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이란발 중동 리스크는 독일 경제의 가장 약한 고리를 다시 찌르고 있다. 26일(현지시각) 로이터통신은 독일 거시경제연구소(IMK)의 보고서를 인용해 “이란발 중동 분쟁이 장기화될 경우, 올해 독일의 경제성장률이 당초 예상치인 1.2%에서 0.2%로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실상 ‘제로 성장’에 그칠 것이라는 경고다. 세바스티안 둘리엔 IMK 소장은 “이번 전쟁이 독일의 탈산업화(Deindustrialisation) 위험을 가중시킬 것”이라며 강한 위기감을 드러냈다. 탈산업화는 제조업 강국인 독일에게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단어다.
에너지 가격이 흔들릴 때마다 독일 제조업은 압박을 받았다. 이미 ‘유럽의 병자(the sick man of Europe)’로 불리기까지 했던 산업 구조가 외부 충격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지 다시 확인되는 순간이다. 전통적인 제조업 중심 구조만으로는 더 이상 이 불확실성을 버틸 수 없다는 판단이 확산되면서, 독일은 국가전략 차원에서 근본적인 대응 방식을 전환하고 있다. 독일이 돌파구로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스타트업이다.
#투자 유치 목표 2배 이상 확대
지난 19일 공개된 독일 연방의회 자료에 따르면, 독일 정부는 WIN(Wachstums- und Innovationskapital, 성장 및 혁신 자본) 이니셔티브 규모를 250억 유로(약 44조 원)로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2024년 9월 120억 유로 목표를 밝힌 지 약 1년 반 만에 2배 이상 키운 것이다.
WIN 이니셔티브는 독일 정부와 주요 기업, 금융기관이 공동으로 출범시킨 프로그램이다. 스타트업이 아이디어 단계에서 실제 산업으로 확장되는 스케일업 단계에서 필요한 자본을 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독일이 직면한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자본의 흐름이었다. 연구와 초기 창업 단계에서는 경쟁력이 있지만, 기업이 성장하는 단계에서 대규모 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많은 스타트업이 해외로 이전하거나 성장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독일 스타트업의 약 26%가 자금 부족으로 해외 이전을 고려하고 있다는 지난해 조사 결과도 있다. 또 프랑스 중앙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2023년 EU의 VC 투자액은 890억 유로(154조 원)인 반면, 미국은 1조 유로(1738조 원) 이상이다. 유럽은 미국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자본으로 싸우고 있다.
WIN은 바로 이 높은 문턱을 넘기 위한 장치다. 정부가 스타트업에 직접 투자하는 대신 벤처캐피털과 성장펀드에 자금을 공급하고, 스타트업 투자에 보수적이었던 연기금과 보험 자금 등 민간 자본을 시장으로 끌어들이는 구조를 설계했다. 공공 자금을 마중물로 민간 자본을 끌어들이고, 스타트업 투자 시장을 하나의 자산군으로 제도화하려는 것이다.
#제도로 부족하면 정부가 직접 산다
이와 함께 독일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기술 영역에서는 특정 스타트업에 직접 베팅하는 방식도 병행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블랙 세미컨덕터(Black Semiconductor)다. 독일 정부와 주정부는 2024년 6월 이 회사에 약 2억 2870만 유로의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민간 투자까지 포함하면 총 규모는 2억 5000만 유로(약 4400억 원)를 넘는다.
블랙 세미컨덕터는 기존 실리콘 반도체의 한계를 넘는 그래핀 기반 광통신 칩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데이터 전송 속도와 에너지 효율을 동시에 개선할 수 있어, 자동차·산업·AI 인프라 전반에 영향을 미칠 핵심 기술로 평가된다. 이 회사는 올해 3월 네덜란드 그래핀 기업 어플라이드 나노레이어스(Applied Nanolayers)를 인수하며 기술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독일 정부의 이 같은 이례적인 지원 배경은 국가가 초기 기술 기업의 성장 경로에 직접 개입해 산업 주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이다.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부품에서 미국과 아시아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차세대 기술 주도권마저 놓칠 경우 산업 경쟁력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생존형 동맹’을, AI 스타트업은 ‘실용’으로 응답
WIN의 영향으로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의 협력 구조도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리들(Lidl)을 운영하는 슈바르츠(Schwarz)그룹과 자동차·산업 기술 기업 보쉬(Bosch)는 독일 AI 스타트업 알레프 알파(Aleph Alpha)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며 산업용 AI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 생산·물류·고객 데이터 등 핵심 산업 데이터를 미국이나 중국의 클라우드에 의존하지 않고, 유럽 내부에서 처리하겠다는 전략이다.
알레프 알파의 행보는 여기서 한 번 더 방향을 틀었다. 이 회사는 이후 범용 대규모 언어모델(LLM) 개발 경쟁에서 한 발 물러나 기업·정부 고객 전용 AI 운영 플랫폼으로 완전히 전환했다. 창업자는 “세상이 바뀌었다. 유럽산 LLM 하나만으로는 비즈니스 모델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 선택은 독일 AI 생태계 전체의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베를린 스타트업 파를로아(Parloa)가 그 증거다. 파를로아는 올해 1월 시리즈 D 라운드에서 무려 3억 5000만 달러(약 5300억 원)의 투자금을 끌어모았다. 불과 7개월 전 시리즈 C 당시의 투자 규모를 5배 이상 경신함과 동시에 기업 가치도 약 30억 달러(약 4조 4000억 원)로 단숨에 3배 가까이 끌어올렸다. 자금 조달의 규모와 속도 모두 독일 스타트업 역사상 이례적인 기록이다. 콜센터 AI 에이전트라는 철저히 B2B 산업 밀착형 서비스로 알리안츠, SAP, 부킹닷컴 등 주요 기업 고객을 확보한 결과다.
#이제 민간 자본이 판 짠다
정부 주도의 WIN이 민간 자본을 제도적으로 끌어들이는 구조였다면, 이제는 민간 자본이 스스로 투자 판을 짜기 시작했다.
도이체텔레콤 투자 부문에서 분리 독립한 DTCP는 올해 1월 5억 유로(8700억 원) 규모의 방산 전용 VC 펀드 ‘프로젝트 리버티(Project Liberty)’를 출범시키며 이미 3억 유로(5218억 원)의 투자 약정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유럽 최대 규모의 방산 전용 민간 VC 펀드다.
주목할 점은 이들의 방향 전환이다. 원래 기업용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투자사였던 DTCP는 방산으로 투자 영역을 확장했다. 안보 리스크가 커질수록 자본의 흐름이 어디로 이동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투자 다변화가 아니라 시장 주도권의 이동이다. 초기에는 정부가 WIN을 통해 민간 자본을 스타트업 시장으로 끌어들이는 구조였다면, 이제는 민간 자본이 스스로 투자 영역을 확장하며 시장을 이끌고 있다. 정부가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구조를 넘어 스타트업·대기업·민간 자본·국가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독일과 닮은 한국, ‘소부장’만으론 안 돼
한국과 독일의 산업 구조는 닮았다. 두 나라 모두 제조업이 GDP의 중추이고, 대기업-협력사 생태계가 견고하다. 스타트업을 산업 생태계의 ‘주류에서 분리된 존재’로 취급해온 점도 같았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자 독일은 “어떻게 스타트업을 육성할 것인가”에서 “국가와 대기업이 스타트업과 어떻게 공생할 것인가”로 질문 자체를 바꿨다.
한국에도 소부장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 같은 시도가 없진 않았다. 반도체, 배터리, 방산 모두 한국이 이미 강점을 가진 분야고, 대기업 공급망의 핵심 틈새를 스타트업이 채울 영역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상당수 프로그램은 여전히 ‘스타트업을 키워 납품사로 만들자’는 하청 구조 프레임을 못 벗어났다. 제도의 부재보다는 프레임의 문제일 것이다.
독일이 위기 앞에서 스타트업을 전략적 파트너로 격상한 건 법을 고쳐서가 아니라 절박함 때문이다. 블랙 세미컨덕터가 TSMC·인텔과 같은 영역에서 경쟁하기보다 칩 간 광통신이라는 새로운 레이어를 파고든 것처럼, 한국 스타트업도 삼성·SK 공급망 안에서 대체 불가능한 한 고리가 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그 절박함이 아직 우리에게 없다는 점이다.
필자 이정우는 17년간 언론사 기자로 자동차, 2차전지, 중공업 등 주요 산업을 비롯해 국방, 외교, 환경, 교육, 보건복지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담당했다. 특히 모빌리티 및 에너지 전환과 지속가능성 중심의 산업 구조 변화를 현장에서 취재했다. 현재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123팩토리'의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
이정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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