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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와이너리] '자동차 디자인 거장' 마르첼로 간디니를 추모하며

향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천재 디자이너…람보르기니부터 르노5까지 이어진 확고한 디자인 철학

2024.03.18(Mon) 16:17:14

[비즈한국] 자동차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 보았을 이탈리아 태생 산업디자이너 마르첼로 간디니가 고향 토리노 근교 도시인 리볼리에서 3월 13일(현지시각)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엄격했던 간디니의 아버지는 아들이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자동차에 끌린 간디니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좇기로 결정했다. 그는 1965년 베르토네(Bertone)에 입사한 이래 15년간 여러 모델의 디자인을 맡았고, 1979년 독립한 이후에는 고유의 디자인 스튜디오를 세워 최근까지 활동했다. 평생 디자이너로 일한 인물의 디자인 경향을 한두 문장으로 단정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간디니의 디자인 경향은 ‘면과 면이 이루는 각을 살린 강렬한 선의 표현’으로 상대적으로 명쾌하게 집약할 수 있다.

 

자동차 디자인회사 그루포 베르토네 근무할 당시 마르첼로 간디니(우)와 누치오 베르토네 사장(좌). 사진=그루포 베르토네 인스타그램

  

간디니의 커리어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모델을 꼽자면 우선 알파로메오 카라보(1968)를 들 수 있다. 베르토네에서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던 간디니가 디자인한 카라보는 납작한 차체와 화려한 녹색 컬러로 단연 이목을 끌었다. 위쪽으로 향하는 독특한 시저 도어를 열어 둔 모습은 높이 1m가 채 안 되는 극단적인 비율과 어우러져 마치 날개를 펼친 딱정벌레를 연상시켰다. 이름 자체도 딱정벌레(Carabus auratus)에서 따온 것이다. 간디니를 세상에 처음 알린 람보르기니 미우라(1966)는 어떨까? 미우라는 걸작이긴 하지만 간디니의 작품 계보에 놓기엔 아직 정립되지 않은 혼돈이 엿보여 여기서는 제외하려 한다. 과감한 선이 돋보이는 카라보 이후에 비로소 ‘간디니 스타일’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968년 최초의 인류를 달 궤도로 데려간 아폴로 8호 임무를 기념하여 디자인한 알파 로메오 카라보(Alfa Romeo Carabo) 사진=그루포 베르토네 인스타그램

 

1974년 양산된 람보르기니 쿤타치는 명실상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쿤타치 이전 람보르기니는 성능은 뛰어났지만 디자인 면에서 동시기 스포츠카 대비 크게 차별화된다고 보기엔 힘들었다. 간디니는 카라보에서 시작된 직선 위주의 쐐기형 모티브를 갈고 닦아 쿤타치에 완성된 형태로 입혔다. 땅에 붙을 듯 납작하게 출발하여 도어 근처에서 고조되는 긴장감은 투박하게 돌출된 직사각형 공기 흡입구에서 절정에 달한다. 사선으로 치켜 올려 마무리한 뒷모습은 자동차라기보다 전투기의 그것에 가깝다. 쿤타치의 디자인은 외부에도 큰 충격을 안겼지만 람보르기니 내부의 디자인 DNA를 결정지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의를 지닌다. 디아블로부터 레부엘토로 이어지는 람보르기니 주력 모델은 프론트부터 리어까지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 원박스 패키징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으니 그 영향력이 실로 대단한 셈이다.

 

간디니의 대중차 디자인은 람보르기니와의 협업으로 얻은 유명세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뽐낸다. 단박에 떠오르는 모델이 2세대 르노 5(1984)다. 르노 5의 리디자인 작업을 맡은 간디니는 기존 디자인 요소를 유지하면서 현대적인 색을 입히는 쉽지 않은 작업을 해냈다. 사선으로 뚝 떨어지면서 사다리꼴 실루엣을 완성하는 해치 게이트 디자인이 백미다. 시트로엥의 준중형 해치백 BX(1982)도 있다. 각이 가득한 차체에 전면 그릴을 삭제하고 뒤쪽 휠하우스의 일부를 덮은 BX는 대중 지향적 모델인데도 스포츠카의 디자인 요소를 차용한, 서로 다른 두 카테고리의 경계에 선 차로 평가하고 싶다. 평판에 자를 대고 그어 그대로 제작한 듯한 대형 트럭 르노 매그넘(1990)의 캡 디자인은 트럭보다는 미술 작품에 가깝다.

 

마르첼로 간디니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V12 미드십 슈퍼카 람보르기니 쿤타치. 사진=람보르기니 인스타그램

 

간디니의 대표작 리스트를 보면 그의 전성기는 1970-90년대 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군더더기 없는 직선이 장기인 그는 1980년대 말에 들어서 조금씩 시대와 불화하기 시작했다. 간디니의 손끝에서 시작됐지만 클라이언트와의 갈등으로 중도하차함으로써 최종 버전은 다른 디자이너에 의해 완성된 람보르기니 디아블로(1990)와 부가티 EB110(1991)이 대표적이다. 간디니가 만든 디아블로와 EB110의 프로토타입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최종 버전에 비해 낫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자체의 완성도는 여전히 높았으나 슈퍼 스포츠카가 가져야 할 선도적 이미지가 부족했고 기존의 성공 공식을 답습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었다. 사장된 디아블로의 원안을 활용하여 제작된 치제타 V16T(1991)는 그 원인이 전적으로 디자인에 있는 것은 아니나 결과적으로 판매에 실패했다. 그의 퇴조는 자동차 디자인 트렌드가 직선에서 곡선 중심으로 바뀐 시점과 정확히 맞물려 있다.

세상에 유명한 자동차 디자이너는 많다. 그러나 간디니는 일관된 스타일과 적절한 상업성을 조화시켜 크게 성공한 보기 드문 유형이다. 그는 커리어 전반에 걸쳐 자신의 주관을 중시했던 작가형 디자이너지만 트렌드가 달라지자 주류에서 이탈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꼭 모든 스타일에 정통할 필요는 없다. 우수한 한국 출신 디자이너가 꾸준히 배출되는 지금, 국내에서도 이렇게 작가적 행보를 통해 마에스트로의 반열에 오르는 인물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동시에 그의 별세는 작품으로만 알려진 유명인 역시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한 인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거장의 표면 못지않게 그 이면에 숨은 생활사나 비사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디자인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호쾌한 직선을 긋고 떠난 그의 명복을 빈다.

 

​​필자 한동훈은?

서체 디자이너.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현재 서체 스튜디오 얼라인타입에서 다양한 기업 전용폰트와 일반 판매용 폰트를 디자인한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등에 기고했으며 온·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서체 디자인 강의를 진행한다. 2021년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  

한동훈 서체 디자이너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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