시도해 그룹이 해체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이의철 부회장에 대한 소식은 전해진 바가 없다. 창업자 이봉녕 회장은 2010년 11월 4일 작고했다.

 


그룹의 모기업 (주)쌍방울은 이후 2004년 대한전선그룹, 2010년 레드티그리스, 2014년 광림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광림의 대주주는 투자 및 부동산투자 자문업체​ 칼라스홀딩스로, 4명의 개인이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현재 ​쌍방울은 ​언더웨어류의 생산을 주 업종으로 하며, 올 3월에는 124억 원 상당의 방역마스크 공급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중국의 6개 사업장과 어반에이지를 종속기업으로, 나노스와 SBW호텔을 관계기업으로, 기타 관계사로 남영비비안을 두고 있다. 여성 속옷 제조기업인 남영비비안은 지난해 11월 쌍방울에 인수됐으며, 지난 20일 사명을 비비안으로 바꾸었다. 

정동민 기자 workhard@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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